"한국에서의 광복절인 8월 15일은 우리 민족들이 침략자에 맞서 싸운 역사를 떠올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주한러시아대사관이 12일 8·15 광복절을 기념해 발표한 기고문에서 "우리가 광복절을 함께 기념함으로써 러시아와 한국 간 양자 관계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대사관은 "일본 군국주의를 격파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는 일에 누가 앞장섰는지에 대해 상기하고자 한다"며 "소련군이 한민족을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 강조했다.
또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얄타 및 포츠담 회담에서 채택된 합의사항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며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소련은 동맹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피력했고, 이는 같은 연합국이면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를 수년 동안 미루는 데 급급했던 미국과 영국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고 평가했다.
이어 "특히 자바이칼 전선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의 성과가 가장 성공적이었다"면서 "소련군의 진군을 막아보려는 적군의 모든 반격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고 상기했다.
대사관은 또 "한반도 영토 내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군대는 오직 소련의 제25 군과 태평양함대뿐이었다. 소련이 이 전투에서 얻은 인명 손실은 1500명의 사망자를 포함 총 4500명이었다"며 "미군도 기타 그 어떤 다른 국가의 군대도 한반도 해방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부대가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8일로 이미 일본이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후였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 소련군이 수행한 역할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 주민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이들은 소련의 군지휘관들에게 감사의 서한과 축전을 보내곤 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소련의 대일전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며 "우선 소련의 대일전으로 역내 많은 민족들이 수십년 동안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사관은 끝으로 "소련 지도부와 군사 당국의 단호한 행동이 한반도와 중국의 방대한 영토를 일본군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데 기여했고, 2차 세계 대전의 조속한 종식에 이바지했다"고 거듭 전했다.
다음은 주한러시아대사관 기고문 전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소련의 역할
- 대일본전 승리를 중심으로-
2020년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민족은 35년 동안의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 날을 모두가 기념한다. 그리고 9월 2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린 날이다. 이렇듯 의미 있는 기념일들을 앞두고 일본 군국주의를 격파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는 일에 누가 앞장섰는지에 대해 상기하고자 한다.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얄타 및 포츠담 회담에서 채택된 합의사항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소련은 동맹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피력했고, 이는 같은 연합국이면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를 수년 동안 미루는데 급급했던 미국과 영국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
8월 8일 경 극동지역 내 소련군의 수는 1 669 500명에 달했고, 소-몽골인민혁명연합군에 소속된 소련군의 수는 16 000명이었다. 반면, 이들과 대치하게 될 일본군과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 규모는 1백만 명에 육박했다. 게다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에 강력한 방어선마저 구축되어 있었다.
소련과 만주 지역 간 경계선을 따라 큰 산맥과 하천, 넓은 습지대가 형성된 범람원이 펼쳐져 있었고, 이러한 지형에 힘입어 무너뜨리기 힘든 자연적인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몽골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 지역은 물이 없는 반사막 지대이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길조차 제대로 나지 않은 지형이 대부분이었다. 남사할린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역이자 늪지대였고, 쿠릴 열도 대부분의 지역은 자연요새를 방불케 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대일 전쟁은 계획대로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1945년 8월 8일 - 9일 정확히 0시에 개시되었다. 당시 형성된 전선의 총 길이는 5130km였다. 기습을 위해 하늘에서의 공습과 각종 준비 포격은 생략되었다. 당시 적군은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강한 공격으로 인해 조직적인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특히 자바이칼 전선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의 성과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제6 근위전차군은 전쟁 개시 후 5일만에 450km나 주파했고, 사전 계획보다 하루를 앞당겨 대 힝간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의 중앙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관동군의 먼 후방인 힝간-봉천 지역으로 진격한 소련군 덕분에 만주국의 중요한 군사, 행정, 산업 중심지에 대한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소련군의 진군을 막아보려는 적군의 모든 반격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한편, 제1극동전선군은 만주작전 초반에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거센 일본군의 저항에 맞닥뜨렸다. 특히 만주의 주요 교통 요충지인 무단장 시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8월 16일에 이르러서야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었던 이 교통의 요충지가 최종적으로 소련군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듯 제1극동전선군의 눈부신 활약을 통해 하얼빈-지린 방면 공세를 위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8월 11일 해군육전부대의 활약으로 웅기 항이, 8월 13일에는 나진 항이, 8월 16일에는 청진 항이 함락되었다.
