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적이네요. 이 조명, 온도, 습도···."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많이는 아니고 적당하게. 그래도 머리카락이며 운동화 끄트머리가 축축해질 정도는 됐다. 그 말은 곧 몸이며 마음 상태가 엉망이라는 소리다.
영화 '검객'(감독 최재훈) 시사회를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비가 그친 뒤에 더 추워질 것"이라고 하는 걸 들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다. 비가 그치고 나면 여름은 흔적도 없겠구나. '가을옷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코로나19 이후 시사회를 가면 '할 일'이 많다. 체온을 재고, 설문지를 체크한 뒤 표를 받고 QR코드 전자출입부도 작성해야 한다.
날씨 때문인지 긴 과정 때문인지 좌석에 앉자마자 피곤이 밀려왔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만나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몇 명에게 인사만 했는데도 기력이 쇠했다. 이런 기분으로 '사극 영화'를 보다니. 막막한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나의 '일'이라 최대한 객관적이고 프로페셔널하게 해내고 싶지만 몸과 마음이 일체하는 날은 많지 않다. 기적의 주문인 '나는 유노윤호다'를 백 번 외쳐도 열정이 샘 솟지 않을 때가 있고, 몸 상태가 좋아도 마음은 '중학교 2학년'일 때가 있지 않나.
하지만 이날은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일체 했다. 체력은 바닥나고, 작품에 대한 관심도도 딱 그만큼이었던 것이다! 이런 날도 드물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자마자 러닝타임부터 확인했다. '아, 그나마 다행이다.' 상영 시간은 100분이었다.
사극 영화는 '모' 아니면 '도'일 확률이 높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터라 웬만한 '대작'이 아니고서야 만족스러운 비주얼이나 만듦새를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사극 영화에 관한 기대도 낮은데 배우 장혁이 조선 최고의 검객을 연기한다니. 흥미롭지 않았다. 그가 연기한 드라마 '추노' 대길을 뛰어넘을 거란 기대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몇 초 만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화의 오프닝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수묵화로 그려진 혼란한 조선과 피 흘리는 백성, 그리고 조선 최고 검객의 모습이 순식간에 필자를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꽤 웅장하고 근사했다.
광해군 폐위 후 조선은 청과 명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청나라 황족 '구루타이'(조 타슬림 분)는 무리한 요구를 일삼으며 조선을 압박한다. 조선의 여인들은 공녀로 끌려가고 남자들은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 백성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고 흉흉해졌다.
광해군의 곁을 지키다 시력을 잃은 조선 최고의 검객 '태율'(장혁 분). 그는 정체를 숨긴 채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왔다. 딸 '태옥'(김현수 분)은 아버지의 눈을 낫게 해줄 수 있다는 말에 객주 '화선'(이나경 분) 따랐다가 '구루타이' 수하들에게 납치된다. 태율은 딸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검을 든다.
영화 중반쯤 몰래 휴대폰을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전이 없었다. 보통 러닝타임 100분짜리 영화라면 주인공이 진작에 각성하고 악당들을 하나씩 무찔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주인공 태율은 아직 갈등 중이었다.
영화는 청나라 황족 '구루타이'와 수하들을 묘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그들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잔혹한 인물인지 몇 가지 사건을 보여주며 관객들을 예열한다. 문제는 그 '예열'이 너무 더디다는 점이었다. 핍박받는 조선의 풍경을 보여주려는 의도는 알겠으나 이들의 악행이 반복되니 처음 느꼈던 압박감이나 공포심도 전보다 못했다.
반면 주인공 태율의 서사는 거의 '시' 수준이었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함축하며 은유하고 있어서 관객이 여러 정보를 수집해 그의 삶을 그려내야 했다. 워낙 말 수 없는 캐릭터인 데다가 상황도 따르지 않으니. 그의 속내를 알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의 호위무사 민승호(정만식 분)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캐릭터다.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태율이 딸을 구하기 위해 등장했다. 러닝타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등장하자마자 홀로 100명의 군인을 상대한 태율은 검 한 자루로 총을 든 군인들을 제압해버린다.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태율이 각성한 뒤엔 숨 쉴 틈 없이 액션이 몰아닥친다. 태율을 필두로 타격감 넘치는 액션을 펼쳐 흥미롭다. 캐릭터의 개성을 살린 의상이나 검술 스타일은 멋스럽고 매력적이다.
주인공 장혁부터 정만식, 최진호 특별출연한 장현성까지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 깊다. 안정적이고 묵직한 연기 덕에 영화의 무게감이 살았다. 개개인이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지만 '연기 호흡'까지 인상 깊은 건 아니다.
구루타이 역을 맡은 배우 조 타슬림이 눈에 띈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 '스타트렉 비욘드'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활약한 배우다. 인도네시아 국가대표팀 유도 선수 출신으로 단단한 내공의 무술 실력을 자랑한다.
기대한 것보다 만듦새가 매끈하다. 비주얼적인 면이나 액션 등이 오래 잔상처럼 남았다. 하지만 그 매력만큼이나 단점도 명확하다. 오는 23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00분, 관람 등급은 15세 이상이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로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최씨네 리뷰>는 필자가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까지 녹여낸 영화 리뷰 코너다. 관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두고 편안하게 접근하고자 한다.
