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접종하는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된 것으로 확인되면서 국가독감예방접종 사업이 일시 중단됐다. 사상 초유의 사태다. 해당 백신이 대규모 폐기될 경우 겨울이 오기 전에 제대로 접종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제약사들의 독감백신 생산은 이미 종료됐고 현실적으로 재생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백신 공급 일정 자체가 어그러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질병관리청은 23일 기자들의 질의응답에 “운송 트럭의 온도 유지 문제가 아니라 트럭 내에서 보관 장소로 옮기는 과정 중 냉장보관 온도 유지가 안 된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독감백신은 운송시 2∼8도(℃) 사이에서 냉장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데, 냉장차량으로 이송 후 각 지역에서 배분되는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것이다. 해당 지역이 어딘지는 밝히지 않았다.
앞서 질병청은 지난 21일 오후 독감백신 조달계약(신성약품) 업체의 유통 과정에서 백신의 냉장온도 유지 등의 부적절한 사례가 신고돼 품질 검증을 위해 전체 대상자에 대한 예방접종을 일시 중단한다고 전했다.
문제가 제기된 백신은 이달 22일부터 예방접종을 위해 준비한 13~18살 대상 물량이다. 국가 조달계약을 한 1259만 도즈(1도즈는 1회 접종량) 가운데 의료기관에 공급된 약 500만 도즈인데, 이 백신 물량은 아직 접종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달 8일부터 시작된 2회 접종 어린이 대상자에게 공급된 백신은 별도 공급체계로 공급돼 대상 물량이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다만 아직 500만 명분의 백신 중 어느 정도가 상온에 노출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질병청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2주 안에 폐기 물량 등을 파악해 발표할 계획이다.
만일 백신 품질에 문제가 발견된다면 대량으로 폐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백신을 추가로 확보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질병청은 이전부터 독감백신을 추가로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강조해 왔다.
정은경 청장은 지난 1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례브리핑에서 “유정란, 세포 배양 시설에 대한 준비, 또 제조·검증에 시간이 걸려 지금 생산해도 내년 2~3월에 공급이 되고, 수입의 경우 대부분 5~6개월 전에 계약하기 때문에 추가 물량 확보는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의료업계에선 이번이 처음이 아닐 것으로 추정했다. 질병청에 따르면 이번 문제가 알려진 것은 조달업체가 아닌 외부의 제보로 인해서였다. 제보가 없었던 앞선 여러 해 동안 백신이 이송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되는 일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김우주 고대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옛날부터 의심이 있었다. 홍역이 유행할 때 백신을 맞췄는데도 집단면역 안 생겼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콜드체인(저온 유통체계)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사태도) 식약처에서 백신을 검수하기 때문에 생산의 문제는 아니다. 결국 제조공장에서 병·의원까지 납품하는 과정, 즉 콜드체인을 유지하는 데 문제가 생긴 것”이라며 “블랙박스처럼 병원에 백신이 도착하면 콜드체인 유지 기록을 볼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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