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몸을 만져보라. 살이 있고 뼈가 있고 체온이 있고 굴곡이 있다. 손과 발이 움직이고 살과 주름이 형상과 동작을 이룬다. 돌아보면, 태어나 시간이 지나면서 꾸준히 몸의 형상과 상태가 바뀌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몸'이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몸이야 말로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이도 많을 것이다.
몸은 무엇인가
과학적으로 인간의 몸을 분석해 구성요소를 보면 이렇다. 물이 2말 정도이고 지방질은 세숫비누 7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연(鉛)은 9자루 연필의 심을 만들 수 있고, 석회질은 방 한 칸을 바를 수 있다. 인(燐)은 성냥 2200개비를 만들 수 있고 유황은 방 한 칸에 쓸 만한 DDT 살충제가 나온다. 철은 쇠못 한 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이 몸이다. 여기에 나는 어디 있는가.
서구 사상은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불교만큼 '인간 육신'에 대해 부정적인 사상과 신념은 없을 것이다. 몸을 부정하다 못해 경멸하고 증오하는 느낌까지 받기도 한다. 석가는 왜 이토록, 육신을 백안시했는가. 그 스스로도 '육신'이 있었기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바탕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몸은 왜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을까.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비교해볼 때, '종교'가 지니고 있는 핵심 개념이 빠져있다. 즉, '신'이 없다. 부처는 인간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존재이며, '신'에 해당되는 많은 요소를 지니긴 했다. 하지만 부처는 다른 종교의 신이 말하는 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 "나를 믿으면 영혼의 구원을 받는다." 그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가 했던 것처럼, 자신의 육신을 벗고 해탈에 이르면 나와 같은 경지에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했던 수행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자신이 이르렀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류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석가의 사상을 알면 알수록 하느님을 부인하는 사상이 아닌 것이 분명하지만, 하느님에 대한 언급이 불분명하다. 뭔가 아쉽다. 나는 불교를 사고무친(四顧無親, 사방을 둘러보아도 그 아버지(신, 神)가 없다)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처 이후의 수많은 절과 수많은 승려들은 무엇인가. 몰려든 신도들은 또한 무엇인가. 원래, '한 사람의 깨달음'으로 이뤄진 '내밀한 자율신앙'이었을 뿐인 부처의 가르침이 후인(後人)들의 필요와 갈증에 따라 '종교화'한 자취가 아닐까 한다. 석가가 이런 종교화를 원했든 안했든, 지금의 불교는 인간의 형이상학이 움직인 유의미한 하나의 길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다만, 부처가 수행을 통해 얻어낸 것의 본질인 두 가지 측면을 환기하는 것은, 불교가 지닌 다른 면모를 살피는 것보다 더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허공 신관(神觀)'이며, 다른 하나는 육신이라는 상대주의 세계의 핵심을 해체하고자 하는 강렬한 도전이다. 류영모는, 석가의 길과 가르침이 말하고 있는 이 두 가지 메시지를 제대로 받아내어 기독교 신앙의 '일정한 세속화'를 정화(淨化)하는 시도를 한 매우 드문 존재였다.
허공 신관(神觀)
허공의 신학은, '신의 존재 심문'이나 '신의 존재 회의(懷疑)'를 일소하는 다석 신학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류영모는 허공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허공의 공상(空相)은 장엄합니다. 이 우주는 허공을 나타낸 것입니다. 만물이 전부 동원되어서 겨우 허공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꽃을 볼 때 보통 꽃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테두리 겉인 허공에는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입니다. 요새 와서는 허공이야 말로 가장 다정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허공을 모르고 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입니다. 허공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에서 '빈탕한데'와 '없이 계시는 신'이 등장한다. '있다'와 '없다'가 다름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우리가 상대세계에 살기 때문이다. 절대세계에서 보면, 있는 것은 없는 것이며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이 관점을 드러내는 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다. 있는 것은 없어진다. 없는 것은 생겨난다. 우리는 한순간의 한 대상을 보면서 있다 없다를 판별하지만, 그 시선을 벗어나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지 않다.
상대세계에서는 '있음'이 중요해보이지만 그건 착시일 뿐이다. 류영모의 말처럼, 허공이 없으면 꽃의 형상도 없는 것이다. 꽃의 형상 또한 허공에서 나왔으며 허공으로 곧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절대세계의 '허공'이 없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다. '없이 계신다'는 말이 모순적으로 들리는 까닭도 상대세계의 관점에서 이 문장을 읽기 때문이다. 없음이 있음을 좌우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관(神觀)을 탁 트이게 한다.
<벽암록>에서 설봉(雪峯, 822~903)은 이렇게 읊었다.