만주전략공세작전과 동시에 8월 11일부터는 남사할린 지역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지극히 열악한 산악, 삼림, 늪지대의 조건 속에서 전방위적이고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실시된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사할린에서의 전투는 처음부터 치열한 성격을 띠었고 무려 8월 25일까지 계속되었다.
8월 19일 지린, 봉천, 창춘 지역에 항공육전부대가 투입되었다. 봉천 비행장에서 소련 항공육전부대원들이 만주국의 푸이 황제와 그 수행원들을 태운 채 일본으로 출발하려던 비행기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도 소련의 항공육전부대는 8월 23일 아르투르 항과 대련 시에도 투입된 바 있다.
소련 육군과 육전부대가 8월 24일 함흥과 평양에서 전개한 강력한 연합작전과 태평양함대의 공격 덕분에 8월 말 경 38선까지의 북한의 모든 영토가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8월 18일 제2극동전선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쿠릴상륙작전을 펼쳤다. 쿠릴 열도의 여러 섬들은 넘기 힘든 자연요새로 둔갑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슘슈 섬이 중심점의 역할을 했다. 슘슈 섬에서 며칠에 걸쳐 혈전이 지속되었고, 8월 23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항복했다. 8월 30일 경 쿠릴 열도 북쪽과 중부 지역의 모든 섬들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8월 28일부터 제2극동전선군과 북태평양전단은 이투루프, 쿠나쉬르, 시코탄, 하보마이 등 남 쿠릴 도서지역 장악에 착수했다. 일본 주둔군은 별다른 저항이 없었고, 그 결과 9월 5일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 후방에서 활발했던 일본정찰부대, 자살부대, 일부 광신적인 병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소련의 지휘관과 정치장교들이 희생되기 일쑤였다. 이들이 벌인 테러행위는 매우 극악무도했고, 새디즘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각종 반인륜적 고문행위, 괴롭힘, 사체 훼손 등을 동반했다.
이 시점에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바로 소련군이 한민족을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영토 내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군대는 오직 소련의 제25 군과 태평양함대 뿐이었다. 소련이 이 전투에서 얻은 인명 손실은 1500명의 사망자를 포함 총 4500명이었다. 미군도 기타 그 어떤 다른 국가의 군대도 한반도 해방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부대가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8일로 이미 일본이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후였다.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 소련군이 수행한 역할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 주민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이들은 소련의 군지휘관들에게 감사의 서한과 축전을 보내곤 했다.
1945년 9월 1일 경에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가 각 전선의 부대와 태평양 함대에 하달한 모든 과제는 사실상 완수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고, 이로써 소-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9월 3일은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령에 따라 '전국민의 축제의 날 – 대일본전 승전 기념일'로 공표되었다.
1945년 9월 12일 자 소련정보국 보도에 따르면, 8월 9일부터 9월 9일까지 일본 측 사망자 수는 병사와 장교 합산 약 8만 명 이상이었고, 소련군의 인명피해는 위생병 포함 약 3만 6456명이었다.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의 인명피해는 약 197명이었고, 이 중 전사자는 72명이었다.
소련의 일본 격파는 일본이 극동지역에서 수년 동안 펼쳤던 침략정책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시작 전에 이미 일본은 소련에 대한 침략을 목표했고, 소련은 극동지역 내에서 추진되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1937년-1941년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1938년 하산 호수 지역과 1939년 할킨골 강 지역에서 일본 침략군 격파 등). 1941년 소-일 중립협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5년까지 소련과의 접경지역에 약 150만명의 관동군을 주둔시켰고, 이로 인해 2차 대전의 가장 힘든 시기조차 소련군은 극동 지역에 큰 규모(약 1백만 명)의 방어세력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소-일 중립협약을 체결한 이후로 일본군이 소련 국경을 넘은 횟수는 1400번에 달한다. 추후에 알려진 바로는 일본은 옴스크까지의 소련 영토를 점령하는 침공 계획을 1943년까지 검토한 바 있다.
한편, 1945년 8월의 공격이 소련이 '신의를 저버린' 공격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소련은 전적으로 국제법에 따라 선전포고 4개월 전 소-일 중립협약을 파기했다.
소련의 대일전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우선 소련의 대일전으로 역내 많은 민족들이 수십년 동안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반도는 1910년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만주는 1931년, 중국의 대부분은 1937년부터 점령된 바 있다). 게다가 소련은 동맹국들이 큰 면적의 새로운 영토로 소련의 참전을 보상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췄음에도 이미 협상 단계에서 모든 종류의 합병제의를 거절하고 1905년 일본군이 빼았았던 남 사할린과 1875년 양보했던 쿠릴섬의 반환만을 요구했다.
