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이 끝나면 말숨으로 산다
류영모의 모든 가르침은 '말씀'에서 시작해서 '말씀'에서 끝난다. 그의 '말씀론(論)'은 가필이나 부연이나 풀이가 필요하지 않다. 그중 꼭 거듭 읽고 마음에 인(印, 도장)을 치듯 받아써야 할 말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한얼님은 고요히 사람의 귀를 여시고 마음에 인(印) 치듯 교훈하신다.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한얼님의 말씀을 막을 길은 없다. 잠잘 때나 꿈꿀 때나 말씀하신다. 한얼님의 소리를 들어라. 그것은 사람을 멸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기 위해서다. 한얼님 말씀은 공상이 아니라 구체적인 진실이다. 하늘에서 비가 와도 그릇에 따라 받는 물이 다르듯이, 사람의 마음 그릇에 따라 한얼님 소리를 듣는 내용이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주에 가득 찬 한얼님 말씀은 하나이다. 한얼님 말씀에 공손히 좇아야 한다."
생각이 납니까
1955년 제자 박영호는 YMCA에서 처음 류영모를 만났다. 구기동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대뜸 물었다.
"생각이 납니까."’
박영호는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무슨 말인지 파악하고 대답을 했다.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류영모는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가족이 어떻게 되는지, 재산이 얼마인지 이런 건 절대 물어보는 법이 없었다. 대신 '생각'이 나는지를 물었다. 생각은 하느님하고 영통(靈通)하는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영감)이다. 하느님이 인간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을 통해 위에서부터 '말씀'이 온다고 했다. 그것이 바로 생각이다. 하느님에게로 향하는 생각의 불꽃이 튀는 사람. 그게 '참'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다.
함석헌 '진리에의 향수', 류영모의 참
함석헌은 사상계에 '진리에의 향수'라는 글을 실었다. 함석헌이 말하는 진리는, 생명체가 추구해야할 진리다. 이것을 이기상 교수는 '생명학적 진리'라고 표현했다. 진리 앞에 '생명학적'이란 말을 붙인 까닭은, 그것이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인식론적 진리와 다르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생명학적 진리는 무엇인가. 생명(生命)이라는 말을 들여다보면, '살라는 명령'이라는 의미가 숨어있다. 즉, 삶은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명령이다. 생명은 그냥 살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찾아서 살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늘의 뜻을 찾을 의무와 책임을 수행하는 것이 삶이다. 그 하늘의 뜻이 '진리'이며 '참'이다. 함석헌은, 이 글 속에 류영모의 시 '참'을 인용했다. 이 시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참 찾아 예는 길에
한 참 두 참 쉬잘 참가
참 참이 참아 깨새
하늘 끝 참 밝힐 거니
참 든 맘
참 빈 한 아 참
사뭇 찬 참 찾으리
다석 류영모의 '참'
우리말로 '참'은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진리의 참, 짧은 시간(때)인 참, 차례를 의미하는 참, '참다'의 어근인 참, '진실로'라는 의미의 강조어, 가득 차 있음의 참, 갑자기 깨닫는 말인 '참'. 우리말의 다양하고 다채로운 결을 읽어내는 빼어난 예인(藝人)인 류영모는, '참'이라는 시에서 함석헌이 말한 생명의 진리를 풍성한 뉘앙스로 돋을새기고 있다. 한번 풀어보자.
진리를 찾아 가는 길에
한참 오래 길게, 한 차례 두 차례 쉬자고 할 태세인가
그때 그때 참아서 깨어있을 사이
하늘 끝에 있는 가득 찬 진리를 밝힐 것이니
진리가 들어온 마음
진실로 비어있는 하나, 아 참!(깨닫는 소리)
사뭇 가득 들어차 있는 진리를 찾으리
류영모 시어로 시의 뜻을 풀어내자면, '참찾찬참든참참'이 될 것이다. '참을 찾다 가득차게 참이 들어온 참 만난 참(때)'이라는 의미다. 또 류영모의 시구 첫말을 이어 읽으면 '참한참하참참사'가 된다. '어여쁜 참이여, 참으로 참일세'라는 뜻으로 풀린다.