영화 '검객'(감독 최재훈) 시사회를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라디오에서 "비가 그친 뒤에 더 추워질 것"이라고 하는 걸 들었다. 가을을 재촉하는 비였다. 비가 그치고 나면 여름은 흔적도 없겠구나. '가을옷을 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코로나19 이후 시사회를 가면 '할 일'이 많다. 체온을 재고, 설문지를 체크한 뒤 표를 받고 QR코드 전자출입부도 작성해야 한다.
날씨 때문인지 긴 과정 때문인지 좌석에 앉자마자 피곤이 밀려왔다. 오랜만에 많은 사람을 만나서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몇 명에게 인사만 했는데도 기력이 쇠했다. 이런 기분으로 '사극 영화'를 보다니. 막막한 기분이었다.
영화를 보는 것도 나의 '일'이라 최대한 객관적이고 프로페셔널하게 해내고 싶지만 몸과 마음이 일체하는 날은 많지 않다. 기적의 주문인 '나는 유노윤호다'를 백 번 외쳐도 열정이 샘 솟지 않을 때가 있고, 몸 상태가 좋아도 마음은 '중학교 2학년'일 때가 있지 않나.
하지만 이날은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일체 했다. 체력은 바닥나고, 작품에 대한 관심도도 딱 그만큼이었던 것이다! 이런 날도 드물었다.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앉자마자 러닝타임부터 확인했다. '아, 그나마 다행이다.' 상영 시간은 100분이었다.
사극 영화는 '모' 아니면 '도'일 확률이 높다. 제작비가 많이 드는 터라 웬만한 '대작'이 아니고서야 만족스러운 비주얼이나 만듦새를 보여주기가 힘들었다. 사극 영화에 관한 기대도 낮은데 배우 장혁이 조선 최고의 검객을 연기한다니. 흥미롭지 않았다. 그가 연기한 드라마 '추노' 대길을 뛰어넘을 거란 기대가 없어서였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하고 몇 초 만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영화의 오프닝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 수묵화로 그려진 혼란한 조선과 피 흘리는 백성, 그리고 조선 최고 검객의 모습이 순식간에 필자를 몰입하도록 만들었다. 꽤 웅장하고 근사했다.
광해군 폐위 후 조선은 청과 명의 대립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청나라 황족 '구루타이'(조 타슬림 분)는 무리한 요구를 일삼으며 조선을 압박한다. 조선의 여인들은 공녀로 끌려가고 남자들은 무참히 죽임을 당한다. 백성의 삶은 더욱 궁핍해지고 흉흉해졌다.
광해군의 곁을 지키다 시력을 잃은 조선 최고의 검객 '태율'(장혁 분). 그는 정체를 숨긴 채 어린 딸을 키우며 살아왔다. 딸 '태옥'(김현수 분)은 아버지의 눈을 낫게 해줄 수 있다는 말에 객주 '화선'(이나경 분) 따랐다가 '구루타이' 수하들에게 납치된다. 태율은 딸을 구하기 위해 다시 검을 든다.
영화 중반쯤 몰래 휴대폰을 보았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진전이 없었다. 보통 러닝타임 100분짜리 영화라면 주인공이 진작에 각성하고 악당들을 하나씩 무찔러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 주인공 태율은 아직 갈등 중이었다.
반면 주인공 태율의 서사는 거의 '시' 수준이었다.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함축하며 은유하고 있어서 관객이 여러 정보를 수집해 그의 삶을 그려내야 했다. 워낙 말 수 없는 캐릭터인 데다가 상황도 따르지 않으니. 그의 속내를 알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금의 호위무사 민승호(정만식 분)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보면서 제일 궁금했던 캐릭터다.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집중력이 떨어질 때쯤 태율이 딸을 구하기 위해 등장했다. 러닝타임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등장하자마자 홀로 100명의 군인을 상대한 태율은 검 한 자루로 총을 든 군인들을 제압해버린다. 마음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태율이 각성한 뒤엔 숨 쉴 틈 없이 액션이 몰아닥친다. 태율을 필두로 타격감 넘치는 액션을 펼쳐 흥미롭다. 캐릭터의 개성을 살린 의상이나 검술 스타일은 멋스럽고 매력적이다.
주인공 장혁부터 정만식, 최진호 특별출연한 장현성까지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가 인상 깊다. 안정적이고 묵직한 연기 덕에 영화의 무게감이 살았다. 개개인이 안정적인 연기를 펼쳤지만 '연기 호흡'까지 인상 깊은 건 아니다.
구루타이 역을 맡은 배우 조 타슬림이 눈에 띈다. '분노의 질주: 더 맥시멈' '스타트렉 비욘드'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활약한 배우다. 인도네시아 국가대표팀 유도 선수 출신으로 단단한 내공의 무술 실력을 자랑한다.
기대한 것보다 만듦새가 매끈하다. 비주얼적인 면이나 액션 등이 오래 잔상처럼 남았다. 하지만 그 매력만큼이나 단점도 명확하다. 오는 23일 개봉한다. 러닝타임은 100분, 관람 등급은 15세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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