일본은 히틀러의 나치군이 항복할 시점에도 수년 동안 전쟁을 이어갈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1945년 여름 경 미국은 일본의 군사 및 경제 역량을 초토화시키는데 성공하지 못 했고, 일본은 1월 - 7월 사이에 63개의 신규사단을 편성하여 수도에 약 370만명의 군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군지도부와 정치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방어를 통해 연합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명예를 회복하길 원했다. 일본은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인원 (약 2천만명의 가미가제군 포함)을 동원하였고, 필요시 황제와 황실 가족을 만주로 피신시킬 계획이었다. 적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일본군은 막대한 규모의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계획이었고, 1941년부터 진행해왔던 핵프로그램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전략적 교착상태에 봉착하게 된 일본은 '빅 3' 사이에서 무르익었던 대립구도를 파고 들어 미국과의 협상에서 소련이 중개국의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할 심산도 갖고 있었다 (그 대가로 소련에 영토를 양보할 계획이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의 도움 없이 일본과의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 미국은 일본 땅으로 전장을 옮길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을 위해서는 700만 명의 사병과 장교가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전선에 투입되었던 연합국들의 사병 및 장교 수는 25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산술적 계산대로라면 미국은 1947년까지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고 (다른 평가 자료에 따르면 1950년까지), 이것이 동기가 되어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이끌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소련군이 가장 전투력이 막강했던 일본의 연합지상군을 대상으로 전격전을 펼친 덕분에 일본의 투항문제가 결정지어 진 것이다. 1년 정도 소련군의 만주 방면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일본 사령부의 계획을 비웃듯, 소련군은 일주일만에 관동군에 타격을 입혔고, 불과 11일 만에 완전히 격파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사 뿐 아니라 전체 전쟁 역사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일본의 군지도부와 정계 대표들은 8월 14일 항복을 선언했는데, 바로 소련군이 만주 지역에서 전개했던 주요 작전이 종결된 날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은 이 전쟁을 종식시킨 주요 요소로 간주할 수 없다. 만주국의 격파 그리고 만주국에 위치했던 대규모 산업기지(이 지역에 합성연료 생산량의 55%가 집중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중요한 전략생산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의 손실로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항전을 이어갈 가능성이 모조리 박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참전으로 연합국이 입었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막을 수 있었고, 수백만명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일본 침공계획을 세웠던 미군 지도부의 산출에 따르면 미군 100만 명, 영국군 5만 명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전사한 미군 수가 41만 8천명인 것으로 떠올려 보라), 일본군 1000만 명 (양민 수 포함) 에 달하는 인명손실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소련군의 만주전략공세작전으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 수는 약 2만 1000명 이었고, 이는 과거 미군이 태평양 도서지역에서 펼쳤던 훨씬 작은 규모의 작전에서 기록한 인명피해 수에 불과한 수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소련 지도부와 군사 당국의 단호한 행동이 한반도와 중국의 방대한 영토를 일본군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데 기여했고, 2차 세계 대전의 조속한 종식에 이바지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광복절인 8월 15일은 우리 민족들이 침략자에 맞서 싸운 역사를 떠올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광복절을 함께 기념함으로써 러시아와 한국간 양자관계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한러시아대사관이 12일 8·15 광복절을 기념해 발표한 기고문에서 "우리가 광복절을 함께 기념함으로써 러시아와 한국 간 양자 관계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대사관은 "일본 군국주의를 격파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는 일에 누가 앞장섰는지에 대해 상기하고자 한다"며 "소련군이 한민족을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고 강조했다.
또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얄타 및 포츠담 회담에서 채택된 합의사항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며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소련은 동맹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피력했고, 이는 같은 연합국이면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를 수년 동안 미루는 데 급급했던 미국과 영국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고 평가했다.
대사관은 또 "한반도 영토 내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군대는 오직 소련의 제25 군과 태평양함대뿐이었다. 소련이 이 전투에서 얻은 인명 손실은 1500명의 사망자를 포함 총 4500명이었다"며 "미군도 기타 그 어떤 다른 국가의 군대도 한반도 해방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부대가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8일로 이미 일본이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후였다"고 소개했다.