저런 간절하고 집요하고 꾸준한 참 찾기를 류영모는 진리파지(眞理把持)라고 불렀다. 생을 받아 태어난 존재가 받은 필생의 명령. 그 생명 속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 참은 곧 성령이다. 그것을 찾아가는 일을 함석헌은 진리에의 향수(鄕愁)라고 일컬었다. 진리의 출처를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참으로의 귀향을 가르치는 류영모만 한 목자(牧者)가 있었던가.
진리나 참은 바로 말씀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평생 말씀으로 숨쉬고, 목숨 뒤의 삶은 말숨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했던 이가 류영모였다.
"말숨은 숨의 마지막이요 죽음 뒤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말숨 쉼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을 생각하는 것은 영원을 생각하는 것이요, 말숨이 곧 한얼님이기도 하다. 말숨을 쉬는 것이 한얼님을 믿는 것이요, 한얼님으로 사는 것이다. 말숨은 우리 맘속에서 타는 참의 불이다. 맘속에서 장작처럼 쓰이는 것이 말숨이다. 맘속에서 태워지는 장작, 그것이 말숨이다. 참이란 맘속에서 쓰이는 것이다."
자유로운 남자가 되시오, 예수처럼
大我無我一唯一(대아무아일유일)
眞神不神恒是恒(진신불신항시항)
恒一唯是絶對定(항일유시절대정)
不忮無求自由郎(불기무구자유랑)
다석 한시 '人子' (1957.8.23)
한나는 내가 없기에 하나이다 오직 하나다
참신은 신이 아니기에 한결같다 이토록 한결같다
늘 하나이며 오로지 이러한 것은 절대적으로 고요하다
질투 없고 구함 없이 자기의 근원을 향한 사람이다
'사람으로 난 신의 아들, 예수'
이 시에서 핵심은 '무아(無我)'와 '불신(不神)'이 아닐까 한다. 인자(人子) 예수를 통해, 인간은 무엇을 얻었던가. 사람이 신의 아들이니 사람과 신이 같은 세계에서 서로 통하는 것 같지는 않았던가. 신은 무엇이며 어디에 있는가.
무아론(無我論) : 인간이 있음이면 신은 없음이다. 신이 있음이려면 내가 없음이어야 한다. 있음이 있음을 만날 수 없고 없음이 없음을 만날 수도 없다. 이 지상의 아들인 인간의 있음과 신의 없음은 하나이며, 우주에서의 신의 있음과 인간의 없음은 같은 것이다. 그것이 대아무아(大我無我)이다.
불신론(不神論) : 인간이 상대세계에서 그려놓은 신은 참신이 아니다. 인간이 그려놓는 순간 신은 그것을 벗어나 있다. 인간이 신을 규정하고 그리고 구할 때 그 속에 있는 것은 신이 아니다. 인간의 종교와 신앙들이 신을 놓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신은 늘 그대로 있으며 인간은 늘 신이 아닌 것을 그린다. 이 지상의 아들은 신에게서 온 아들임에 분명하나, '신이 아닌 것으로 있는' 신을 찾지 못한다. 이것이 진신불신(眞神不神)이다.
절대정(絶對定) : 이 역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없음에 있는 신과, 아님에 있는 신. 아들은 어떻게 아버지를 찾아나설 것인가. 류영모는 '항일유시(恒一唯是)를 말했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으로 늘 하나로 있다. 그리고 참과 아님으로 오로지 이러한 것이다. 있음과 참으로 찾으려는 인간 아들에겐 이게 불가능하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 절대의 고요 속에 신은 계신다.
자유랑(自由郎) : 류영모는 아들 인간이 해야할 일을 말했다. 불기무구(不忮無求)다. 불기는 남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이며, 무구는 하늘에게서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남을 부러워 하는 것은 '나(我)'가 있는 것이다. '나'가 있으면 신과 하나가 될 수 없다. 하늘에 구하는 것은 '삿된 신(神)'이 있는 것이다. 삿된 신이 있으면 신과 한결같음에 이를 수 없다. 남을 부러워함과 하늘에 무엇을 구하는 것을 벗어나기 위해선, 이미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신(神)에서 말미암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걸 자유랑(自由郎)이라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유랑이 있다. 예수다. 그래서 인자(人子)다.
