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무렵(2020년 9월 30일) TV공연을 한 가수 나훈아가 공연 중에 "국민이 힘이 있으면 위정자들이 생길 수가 없다"고 말해, 논란을 부른 적이 있다. 이 말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구구한 해석이 나왔다. 한 원로가수가 한 국민의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꺼낸, '갈증이 담긴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풀이를, 아주 정확하게 류영모가 해주고 있다. 이미 수십년 전에 위대한 사상가가 그 문제에 관해 해명을 해놓은 셈이다.
"국민이 주권자인 만큼 국민이 알 건 알아야 합니다. 온 국민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정부는 필요없게 됩니다. 아는 국민이 자치적으로 잘 처리할 것입니다. 참으로 온 국민이 알 때는 정부가 필요없게 됩니다. 이 땅 위에서 정부가 없어지지 않더라도 정부가 없어질 수 있다는 이상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적게 다스리는 정부, 안 다스리는 정부에 대한 바람은 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높은 이상입니다."
이것이 바로, 류영모가 펼친 국가사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는 또 이런 비유로도 말했다. "정치는 아파하는 민중을 위해서 의사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민중이 아무 일 없으면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노자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을 말했다(도덕경 80장). 문명의 발달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인간의 노동을 감소시켜 게으름과 낭비와 생명의 쇠퇴를 낳는다고 보는 관점이다. 전쟁과 세금으로 피폐했던 시대의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이상(理想)사회로 볼 수도 있지만, 류영모는 그것이 백성에게 오히려 주체적인 삶을 살게 하는 기틀이 될 수 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제 선진국 진입의 문턱에 서 있는 나라로서, 트로트도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과 진화를 해야 한다는 각성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는 돋보인다. '테스형'은 트로트에 실어놓은 철학적 질문이다. 서양철학의 비조(鼻祖)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금언(金言)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일상의 감각으로 반문(反問)하는 노래다. 나훈아와 소크라테스는, '보통사람의 보통사상'으로서 트로트의 꺾기 위에서 서로 공유지점을 찾은 셈이다. 나훈아의 이 노래를 패러디 하여 '다석형(多夕兄)'이란 노랫말을 지어서, 다석사상연구회 사람들에게 카톡으로 돌렸더니 뜻밖에 '다석(多夕)스럽다'면서 이 시리즈 글에도 한번 실어보는 게 어떠냐는 제안이 왔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여기 옮겨본다.
어쩌다가 하늘을 목 빠지게 봅니다
그리고는 하나를 그 마음에 묻어요
다시 와준 오늘이 고맙기는 하여도
죽도록 하루살이 또 내일은 없다네
아! 다석형, 나라는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다석형, 류영모다석형 몸사랑은 또 왜 이래
네 죽음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다석형
울 아버지 가실 때 말도 없이 갔는데
다석형이 꼬집어 죽는 맛을 본다네
그저 피는 진달래 지기 위해 폈다고
자꾸 피려 용쓰는 날 꾸짖는 것만 같다
아! 다석형, 미쳤다 세상이 제 죽을줄 모르네
아! 다석형, 류영모다석형 쟤들은 또 왜 저래
먼저 가본 빈탕은 어떤가요 다석형
가보니까 얼나는 잘있나요 다석형
아! 다석형 아! 다석형 아! 다석형 아! 다석형
다석형(多夕兄)
전쟁 유발자, 국가는 무엇인가
사람은 국가 속에서 태어나고 그 속에서 죽는다. 태어나면 좋든 싫든 국가구성원이 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싫다고 이 나라의 구성원 자격을 포기할 수 없다. 국가는 강제적으로 국민을 통치한다. 70억 인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든 곳은 모두 국가가 지배하고 있다. 무정부였던 소말리아도 2012년 연방정부를 세웠다. 국가는 그 국가 내에서 폭력을 독점한다. 왜 국가에게 이런 권력이 주어졌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인류의 긴 역사를 통해 체계화되어온 영토 공동체의 주된 지배 형식이란 점만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 대해서 철학자 최진석(서강대 명예교수)은 이렇게 설명한다. "국가 안에서 폭력은 관리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폭력을 임의대로 사용하면 국가가 유지되기 어렵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가진 모든 폭력성을 다 거두어서 국가가 총체적으로 관리한다. 국가가 대외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때는 군대가 나서고, 대내적으로는 경찰이 나선다, 군대와 경찰로 한 국가의 폭력은 관리되고 대외적으로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보호되는 것이다. 국가가 안전과 이익을 공유하는 배타적 집단임을 감안할 때, 결국 최종적인 일은 전쟁으로 나타난다."<최진석, 국가란 무엇인가, 2019.7.2>
국가는 추상적인 말에 가깝다. 국가의 독점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정부다. 정부는 총과 형무소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집단이다. 그들은 국가가 수행하는 폭력을 대신 행한다. 국가 구성원은 자동적이고 강제적이지만, 정부 구성원은 자동적이지도 강제적이지도 않다.