아울러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 소련군이 수행한 역할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 주민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이들은 소련의 군지휘관들에게 감사의 서한과 축전을 보내곤 했다"고 언급했다.
또한 "소련의 대일전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며 "우선 소련의 대일전으로 역내 많은 민족들이 수십년 동안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사관은 끝으로 "소련 지도부와 군사 당국의 단호한 행동이 한반도와 중국의 방대한 영토를 일본군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데 기여했고, 2차 세계 대전의 조속한 종식에 이바지했다"고 거듭 전했다.
다음은 주한러시아대사관 기고문 전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소련의 역할
- 대일본전 승리를 중심으로-
2020년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한민족은 35년 동안의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난 이 날을 모두가 기념한다. 그리고 9월 2일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막을 내린 날이다. 이렇듯 의미 있는 기념일들을 앞두고 일본 군국주의를 격파하고, 동북아시아 지역에 평화와 자유를 선사하는 일에 누가 앞장섰는지에 대해 상기하고자 한다.
소련의 대일본 선전포고는 얄타 및 포츠담 회담에서 채택된 합의사항에 전적으로 부합하는 것이었다. 대일 선전포고를 통해 소련은 동맹의 의무를 마지막까지 다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피력했고, 이는 같은 연합국이면서 '제2전선'을 형성하는 문제를 수년 동안 미루는데 급급했던 미국과 영국과는 차별화된 행보였다.
8월 8일 경 극동지역 내 소련군의 수는 1 669 500명에 달했고, 소-몽골인민혁명연합군에 소속된 소련군의 수는 16 000명이었다. 반면, 이들과 대치하게 될 일본군과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군 규모는 1백만 명에 육박했다. 게다가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에 강력한 방어선마저 구축되어 있었다.
소련과 만주 지역 간 경계선을 따라 큰 산맥과 하천, 넓은 습지대가 형성된 범람원이 펼쳐져 있었고, 이러한 지형에 힘입어 무너뜨리기 힘든 자연적인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몽골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이 지역은 물이 없는 반사막 지대이자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길조차 제대로 나지 않은 지형이 대부분이었다. 남사할린 지역은 험준한 산악지역이자 늪지대였고, 쿠릴 열도 대부분의 지역은 자연요새를 방불케 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대일 전쟁은 계획대로 현지 시간을 기준으로 1945년 8월 8일 - 9일 정확히 0시에 개시되었다. 당시 형성된 전선의 총 길이는 5130km였다. 기습을 위해 하늘에서의 공습과 각종 준비 포격은 생략되었다. 당시 적군은 예상치 못한 소련군의 강한 공격으로 인해 조직적인 저항조차 제대로 하지 못 했다.
특히 자바이칼 전선과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의 성과가 가장 성공적이었다. 제6 근위전차군은 전쟁 개시 후 5일만에 450km나 주파했고, 사전 계획보다 하루를 앞당겨 대 힝간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의 중앙지역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관동군의 먼 후방인 힝간-봉천 지역으로 진격한 소련군 덕분에 만주국의 중요한 군사, 행정, 산업 중심지에 대한 공격을 전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 소련군의 진군을 막아보려는 적군의 모든 반격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한편, 제1극동전선군은 만주작전 초반에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거센 일본군의 저항에 맞닥뜨렸다. 특히 만주의 주요 교통 요충지인 무단장 시 지역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8월 16일에 이르러서야 강력한 방어선이 구축되었던 이 교통의 요충지가 최종적으로 소련군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듯 제1극동전선군의 눈부신 활약을 통해 하얼빈-지린 방면 공세를 위한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8월 11일 해군육전부대의 활약으로 웅기 항이, 8월 13일에는 나진 항이, 8월 16일에는 청진 항이 함락되었다.
만주전략공세작전과 동시에 8월 11일부터는 남사할린 지역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 공격은 지극히 열악한 산악, 삼림, 늪지대의 조건 속에서 전방위적이고 강력한 방어시설을 갖춘 강력한 적군을 상대로 실시된 공격이었다. 그렇기에 사할린에서의 전투는 처음부터 치열한 성격을 띠었고 무려 8월 25일까지 계속되었다.
8월 19일 지린, 봉천, 창춘 지역에 항공육전부대가 투입되었다. 봉천 비행장에서 소련 항공육전부대원들이 만주국의 푸이 황제와 그 수행원들을 태운 채 일본으로 출발하려던 비행기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그 밖에도 소련의 항공육전부대는 8월 23일 아르투르 항과 대련 시에도 투입된 바 있다.