성경 바깥에도 하느님 말씀이 있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만이 말씀(로고스)으로 된 게 아니다. 개똥조차도 말씀으로 되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한얼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한얼님이었다. 그는 태초에 한얼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복음 1:1~3) 예수교인의 생리는 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예수만 말씀으로 되었고 우리는 딴 데서 왔다고 생각한다. 이게 겸양인지 뭔지 모르겠다. 말씀 밖에 믿을 게 없다. 믿을 건 우리 몸인데 이건 언제 죽을는지 모른다. 나는 말씀 밖에는 아무것도 안 믿는다. 기독교만 말씀이 아니다. 불교도 말씀이다. 설법이라 하는데, 법(法, 다르마)이란 진리란 말이다. 말씀을 하는 한얼님을 누가 봤는가. 한얼님께서 이 마음속에 출장을 보낸 정신을 통해서 위에서부터 말씀이 온다."
1959년 류영모는 '노자'를 우리말로 완역했다. 9년 뒤인 1968년엔 '중용'을 우리말로 풀었다. '장자'와 '논어', '맹자'와 '주역', '서경'의 번역에도 팔을 걷었다.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장횡거의 '서명'도 풀어냈다. 성서 요한복음의 '결별기도'를 새롭게 번역해내기도 했다.
그는 왜 평생에 걸쳐 다양한 동서양의 경전들을 번역하고 풀어냈을까. 이것은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훈민정음을 만들어낸 세종의 뜻과 정확히 일치했다. 옛 경전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말로 되어있지 않아, 많은 이들이 이를 읽어낼 수 없었다. 생명체라면 반드시 알아야할 참(하느님의 뜻)을 더 많이 알리고 더 많이 깨닫게 하기 위해 류영모는 '우리말 경전 풀이'에 온힘을 쏟았다. 그에게 이 일이야 말로, 세상을 향한 참 전도(傳道)였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어야 하기에 우리말로 반드시 옮겨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이런 생각에는, '진리' 혹은 '하느님의 뜻'이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의 중요한 경전에도 들어있음이 전제되어 있다. 류영모는 어느 종교이든 구경(究竟, 지극한 깨달음의 경계)에 가서는 진리의 하느님을 나의 참생명으로 받들고 따르는 것으로 같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밝혔다.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를 서로 비춰보아야 서로서로가 뭔가 좀 알 수 있게 됩니다. 나는 적어도 구약과 신약은 성경으로서 오래 가도 버릴 수 없는 정신이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신약성경을 위조해서 말하는데 신약 말씀도 구약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다른 종교의 경전도 다 구약성경과 같이 보아야 한다는 것은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실상 성경만 먹고 사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유교의 경전도 불경도 먹습니다.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맷감량(소화력)으로 소화 안되는 것이 아니고 내 (정신)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그의 말은 헤르만 헤세의 이 말과 닮아 있다. "나는 종교를 두 가지 형태로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경건하고도 정직한 신교도의 자손으로서, 다른 하나는 인도인들의 계시의 독자로서입니다. 인도의 계시 가운데서도 나는 우파니샤드와 바가바드기타, 그리고 부처의 설법을 가장 위대하다고 여깁니다. 인도의 정신세계보다 더 늦게 나는 중국의 정신세계를 알게 되었으며 또 새로운 발전이 펼쳐졌습니다. 나는 공자와 소크라테스가 형제처럼 보이게 하는, 덕에 대한 개념에 열중했고, 신비적인 힘을 지닌 노자의 은밀한 지혜에 아주 빠져들었습니다. 나의 종교생활에서 기독교가 유일한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지배적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나는 결코 종교 없이는 살지 않았고,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일생 동안 교회 없이 살아왔습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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