盡大地撮來 如粟米粒大(진대지촬래 여속미립대)
拋向靣前 漆桶不會(포향면전 칠통불회)
打鼓普請看(타고보청간)
"온 대지를 손으로 움켜쥐면 크기가 겨우 좁쌀만 하구나
눈 앞에 그걸 던져줬더니 새까만 통에 든 것처럼 보지를 못하는구나
북이나 쳐서 모두들 보라고 하라"
('대반열반경' 교진여품)
절대지(絶對智)에선 상대세계가 이럴 뿐이다. 우주조차도 좁쌀 한 알이다. 온갖 모양들이 사라진 곳을 진실한 모양이라고 일컫는 게 불교다.
천수관세음보살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손과 눈을 어디 다 쓰는 겁니까." 이렇게 묻자 한 선사가 답을 한다. "한밤 중에 자다가 베개를 놓쳤을 때 더듬어 찾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온몸에 손과 눈이 있다는 거지요?" 이렇게 되묻자 선사는 말한다. "아니, 온몸이 손과 눈이요." 우린 손과 눈을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저 선사는 '기능'으로 이해한다. 우린 신을 형상으로 이해하지만, 절대세계는 오직 '신능(神能)'으로 존재한다.
反(반)육신주의
육신에 대한 철저한 태도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혼동하여 자체 모순에 빠지는 혼동(混同)을 극복하는 이론적 명쾌함을 만들어낸다. 신은 절대세계에 존재하며, 육신은 신과 상관이 없다. 물론, 상대세계를 창조한 신이지만, 생태계를 신의 권능으로 간섭하여 육신의 조건이나 규칙을 바꾸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흔들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불교와 다석사상은 서로 공명(共鳴)하며 신학의 경지를 고차(高次)로 들어올린다.
다시 살펴보자. 내 몸이란 무엇인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혈기(血氣)가 만나서 생명체를 이뤘다. 급속한 세포분열로 자라서 열달 만에 모체(母體) 속에서 3㎏쯤 되는 무게의 살덩이가 나온다. 그게 '나'였다. 부모는 자식을 얻었다고 기뻐한다. 나는 무엇인가. 몸뚱이였다. 몸뚱이의 삶이 시작됐다. 몸과 내가 오로지 같은 것으로 인식되는 몸나였다.
싯다르타 태자는 카비라 성문 밖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허리 굽은 노인과 고통받는 병자와 죽은 송장을 보았다. 태자는 처음엔 이들의 상황이 특별한 불행이며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득 그것이 '나'임을 알아차렸다. 태어난(生) 이상 노(老)와 병(病)과 사(死)는 불가피하구나. 생로병사를 겪는 건 대체 무엇인가. 나의 몸이었다.
석가는 병(病)을 고칠 수 있는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제자 박카리(발가리)가 중병에 걸렸다. 수행을 하지 못하고 외진 곳 옹기 굽는 곳에 누워 간병을 받고 있었다. 부처가 찾아가 병세에 대해 물었다. 좀 어떤가. 밥은 먹을 수 있는가. 불편이 많지 않은가. 견딜 수는 있겠는가. 고통은 좀 덜해 가는가. 박카리는 대답했다. "부처님, 고통은 심하고 입맛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병은 더 심해질 뿐입니다. " 부처 또한 속수무책이었다. 그의 병고를 덜어줄 수 없었다. 석가는, 사람의 생로병사를 고치거나 바꾸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몸은 생로병사로 만들어지고 없어지는 살덩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육신 외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믿으라
예수는 말했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가 너희 죄로 죽으리라' 하였다. 만일 너희가 내가 그인 줄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 죄로 죽으리라." (요한 8:23~24)
성경에서 예수는 분명히, 자신이 누구임을 밝혔다. '아래'는 지상(地上)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인간의 혈기가 만들어낸 '육체 생산 방식'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하늘 아래서 났다는 보편적인 말이 아니라, 인간의 다리 아래서 낳았다는 뜻이다. '너희의 몸'은 상대세계(이 세상)에 속하는 존재이며, 나(예수)는 절대세계에 속한다고 밝혔다. 내가 보여준 '그(절대세계의 신)'를 믿지 않으면, 너희는 '몸'의 한계에 갇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언명한 것이다.
류영모는 석가가 제기한 몸과 생로병사의 굴레, 그 굴레를 이탈하는 구도(求道)의 의미가, 예수의 '육신 부정(否定)과 같은 것임을 알아챘다. 문제는 '몸'이었다. 몸으로만 살려고 하는, 그리고 몸의 안녕에 생의 전부를 거는 인간들에게 몸과 함께 부여된 중요한 것을 일깨우는 석가와 예수의 같은 노력에 주목했다.