소련 육군과 육전부대가 8월 24일 함흥과 평양에서 전개한 강력한 연합작전과 태평양함대의 공격 덕분에 8월 말 경 38선까지의 북한의 모든 영토가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8월 18일 제2극동전선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쿠릴상륙작전을 펼쳤다. 쿠릴 열도의 여러 섬들은 넘기 힘든 자연요새로 둔갑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슘슈 섬이 중심점의 역할을 했다. 슘슈 섬에서 며칠에 걸쳐 혈전이 지속되었고, 8월 23일이 되어서야 일본군은 항복했다. 8월 30일 경 쿠릴 열도 북쪽과 중부 지역의 모든 섬들은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8월 28일부터 제2극동전선군과 북태평양전단은 이투루프, 쿠나쉬르, 시코탄, 하보마이 등 남 쿠릴 도서지역 장악에 착수했다. 일본 주둔군은 별다른 저항이 없었고, 그 결과 9월 5일 쿠릴 열도 전체가 소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러나 소련군 후방에서 활발했던 일본정찰부대, 자살부대, 일부 광신적인 병사들의 활동으로 인해 소련의 지휘관과 정치장교들이 희생되기 일쑤였다. 이들이 벌인 테러행위는 매우 극악무도했고, 새디즘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각종 반인륜적 고문행위, 괴롭힘, 사체 훼손 등을 동반했다.
이 시점에서 언급하고 싶은 점은, 바로 소련군이 한민족을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했다는 점이다. 한반도 영토 내에서 일본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던 군대는 오직 소련의 제25 군과 태평양함대 뿐이었다. 소련이 이 전투에서 얻은 인명 손실은 1500명의 사망자를 포함 총 4500명이었다. 미군도 기타 그 어떤 다른 국가의 군대도 한반도 해방전에 참여하지 않았다. 미국의 군부대가 한반도에 처음 상륙한 것은 1945년 9월 8일로 이미 일본이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후였다.
일본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어 소련군이 수행한 역할은 만주와 한반도 지역 주민들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고, 이들은 소련의 군지휘관들에게 감사의 서한과 축전을 보내곤 했다.
1945년 9월 1일 경에는 소련군 최고사령부인 '스타브카'가 각 전선의 부대와 태평양 함대에 하달한 모든 과제는 사실상 완수되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은 무조건적인 항복 문서에 서명을 했고, 이로써 소-일 전쟁과 2차 세계대전에 종지부를 찍었다. 9월 3일은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령에 따라 '전국민의 축제의 날 – 대일본전 승전 기념일'로 공표되었다.
1945년 9월 12일 자 소련정보국 보도에 따르면, 8월 9일부터 9월 9일까지 일본 측 사망자 수는 병사와 장교 합산 약 8만 명 이상이었고, 소련군의 인명피해는 위생병 포함 약 3만 6456명이었다. 소-몽 인민혁명연합군의 인명피해는 약 197명이었고, 이 중 전사자는 72명이었다.
소련의 일본 격파는 일본이 극동지역에서 수년 동안 펼쳤던 침략정책의 당연한 수순이었다. 2차 세계 대전 시작 전에 이미 일본은 소련에 대한 침략을 목표했고, 소련은 극동지역 내에서 추진되는 일본의 침략정책에 반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했다(1937년-1941년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 1938년 하산 호수 지역과 1939년 할킨골 강 지역에서 일본 침략군 격파 등). 1941년 소-일 중립협약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1945년까지 소련과의 접경지역에 약 150만명의 관동군을 주둔시켰고, 이로 인해 2차 대전의 가장 힘든 시기조차 소련군은 극동 지역에 큰 규모(약 1백만 명)의 방어세력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소-일 중립협약을 체결한 이후로 일본군이 소련 국경을 넘은 횟수는 1400번에 달한다. 추후에 알려진 바로는 일본은 옴스크까지의 소련 영토를 점령하는 침공 계획을 1943년까지 검토한 바 있다.
한편, 1945년 8월의 공격이 소련이 '신의를 저버린' 공격이었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소련은 전적으로 국제법에 따라 선전포고 4개월 전 소-일 중립협약을 파기했다.
