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하며 세계 경제는 한순간 나락에 빠진다. 그 원인으로 글로벌 금융기관이 추악한 ‘탐욕’을 첨단 금융 기법으로 포장한 것이 드러났다. 굴지의 글로벌 금융기관의 신뢰는 무너졌고, 이후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 선진국에서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 많은 제재를 가했다. 그때 금융회사의 탐욕이 한국 땅에서는 예외인 줄 알았다. 그 후 10년이 지난 2019년, 금융위기 이후 10년간 세계 경제의 영향과 변화에 대해 내로라하는 경제학자, 국제기구의 연구 발표가 줄을 이었다. 그러던 2019년 10월, 금융감독원은 해외금리연계 DLF에 대한 중간 검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금융감독원의 발표 내용에 금융투자업계에서 반평생을 자부심으로 보낸 필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부분 금융회사가 광고나 홍보를 통해 대중에게 알리려는 이미지는 고객에 대한 정직, 신뢰, 헌신, 앞선 투자 능력 등이다. 그러나 중간 보고서가 밝히는 사실은 금융회사가 주장하는 이미지와는 너무나 거리가 있었다. 금융회사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 고객을 향해 능동적으로 거짓말하고, 방관하고, 복지부동했다. 방심한 틈에 미국 금융위기의 탐욕은 한국 금융시장에서 사모펀드라는 첨단 금융으로 다시 꽃을 피운 것이다.
DLF 사태는 드러난 지 1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진행형이고 징계와 불응이라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학습효과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교한 사회 시스템일수록 대형 사고의 책임과 책임질 사람이 부정되는 것이 사회 관습이 됐다.
설상가상으로 금융감독원은 올 2월 라임 펀드, 7월에는 옵티머스 펀드 사고에 대한 중간 검사 결과를 또 내놓았다. 금융산업은 DLF 이후에도 나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점입가경이다. 금융 비즈니스로부터 이익을 극대화하고 사취하기 위해 자산운용사는 불법적인 행위를 했고, 이를 견제하거나 막았어야 할 판매사와 수탁회사 등 사모펀드 시스템의 금융회사는 그러지 않았다.
금융회사 탐욕의 부작용은 DLF 사태에서는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한 준법 감시가 작동하지 않은 정도였으나 이후 금융회사의 불법 행위와 이에 대한 방관이 무감각해지는 단계까지 진화했다. 최근 DLF-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건이 정쟁(政爭)의 진흙탕으로 빠져들어 가며 마치 세월호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절망과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신이라는 사건의 본질은 정치적 이해의 난장(亂場) 속에 묻히고, 결국 피로와 망각 시스템이 세월호 사건에서 작동을 시작했다. 아마 DLF-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건도 같은 길을 갈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이 걱정돼서 30년 가까이 금융 현장에서 금융소비자로부터 밥을 먹던 도리로 한마디 보태는 것이 오지랖은 아닐 것이다.
주로 알려진 DLF-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의 원인은 불공정 행위, 부당영업 행위, 사모펀드 정책 실패, 불법 범죄자와 정치인 및 금융인의 결탁과 공모, 이런 것들이다. 심지어 공수처와 검찰 개혁으로도 범위를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원인 진단은 정확성 여부를 떠나 이들 금융 사건이 ‘일시적’ 오류에 가깝고 즉시 수습 가능한 현상으로 인식되는 특징이 있다. 즉, 컴퓨터 프로그램의 일시적인 버그(Bug)라는 것이다. 따라서 금융 시스템의 훼손은 극히 일부분이며 전문가에게 A/S를 받으면 기능은 정상화할 수 있다는 인식이 배경이다.
이런 맥락에서 책임질 사람들은 징계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직(職)을 유지하거나 재임을 위해 불응과 소송을 이어간다. 금융당국은 불공정·부당 영업 행위 제재와 사모펀드 제도에 대한 처방을 내리고 정치권은 검찰수사, 특검 등을 주장한다.
과연 이들 금융 사건은 금융 시스템의 버그에 불과할까? 그렇게 덮고 넘어가면 한국 금융 시스템은 앞으로 안전할까? 그렇게 믿기에는 석연치 않다. 3개 사건에 관련된 금융회사가 은행·증권·자산운용사 등 금융 시스템의 전방·후방 가치사슬을 따라 총체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고, 대표적인 대형 금융회사들이 포함되었으며, 관련 기관들도 사건 리스트에서 중복되는 점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밀한 분석이 아니더라도 버그가 아니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하고 좀 더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칼럼 도입부를 유심히 읽은 독자는 3개 금융 사건에서 금융소비자가 읽어야 하는 교훈을 짐작할 것이다. 일부 금융회사의 ‘탐욕’이 다시 작동하면 DLF-라임-옵티머스 펀드 사태는 언제든지 재연할 가능성이 있다. 바로 금융회사의 ‘거래 상대방 위험’이다.
앞으로 금융소비자는 금융회사가 항상 신뢰받는 행동을 할 것이라는 편견은 포기하는 것이 좋다. 즉, 거래 상대방 위험을 고려하고 금융회사를 신중하게 살피고 선정해야 한다. 거래 상대방의 파산 위험을 나타내는 지표로 ‘CDS 프리미엄’이 있다. 만약 금융소비자의 금융회사에 대한 심리적 CDS 프리미엄 지표가 있다면 틀림없이 최고치에 있을 것이다.
한편 2008년 금융위기의 피해가 심각했던 서구 금융권에서는 금융회사의 ‘거래 상대방’ 위험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철저히 통제하기로 했다. 또한 금융위기 이후 선진 경제는 저성장 구조로 빠졌는데, 금융회사의 신뢰가 무너진 것이 원인이었다는 지적도 있다. 금융회사의 배신은 이전에는 국민이 상상할 수 없던 위험이었다. 금융회사의 거래 상대방 위험이 현실로 터진 후, 발생이 불가능한 꼬리 위험(tail risk)에 대한 사회적 경계감이 커지며, 경제주체는 장기적인 투자 활동을 쉽사리 하지 못하게 되었다. 최근 금융회사의 신뢰 붕괴로 이어진 일련의 금융 사건을 경제 성장 관점에서도 좀 더 신중한 시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유이다.
일련의 사모펀드 금융 사건을 보면서 햄릿의 비극적인 연인 ‘오필리아’가 떠오른다. 오필리아는 햄릿과 어머니, 삼촌 사이의 배신과 복수 속에 지고지순하게 햄릿을 사랑했으나 그에게 깊은 심리적 상처를 받고 결국 미쳐 목숨을 버린 여인이다. 이 비극을 그린 영국 화가 존 에버렛 말레이의 작품 ‘오필리아’를 보라. 물에 반쯤 떠 있는 오필리아의 표정에서 믿었던 존재로부터의 배신과 절망을 서늘하게 느낄 수 있다.
최근 DLF-라임-옵티머스 펀드 사건에서 한국 금융소비자는 오필리아처럼 신뢰에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피해는 금액으로 약 3조, 계좌 수로 9000여명에 이른다. 피해자 범위는 남녀노소는 물론 유명 상장법인, 대학 등을 가리지 않았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피해자들은 미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금융소비자의 트라우마를 외면하면 가뜩이나 코로나19로 충격받은 한국 경제는 더 깊은 저성장의 늪에 빠질 수 있다.
금융소비자는 금융회사의 ‘거래 상대방 위험’에 대한 안일한 생각을 바꿔야 하고, 오필리아의 비극에 이르기 전에 금융 당국은 사모펀드 관련 금융 사건에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