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와 이현필의 '이-아' 차이
광주 양림동 양림교회 앞을 지날 때였다.
"이이이이이"
"이보다는 아가 먼저 아닐지요?"
이것이 두 사람이 나눈 첫 대화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가 이현필 옆에서 '이'를 계속해서 발음하며 노래로 부른 것은, '신통(神通, 하느님과 통함)'의 흥(興)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나는 몸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정신입니다. 정신은 밖에서 보이지 않지만 정신은 영원합니다. 정신은 머리를 하늘에 두고 있는 존재이기에 나는 막대기를 세워 영어로 I(아이, 나)라 하듯이 모음 하나로 ㅣ라고 합니다. 이이 저이라 하는 이지요. l긋이 태초에 맨 첫 긋과 맨 마지막 맞긋이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이 됩니다."
즉 모음만으로 된 'ㅣ'는 정신이 하늘과 통하는 모양을 표현한, 다석의 사상적 핵심 언어였다. 정신을 바싹 세워 하늘과 한통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고자 하는 것.
이런 사유에 대해, 도암면 청소골 꾹골 마당바위 위에서 깨달음을 얻은 이현필이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이현필은, 이런 '신통의 언어'를 읽어내지 못했을까. "이보다는 아가 먼저"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로 들린다. 그러자 류영모는 바로 받아서 "아닙니다, 아보다는 이가 먼저입니다"라고 말한다.
하늘이 먼저다 : 인간관계가 먼저다
그리고 둘은 이것에 대해 더 이상 대화를 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견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도 쉽지 않다. 이현필이 말한 '아'와 '이'는, 한글 모음의 순서를 가리킬 수도 있지만 그보다 '아(兒)'를 아이로 생각하고 '이'를 일반의 사람으로 생각해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즉 어린이는 미래의 사람이므로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았을 수 있다. 이런 생각은 이현필이 실천한 아동 보육에 관한 헌신을 떠오르게 한다.
또는 '아'를 아(我, 나)로, '이'를 (異, 다른 사람)로 여겼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주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의미가 된다.
류영모가 다시 즉답한 '아보다는 이가 먼저'라는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 'ㅏ'라는 글자의 형상은 하늘과 직통하는 정신의 막대기 중간에 한 가닥 짧은 뿔이 나와 있다. 이 뿔은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울이는 관심과 다양하게 맺어지는 수평적 인간관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ㅣ'가 먼저 있어야 'ㅏ'가 있다는 말은, 하늘과 통하는 정신이 먼저 갖춰지는 게 믿음의 진수이며 그 뒤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가능하며 인간관계의 확장도 이뤄질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류와 이의 심오한 종교사상 논쟁
만약 류영모의 '이이이 송(頌)'(막대기 모양의 'ㅣ'를 노래한 것이라 '막대기송'이라고도 부른다)을, 이현필이 뜻 그대로 정확하게 알아차렸다면? 이현필은 광주의 총무 정인세에게서 류영모의 '한글 다룸'에 관해 이미 들었을 것이다. 한글로 심오한 종교사상을 표현해내는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기에, 걸어가면서 부른 낯선 노래가 무엇인가를 개념화한 것이라는 점을 짐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ㅣ'가 하늘과 통하는 정신의 꼿꼿한 막대기를 형상화한 기호임을 알아챈 뒤, 이현필은 문득 슬쩍 그것을 부정(否定)하는 방식으로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자 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ㅏ'가 먼저 있어야 'ㅣ'가 있지 않으냐고 응답한 것이다. 즉, 인간관계와 인간들끼리의 소통으로 세상을 닦은 다음, 하늘과 소통하는 'ㅣ'로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에 대해 류영모는 단호히 '하늘 소통'이 먼저라고 반박 응수했다. 이현필의 'ㅏ'는 그의 정통 기독교 전도사를 지낸 이력을 떠올리게 하며 동광원 운동으로 전개된 그의 구세(救世) 활동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류영모는 이 지상의 삶과 육신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어디까지나 인간은 파사(破私)를 통해 신에게로 나아가는 자율적 깨달음만이 중요할 뿐이라고 다시 강조해준 것이다.
이 짧은 대화에 담긴 무궁하고 심오한 철학적 소통이야 말로, 큰 스승 류영모와 큰 목자 이현필의 진면목인지 모른다. 일견, 불교 '화두(話頭)'의 교환 같은 한 장면은 두 사람의 지향과 실천을 드러내는 중요한 암시의 일장(一場)으로도 읽힌다.
류영모 '이이이 송(頌)'은 계천(繼天)노래
이때 나직히 불렀던 류영모의 '이이이 송'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제 때에 쓰던 작은 수첩에 이 노래가 적혀 있다.