소련의 대일전은 정의와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우선 소련의 대일전으로 역내 많은 민족들이 수십년 동안의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반도는 1910년 일본에 의해 점령되었고, 만주는 1931년, 중국의 대부분은 1937년부터 점령된 바 있다). 게다가 소련은 동맹국들이 큰 면적의 새로운 영토로 소련의 참전을 보상할 의향이 있음을 내비췄음에도 이미 협상 단계에서 모든 종류의 합병제의를 거절하고 1905년 일본군이 빼았았던 남 사할린과 1875년 양보했던 쿠릴섬의 반환만을 요구했다.
일본은 히틀러의 나치군이 항복할 시점에도 수년 동안 전쟁을 이어갈 수 있는 모든 자원을 갖추고 있었다. 1945년 여름 경 미국은 일본의 군사 및 경제 역량을 초토화시키는데 성공하지 못 했고, 일본은 1월 - 7월 사이에 63개의 신규사단을 편성하여 수도에 약 370만명의 군인을 확보하고 있었다.
일본의 군지도부와 정치 지도자들은 적극적인 방어를 통해 연합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혀 명예를 회복하길 원했다. 일본은 전투가 가능한 모든 인원 (약 2천만명의 가미가제군 포함)을 동원하였고, 필요시 황제와 황실 가족을 만주로 피신시킬 계획이었다. 적군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해 일본군은 막대한 규모의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계획이었고, 1941년부터 진행해왔던 핵프로그램에도 일말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전략적 교착상태에 봉착하게 된 일본은 '빅 3' 사이에서 무르익었던 대립구도를 파고 들어 미국과의 협상에서 소련이 중개국의 역할을 해 줄 것을 요청할 심산도 갖고 있었다 (그 대가로 소련에 영토를 양보할 계획이었다).
서방 연합국들은 소련의 도움 없이 일본과의 전쟁을 조속히 종결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완전한 승리를 위해 미국은 일본 땅으로 전장을 옮길 계획을 세웠고, 이 계획을 위해서는 700만 명의 사병과 장교가 필요했다. 그런데 당시 전선에 투입되었던 연합국들의 사병 및 장교 수는 250만 명이 채 되지 않았던 것이다. 산술적 계산대로라면 미국은 1947년까지 전쟁이 길어질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고 (다른 평가 자료에 따르면 1950년까지), 이것이 동기가 되어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이끌기 위해 다양한 외교적 노력을 집중했던 것이다.
소련군이 가장 전투력이 막강했던 일본의 연합지상군을 대상으로 전격전을 펼친 덕분에 일본의 투항문제가 결정지어 진 것이다. 1년 정도 소련군의 만주 방면 진격을 저지하겠다는 일본 사령부의 계획을 비웃듯, 소련군은 일주일만에 관동군에 타격을 입혔고, 불과 11일 만에 완전히 격파하였다. 이는 2차 세계대전사 뿐 아니라 전체 전쟁 역사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였다. 일본의 군지도부와 정계 대표들은 8월 14일 항복을 선언했는데, 바로 소련군이 만주 지역에서 전개했던 주요 작전이 종결된 날이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공격은 이 전쟁을 종식시킨 주요 요소로 간주할 수 없다. 만주국의 격파 그리고 만주국에 위치했던 대규모 산업기지(이 지역에 합성연료 생산량의 55%가 집중되어 있었고, 그 밖에도 중요한 전략생산시설들이 위치해 있었다)의 손실로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되었고 항전을 이어갈 가능성이 모조리 박탈되었던 것이다.
소련의 참전으로 연합국이 입었을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명손실을 막을 수 있었고, 수백만명의 일본인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대일본 침공계획을 세웠던 미군 지도부의 산출에 따르면 미군 100만 명, 영국군 5만 명 (2차 세계대전 전장에서 전사한 미군 수가 41만 8천명인 것으로 떠올려 보라), 일본군 1000만 명 (양민 수 포함) 에 달하는 인명손실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소련군의 만주전략공세작전으로 사망한 일본군 전사자 수는 약 2만 1000명 이었고, 이는 과거 미군이 태평양 도서지역에서 펼쳤던 훨씬 작은 규모의 작전에서 기록한 인명피해 수에 불과한 수치였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소련 지도부와 군사 당국의 단호한 행동이 한반도와 중국의 방대한 영토를 일본군의 지배로부터 해방하는데 기여했고, 2차 세계 대전의 조속한 종식에 이바지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광복절인 8월 15일은 우리 민족들이 침략자에 맞서 싸운 역사를 떠올릴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우리가 광복절을 함께 기념함으로써 러시아와 한국간 양자관계 발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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