인간에게 몸과 함께 부여된 중요한 것, 예수의 참된 본질이기도 한 것. 그것은 '성령'이다. 그것은 인간에게 '디폴트'로 내장된 '신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는 이것을 얼(靈)의 나, 즉 얼나라고 했다. 신이 세상과 인간을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했지만, 신과 인간은 서로 전혀 접속할 수 없는 절대세계와 상대세계로 이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신을 만날 수 있는가. 노자는 자연 생태계에 작동하고 있는 '신의 숨결'을 벤치마킹하라고 했고, 공자는 신이 사물에 존재하는 방식인 중용(中庸)의 바른 뜻을 배우기 위해 성심성의의 예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석가는 지금 현세의 육신으로 이뤄진 '나'를 벗고, 영속하는 '나'의 본질을 찾으라고 했고, 예수는 인간의 육신의 형상을 지녔으나 그 진상은 오직 신의 뜻인 성령으로 이뤄진 스스로의 '기적'을 믿고 그 속에 들어있는 신의 의지를 따르라고 했다. 저마다 다른 듯하지만, 그 모든 것에는 '신의 뜻'이 인간에게 접속하여 신의 본질을 일깨우는 '얼나'가 숨어있다. 이렇게 생각을 가다듬은 류영모에게, 석가는 핵심적인 통찰을 주는 스승이었을 것이다.
왜 태어났는가, '죽음의 맛'을 보기 위해서다
인간은 죽음이 두려워 신(神)을 찾는다, 죽음 이후에 있을 '모를 일'에 관하여 무엇인가 보험(保險)이라도 드는 심정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석가는 가섭(카샤파)에게 이런 얘기를 해준다. 석가가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 구도할 때, 제석천이 나타났다. 그는 '제행무상 시생멸법(諸行無常 是生滅法)' 여덟 글자를 읊으며 지나갔다. "모든 행위가 영원한 게 없으니 이것이 태어나 죽는 법이로다." 이 게송을 들은 설산선인이 너무나 감동하여 혹시 나머지 법문이 있으면 더 듣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제석천은 지금 몹시 시장하니 그대 몸을 내게 먹이로 달라고 말한다. 설산선인은 '곧 죽을 육신을 아끼겠습니까. 법문을 주시면 몸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제석천은 나머지를 읊어준다. '생멸멸기 적멸위락(生滅滅己 寂滅爲樂)' "인간이 태어나 죽는 것은, 제 몸이 죽어보는 경험을 하기 위함이라. 죽어 고요해지니 그것이 즐거움이로다." 설산선인은 이 사구게(四句偈)를 받아 돌벽에 써놓고,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던졌다. 제석천은 설산선인을 공중에서 받아 땅 위에 앉혀놓으며 말했다. "참다운 보살입니다. 도를 성취할 때 저도 구제하여 주소서."
대승열반경에 나오는 이 스토리는, 석가가 깨달은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은 왜 태어났는가. 죽음의 맛을 보도록 하기 위해서다. 태어나야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죽음의 맛을 보는가. 바로, 애지중지하던 육신을 벗어나는 그 순간에 '신'과 합일하는 최고의 랑데부를 하기 위해서다. 류영모는 이런 점에 관해 강렬한 어록을 남겨놓았다.
"죽으면 어떻게 되나, 허공이 된다. 허공이 열반(니르바나, Nirvana)이다. 니르바나는 없이 계신다. 왜 죽기를 싫어하는가. 우리는 죽음 맛을 한번 보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죽음이란 참으로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은 죽음의 노예가 돼 있다."
그러면서 몸뚱이를 위해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 몸뚱이는 멸망한다. 멸해야 하는 것이니까 멸하는 것이다. 회개란 쉽게 말하면 몸뚱이가 내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몸은 죽더라도 얼은 죽지 않는다는 게 회개다. 나는 몸뚱이의 일은 부정한다. 모든 것을 몸뚱이를 위해 일하다가 죽어 그만두게 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일 거다. 나는 이를 부정한다."
1957년 9월 17일 류영모는 스스로 우리말로 옮긴 '반야바라밀다심경'으로 이렇게 강의를 했다. "누구든지 생명을 생각하는 이나 정신을 생각하는 이는 이 반야바라밀다심경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이쯤 갔다는 것은 고귀한 재산임에 틀림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불성(佛性, 불교에서 말하는 영성)을 꼭 잡는 것이 반야심경이 말하는 아눗다라삼먁삼보디(阿耨多羅三藐三菩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란 뜻으로 '최상의 바른 깨달음'이란 의미)입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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