ㅣ (이) 소리 (하늘소리)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ㅓ ㅣㅓㅣㅓ
ㅓㅣㅓㅣ ㅓㅣㅓㅣ ㅣㅣㅣㅣ ㅣㅣㅣㅣ
ㅣㅓㅣ ㅣㅕㅣㅡㄹㅣ ㅓㅣㅣㅕ ㅣㅓㄹㅏ
모음만 있으니 낯설어 보인다. 자음을 붙여보자.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어이어 이어이어
어이어이 어이어이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어이 이여이으리 어이이여 이어라
하느님과 소통하는 소리다. 풀어보면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하늘을 향해 정신을 세운다. 이이이이 이이이이
정신을 세워 하늘과 잇는다. 이어이어 이어이어
하늘과 이르려니 어찌 이을지. 어이어이 어이어이
하늘을 향해 정신을 세운다. 이이이이 이이이이
이것을 어찌 하늘과 이으리. 이어이 이여이으리
어찌 잇는가 그냥 하늘과 이어라. 어이 이여 이어라
하느님의 뜻을 잇는 것을 '계천(繼天)'이라 한다. 류영모는, 하늘과 인간을 직접 잇는 기도와 찬송을 '이이이송'으로 표현했다. 한글의 모음(母音)인 'ㅣ'라는 언어기호가 지닌 심오한 형상을 인간신앙의 이미지로 승화해놓았다. 그 형상의 핵심은 인간과 신을 잇는 것(繼)이다. 류영모 사상의 간결하고 탁월한 면모는 이런 점에 있다.
이현필의 해혼(解婚)
해혼(解婚)은 부부의 연(緣)을 다시 풀어주는 행사로,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이 나라에서는 해혼식을 결혼식만큼이나 의미있게 여긴다. 해혼과 이혼이 다른 점은 불화로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을 마무리하고 자유로워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1906년 37세의 마하트마 간디는 부인 카스투라바이와 해혼을 한 뒤 고행의 길을 떠난다.
간디의 결행에 감명을 받은 일본에서는 당시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해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주로 종교적 금욕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런 바람은 조선에도 들어왔다. 1930년대 이세종은 성경을 만난 뒤 부부 동침을 하지 않는 '사실상 해혼'으로 아내가 여러 번 가출한 바 있고, 최흥종의 사위 강순명은 해혼으로 금욕을 실천하는 독신전도단을 만들기도 했다. 1941년 류영모의 해혼 또한 그런 시대적 맥락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이현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27년 이현필은 스승 이세종을 만나면서 그의 삶이 바뀌었다. 그런데 1939년 이현필은 스승의 만류를 무릅쓰고 황홍윤과 결혼을 한다. 그런데 1940년 해산으로 아내가 죽다가 살아난 뒤 이현필은 '일방적 해혼'을 한다. 그는 아내에게 이제부터 남매로 살자면서 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내는 큰 충격을 받았으며 해혼을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와의 숨바꼭질과 갈등이 시작됐다.
아내가 앞문을 열고 침실에 들어오면 남편은 뒷문을 열고 달아났다. 이런 수모를 겪자 아내는 격분하여 칼을 들고 남편을 뒤쫓으며 "차라리 나를 죽이시오, 나도 죽고 당신도 같이 죽읍시다"라고 소리질렀다. 남편은 집을 나갔고, 가끔 귀가해서도 아내를 피해 다녔다. 이러기를 6년, 황씨는 통곡하며 집을 나갔다. 아내는 여순경이 되었고 다른 곳에 개가를 했다. 종교적 신념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이런 풍경은 지금의 관점에선 낯설고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이후 그가 실천한 '성자'의 길은 세상의 소금이 되는 인상적인 역정(歷程)이었다.
예수처럼 살고자 했던 이현필
이현필은 성령의 바람을 일으켰다.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으며 육체적인 매력이 남다른 것도 아니었던 이현필이었지만, 그가 지나는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버리고 기꺼이 그를 따랐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이토록 끌어당긴 것일까. 엄두섭은 이현필 전기 '맨발의 성자'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현필에게는 인격의 진동력이 있었다. 말이 적은 분이나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놀라운 감화력이 있었다. 그 감화력 때문에 그를 한두번 대한 사람은 주저없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 재산도 팽개치고 그를 따랐다. 그는 선풍적인 존재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는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깊은 감동을 주는 신비스런 힘이 있었다. 누구나 그의 얘기를 한번 들은 이는 그를 잊지 못했다."
이현필을 따라왔으나 머물 곳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무리는 집집마다 구걸하며 굶주림을 면했고 다리 밑에 가마니를 깔고 잠을 청했다. 평양신학교를 나온 광주YMCA 총무 정인세까지 직을 버리고 그를 따랐다. 그들은 국유지를 일궈 농사를 지었다. 극심한 가난과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지키며 다른 사람을 돕고 품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는 51세로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자신이 사랑한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서울 종로 거리에 나가 "깨끗하게 사십시오" "가난을 사랑하십시오"라는 말을 전했다.
