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발길이 뜸한 평범한 길목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공기놀이와 고무줄 놀이, 숨바꼭질하며 시간을 보냈다.
코로나19 확산에 가까운 여행지로 떠나는 일조차 꺼려지니, 골목을 거닐며 뛰놀던 그때가 더없이 그립다.
우리 동네 구석구석을 걸으며 추억에 잠겨보는 이 시간, 그저 동네 골목길일 뿐인데 여행지에 온 것처럼 가슴 한편이 벅차오른다.
추석 연휴에는 호젓하게 우리 동네 골목길을 여행하는 것은 어떨까. 쉽게, 바로 지금 떠날 수 있는 골목길로 가자.
십정동은 예전에 우물이 10개가 있었다고 해서 십정동이라 불린다. 산맥이 열십자로 교차해 붙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국제도시 3곳이 자리한 '광역시 인천'의 풍모와는 거리가 멀다.
수도권 전철 1호선 백운역에 내려 열우물사거리로 향한다. 곧 경원대로 왼쪽에 세무고등학교가 나온다. 고개의 반대편 기슭이 영화를 촬영한 마을이다. 진입로는 조금 더 내려간 대로변에서 150m쯤 안쪽에 있다. 마을의 전경을 품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다 보면, 정면에 문구점을 겸하는 슈퍼가 등장한다. 한 상점에서 하나 이상의 품목을 겸하는 것이 동네 장사의 기본이던가. 동구가 먹고 자며 일하던 석이슈퍼처럼 마을 사람들과 아이들 서넛이 오간다.
슈퍼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슬슬 동네 안쪽으로 접어든다. 길은 도로에서 왼쪽 경사지로 가지를 뻗듯 연이어 열린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얼굴을 맞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금세라도 동구가 쌀부대를 들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콘크리트 계단에는 고운 그림이 그려져 있다. 몇 년 사이에 산동네는 약속이나 한 듯 벽화로 단장했다. 한때는 생경한 풍경이었으나, 이제는 눈에 퍽 익다.
길가의 좁은 계단을 지나 조금 더 걷는다. 높다란 고층 아파트가 나란하다. 대로변에서 끼쳐오는 개발의 속도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산동네와 대비를 이룬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다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른다. 벽을 장식한 낙서 같은 그림에 '낙서금지'가 제목처럼 적혀 있다.
화려한 화폭이 아니라 소소한 일상과 소박한 꿈을 담은 그림이다. 개발 논리에 밀린 시간을 몇몇 그림이 꼭 말아 쥐고 있다. 몇 걸음 못 디뎌 이번에는 옆으로 난 작은 골목에 눈길이 간다. 나팔꽃이 곱다. 지지대를 타고 옥상까지 기어오른다. 한두 송이씩 줄줄이 핀 꽃은 건물 정상에 다다라 가장 만발했다.
도심의 골목을 걷다가 머리 위로 알알이 맺힌 머루를 맞이할 줄 누가 알았으랴. 그 숨결마다 사람의 손길이 정성스럽다. 마을 곳곳에는 벽화 못지않게 길가의 꽃들도 정겹다. 텃밭을 대신한 알뜰한 푸성귀도 귀하지만 그 사이로 어김없이 꽃들이 반긴다. 가쁜 삶에 숨통이 트이는 여유다. 골목이 지닌 비밀스런 일상이다.
눈길 닿는 대로 발길이 좇아간다. 영화의 풍경도 자연스레 만난다. 영화에서 십정동은 단순한 배경 그 이상이며, 밑바탕을 이루는 정서다. 돌아갈 곳을 잃은 세 간첩이 정 붙이고 살아갈 만한 동네다. 실제 마을의 모습을 녹여 영화에 색을 입혔다. 그럼에도 수월하게 낯익은 풍경을 찾고 싶다면 열우물로 102번길을 걸어볼 것을 추천한다.
열우물로 102번길은 오르막이다. 모세의 기적처럼 바다를 가로듯 올라간다. 그 주변으로 층층의 집들이 모여 앉았다. 영화에서는 석이슈퍼 앞 도로로 나온다.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곳이요, 바보 동구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실감나게 넘어지는, 바보 잠행의 행동강령을 실천에 옮기며 아침을 열던 곳이다. 또 매일 아침 비질을 하며 사람들과 인사하고 행동을 파악하던 '요충지'다.
하지만 정작 영화의 중심을 이루던 석이슈퍼는 찾아볼 수 없다. 세트로 지은 건물로 촬영이 끝난 후에 허물었단다. 대신 그 자리에는 작은 텃밭이 들어섰다. 대신 석이슈퍼 곁의 스마일 그림이 반긴다. 이를 활짝 드러낸 채 웃는 모습이 동구를 닮았다. 길 건너편 판자 건물도 운명이 다르지 않다. 순임이 꼭꼭 눌러 담은 쓰레기봉투를 동구가 발로 찢어버렸던 곳이다.
영화의 흔적은 오히려 열우물로 102번길 언덕배기에 짙게 남았다. 낯익은 뒷모습, 동구를 연상시키는 벽화다. 더벅머리에 초록색 추리닝과 남색 슬리퍼가 누구 봐도 동구다. 영화 후반부에 누군가 동네 담벼락에 동구의 모습을 그렸다. 그를 그리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이었으리라.
동구 벽화 곁에 서자 마을이 내려다보인다.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고 삶이다. 동구는 그 지붕들을 뛰어다니며 세웅의 형 치웅을 찾아 나서고, 유란과 두석을 그들 모르게 위기에서 구하고, 술 취한 란을 위로하며 마을의 일원이 돼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것이다. 변할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정들까 두려웠을 것이다.
언덕배기 사거리 한쪽 벽면에는 마을과 벽화의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가 붙었다. 어느 동네든 골목은 미로 같다. 참고해서 돌아보면 좋겠다. 지나온 길의 가을풍경 벽화는 예전에 석이슈퍼가 있던 자리 옆이다. 동구의 뒷모습 벽화를 끼고 걷는 길은 선형 벽화와 바람개비 계단으로 이어진다.
사이사이 전봇대나 벽에도 크고 작은 벽화가 그려졌다. 그 오르막길 가장 높은 자리에 바람개비 계단이 있다. 영화에서 석이슈퍼만큼이나 중요한 장소였다. 리해량과 란(이채영 분)이 세 들어 살던 고 영감(장광 분)네 집이다. 순임이 닭백숙을 만들어 마을 잔치가 열렸던 집이다. 굳건하던 동구의 마음에 그때부터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십정동 열우물길은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동네는 아니다. 어느 날 우연히 생각나 걸음을 내면 영화와 겹치는 마음 따스함만이 가득할 뿐이다. 사람 사는 동네에 대한 예의만 지킨다면 간간이 말을 건네는 주민들도 정감을 더한다. 그것은 은밀하게 숨어들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위대한 삶의 정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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