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의 문제, 혁신
“의사로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병원을 경영하면서 ‘앞으로 의료가 어떻게 변화할까’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미래는 의료 공급자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소비자는 무엇을 원할지 또, 이런 의문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였다. 저는 이런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창업을 선택했다.”
의료계 집단휴진이 한창이던 지난달 초 서울 강서구 소재 ‘서울부민병원’에서 만난 정훈재 비플러스랩 대표는 인터뷰 내내 차분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의료의 변화’를 말했다. 좋든, 싫든 비대면 의료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병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미래에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확신이 그에겐 보였다.
정 대표는 지난 2014년 30대 중반의 나이로 서울부민병원 제3대 병원장에 취임했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의료업계는 보수적인 문화로 유명하지만, 젊은 병원장은 미래 경쟁력을 위해 혁신과 유연한 사고를 선택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병원의 생존을 고민하다 유연한 스타트업에 눈을 돌렸고, 그 결과물로 지금의 ‘비플러스랩’이 탄생했다.
정 대표는 “부친이 병원을 설립하고, 잘 키워주셨다. 저도 좋은 기회를 얻어 이른 나이에 큰 병원을 맡다 보니, 2세로서 어떻게 병원을 발전시키고 한국 의료 발전에 기여할지 고민이 많았다. 대한민국 빅5 병원 중에서도 흑자를 내는 곳은 몇 안 된다. 앞으로는 더 힘들 거다. 병원은 전문의와 의료 지식이 존재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밸류가 생기지만, 비대면 의료가 확산하면 병원 자체 밸류가 줄어들 거다”며 “스타트업 창업은 미래 의료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비플러스랩은 일종의 위기감에서 시작했다. 병원 경영과 창업이 전혀 다른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병원 자체적으로도 변화하고 있지만, 미래 의료 테스트장의 핵심은 비플러스랩에서 담당하지 않을까 싶다. 의료 변화를 확신한 상태에서 서울부민병원을 미래 R&D센터로 삼고, 혁신을 준비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했다.
비대면 시대의 병원, 그리고 의사
그가 생각하는 미래 의료는 비대면을 기본으로 한다. 1차 진료의 경우 비대면 진료가 활성화하고, 웨어러블 디바이스로 일상의 건강 데이터를 수집한다. 이 정보는 클라우드로 넘어가고, 의료기관과 연동해 병원에 가지 않아도 실시간 건강관리 및 예방이 가능하다. 의료의 패러다임은 진단 후 질병 치료에서 예방적 치료로 바뀌고 있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질병에 걸릴 확률을 계산할 수 있게 되면 유전체 시장 또한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비플러스랩은 변화에 보폭을 맞추며 서비스를 고도화하고 있다. 의료정보서비스 ‘어디아파’는 지난 6월 리뉴얼을 통해 2.0 버전을 공개했다. 어디아파는 사용자가 주증상 중심의 질문지를 선택하면 병원에 가기 전 인공지능(AI) 분석으로 예상 질환을 알 수 있는 서비스다. 일일이 병원에 찾아가 어떤 병인지 알아보는 대신 증상에 맞는 근거리 병원 정보를 활용해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는 장점이 있다. 지금까지 누적 회원 수는 7000명, 앱 다운로드 수는 4만5000건을 기록하고 있다. 비플러스랩은 연말까지 주증상 100개를 기반으로 확대 개발해 1300여 개 주요 질환을 예측하는 시스템으로 구축될 예정이다.
정 대표는 “환자들은 자신이 어떤 병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어느 과를 가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일단 병원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의료 쇼핑’을 하는데, 이에 따른 사전 낭비가 크다. 의료 쇼핑은 건강보험 재정 이슈와 맞물려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은 문제다”며 “어디아파를 이용하면 예상 가능한 질병 리스트를 받고, 문진 차트 요약본도 볼 수 있다. 지금은 병원 추천이 불법이라 증상에 맞는 필요한 과를 거리순으로 보여준다. 미래에 알고리즘을 통해 환자를 대면하면 의사들도 과거력, 증상을 묻고 답하는 시간이 줄고, 예상 가능 질병 리스트를 활용해 효율적인 진료가 가능해질 것이다"고 내다봤다.
현재 비플러스랩의 직원은 30여 명 정도. 2017년 창업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면서 채용을 늘리고 있다. 직원 대다수는 의사, 약사, 간호사 등 전문인력이다. 웬만한 병원 한 곳의 인력 규모와 맞먹는 ‘온라인 하스피럴’이다. 그동안은 투자도 받지 않고 정 대표 개인 자금으로 회사를 이끌어왔다. 최근 정부 AI 바우처 사업에 선정돼 3억원을 지원받았지만, “동그라미 하나를 더 붙여 지원해야 한다”고 자금 문제를 언급하기도 했다.
창업 5년 차인 올해는 투자를 준비 중이다. 비대면 진료 시대를 준비하면서 우수 인력을 유치하고, 미래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자금이다. AI를 배워 본 적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창업이었지만, 이제는 의사로서 진료·수술 경험과 병원장으로서의 조직 경영, 스타트업 창업 경험을 융합해 또 다른 도전에 나서고 있다. 의사, 경영자, 환자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는 위치에서 누구보다 먼저 시장 니즈를 파악해 사업에 적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여기서 나온다.
그는 “(정부에서 전문인력 창업을 장려하지만) 헬스케어 분야는 본인의 자금 여력이 없으면 도전하기 어려운 영역이다. 이번에 정부 바우처 사업에 선정돼 도움을 받았지만, 현실에서는 수십 억원의 자금이 필요하다. 제대로 된 결과물이 나오려면 조금 더 큰 단위의 정부 지원이 필요하다”며 “지금까지 모아둔 돈으로 회사를 운영했지만, 한계가 오고 있다. 11월 중에는 IR을 통해 전략적 투자자(SI)를 접촉할 예정이다. SK텔레콤 출신 허기준 대표도 합류하면서 밸류업 프로젝트와 투자 유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서비스는 의료계의 여러 민감한 이슈를 담고 있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험난하지만, 젊은 의료인으로서 소신을 갖겠다. 미래 의료가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 솔루션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겠다”며 “병원, 의사, 환자 그리고 건강보험에서 역할을 하는 국가 재정까지 모두가 행복한 솔루션이 되면 성공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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