이현필은 예수의 인격을 묵상하면서 삶의 현장에서 예수처럼 살기를 열망했다. 예수를 닮으려는 이현필은 뭇사람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제자들은 겸손함과 예의, 남녀간의 순결, 무릎을 꿇은 모습, 독실한 신앙과 사랑, 감동적인 영혼의 노래로 많은 이들에게 큰 감명을 남겼다. 깨끗한 가난과 깨끗한 사랑. 그것이 이현필 운동의 빛이었다. 이현필은 종교인에게는 청부(淸富)도 용납될 수 없다고 했다. 오직 청빈이었다. 배가 부르고 등이 따뜻하면 영성은 바로 죽는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맨발의 성자로 불린다.
이현필도 좋아했던, 류영모 '진달래야' 시
동광원(東光園)의 본원은 광주 방림동에 있었고, 곡성, 함평, 진도 완주, 벽제 능곡에 분원이 있었다. 벽제 웃골에 자리잡은 분원은 수녀들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어서 '수녀촌'이라고 불린다. 계명산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1971년 9월 류영모는 제자 박영호와 함께 그곳에 들렀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한나 할머니의 지도 아래 30여명의 수녀가 수행을 하고 있었다. 여성들이 스스로 돌산을 일궈 논과 밭을 만들었다. 여기에 농사를 직접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었다. 디딜방아도 만들어 직접 사용했다. 계명산의 산나물과 딸기, 도토리와 머루, 다래와 버섯도 채취해 먹거리로 삼았다.
류영모는 일제 때 '진달래야'라는 시를 지은 적이 있었다. 이현필은 이 시를 몹시 좋아하여 류영모에게 '진달래야' 강의를 자주 요청했다. 2~3년에 한번씩 다섯 차례나 초청해 들었다. 우선 시를 한번 들어보자.
진달내야 진달래야 어느 꽃이 진달레지
내 사랑의 진달네게 홀로 너만 진달내랴
진달내 나는 진달내 임의 짐은 내질래
진달래에 앉은 나비 봄 보기에 날 다지니
안질 나비 갈데 없슴 지는 꽃도 웃는고야
안진 꿈 늦게 깨니 어제 진 달내 돋아
진달래서 핀 꽃인데 안 질랴고 피울랴맙
피울덴 아니 울고 질데 바 웃음 한 가지니
님 땜에 한갓 진달 낼 봄 차질하이셔
류영모의 '진달래야'
진달래란 이름에서 여러 가지 함의를 포착해낸 흥미로운 시다. 우선 '진달래'는 꽃이 진다는 의미가 숨어있고. 참(眞)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달래'는 요구하는 의미도 있고, '래'는 '내'와 '네'로넘나들면서 나와 너, 그리고 '누군가의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까지 포함한다. '진달'은 떴다가 사라진 달을 기리키고, '달내'는 달의 냄새를 가리킨다. 처음엔 꽃이 '진다'로 풀어냈던 것이 나중엔 짐을 '진다'의 뉘앙스로 확대되어, 언어들이 파문을 일으키듯 다양한 변주로, 종교적인 함의를 품게 되는 희한한 시다.
뜻을 풀어보면 대체로 이렇다.
진 달이 비치는 개울(내)아, 진달래야
어느 꽃이 져버린 달이지
내 사랑이 네게서 진다고 해도
너만 사랑이 진다고 하랴 나도 지는 것을
내가 (세상을) 질래 내가 지는 사람이네
하느님의 짐은 내가 질래
진달래에 앉은 나비
봄날을 구경하다 날이 다 지니
꽃이 졌는데 아직 안 지는 나비 앉을 데 없어
지는 꽃도 안쓰러워 웃어주는구나
꽃은 져도 마음은 지지않고 앉아있는 꿈
늦게 깨어나보니 어제 졌던 달 냄새가 돋네
진다고 해서 피어난 꽃인데
굳이 지지 않겠다고 꽃 피우려고 애쓰지 마라
꽃 피울 땐 아니 울었지만
질 때가 되면 웃는 것과 마찬가지니
하느님 때문에 한갓되이 져도
다음 해 봄을 다시 차지할테니
수녀들은 이 시를 읊어주는 류영모를 '진달래 할아버지'라 불렀다. 꽃은 피어서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이 꽃은 어찌 이름부터 지는 것을 떠올리게 하는가. 이 세상에 와서 가장 잘사는 것은 가장 잘 죽는 것이라고 말했던 류영모가 바로 '진달래'가 아닌가. 수녀들이 인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잘 피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잘 지는 일'을 해내려는 뜻 때문이다.
류영모의 강의를 들은 수녀들은 이 시를 그 자리에서 그대로 외웠다. 동행한 제자 박영호에게 한 수녀가 말했다. "선생님은 여기서도 저녁 한끼만 잡수셨어요. 음식을 드리면 뱃속에 들어가면 섞이게 마련이라며 비벼서 잡수셨죠."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