국가와 국민 간의 관계는 지배-피지배의 양상을 지닐 수밖에 없기에 위계적 질서를 지닌다. 국가는 지배하고 국민은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국가가 해야할 통치를 대신하는 '정부'는 좀 다르다. 국가가 해야할 역할을 위임받았지만, 국민에 의해 그 역할을 부여받는 형식을 지님으로써 형식적으로는 '위계질서의 반전(反轉)'이 이뤄진다. 국민이 정부를 지배하고, 정부가 국민에게 지배를 받는 형식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역할을 대행하는 정부가, 그 독점적 국가 권력을 자의적으로 휘두르기가 쉽다. 국민과 정부 사이 위계질서의 양면성이 정부의 위선과 국민의 고통을 낳는 이유다. 국가의 문제는 정부의 오작동(권력 남용)이 허용되어 있는 원천적인 약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독점적 국가 권력을 제어하여 그 폐해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오히려 그 독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회의 시스템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쪽도 있다.
누가 왜, 137만명을 죽였는가
한국전쟁은 이 땅에서 137만명을 죽였다.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낸 편람(2019년 6월 25일 국제신문 보도)에 나오는 기록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이렇다. 한국군 13만8천명, 경찰 3천명이 숨졌고 북한군은 52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유엔군 사망자는 3만8천명이고 중공군 사망자는 14만8천명이다. 남한 민간인은 24만명이 숨졌고 북한 민간인은 28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1955년 정부(내무부 통계국)가 발표한 통계연감에는 남한측 전쟁 인명피해자를 99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여기엔 부상자 23만명과 행방불명자 30만명, 피랍자 8만명이 포함되어 있다.
137만명을 죽인 건 누구인가. 이 땅을 137만 구의 주검으로 뒤덮은 악마는 누구인가. 요행히 죽음은 피했으나 그 이후 오랫동안 그리고 지금껏 전쟁과 분단의 생채기로 온 국민을 고통받게 한 그 주체는 누구인가. 그런 죽음의 늪으로 내몰았던 이들은 그것에 대해 무슨 책임을 졌던가. 그것이 국가였다면, 그 137만명의 원혼에게 진실로 국가가 필요한 존재였던가.
전쟁은 이 땅의 사람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새롭게 던지게 했다. 자력이 아닌 타력(他力)으로 '국가'를 되찾은 뒤, 거의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비워진 땅에 36년간 국가체제를 경험하지 못한 국민들이 잠깐 환호했다. 그러나 곧 지도자들은 우왕좌왕했고, 서로 다른 견해와 비전들이 좌충우돌 하며 갈등을 빚었다. 독립을 찾아준 국가들은 국제연합의 위임을 받아 이 혼란이 진정될 때까지를 기한 삼아, 신탁통치를 저울질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채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참혹한 내전(內戰)이 일어났다. 전쟁은 갈등의 양쪽을 최악으로 할퀴고는, 이념으로 나라가 쪼개진 분단을 고착화한다. 한반도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적으로 두개의 국가가 대치하는 '2국(國)'시대를 맞게 됐다. 전쟁은 많은 희생자를 낸 만큼, 그 희생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느냐에 대한 질문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 희생을 명령하고 그 희생을 감수하게 한, 국가는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국가 폭력은 종교 신념에 위배된다?
6·25는 국가 권력을 대행하는 정치집단이 충돌한 전쟁이었다. 그 정치집단은 국가가 지닌 독점력과 강제력을 이용해 스스로가 추구하는 어떤 이념을 위해 국민 전체를 희생의 총알받이로 내몬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137만명의 주검이 쌓인 이유이며, 이 땅의 분단과 이념갈등을 자아낸 원인이다.
걸출한 신학자였던 톨스토이는, 국가의 이런 폭력에 대해 주목하고 이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종교적 신념에 원천적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정치적 리더들이 각료들의 조언에 의지하여 수백만명을 도살할 작전을 올해 안에 시작해야 하는지, 시간을 두고 시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톨스토이는 18세기 중엽 러시아에서 생긴 기독교의 한 교파를 주목했다. '두호보르'라 불리는 이 교인들은 원시기독교의 교의를 지키며 무저항주의와 사해동포주의를 실천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만을 인정했고, 국가 법률과 병역의무를 부정했다. 러시아정부는 이들을 탄압했다. 톨스토이는 71세에 소설 '부활'을 써서 그 원고료로 두호보르 교인들을 캐나다로 이주하는 데 썼다.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가 군대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도둑이나 폭력범을 체포할 수 있는 경찰의 역할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만약 국가가 이런 생각에 방해가 된다면 지구상에서 국가라는 개념이 사라져도 상관없다고 할 정도였다.
제자에게 전쟁터로 가라고 한, 류영모
그러나 전쟁을 겪으면서 류영모는 국가의 오작동을 보았지만, 국가를 지키려는 숭고한 희생정신이 타오르는 것을 함께 보았다. 기독교의 참뜻인 '원수를 사랑하라'를 지키되,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함으로써 '독점적 폭력'이 자행되는 상황을 지혜롭게 막는 것이 필요하다는 입장에 섰다.
* 사실 류영모는 '국가(國家)'라는 말이 옳지 않다는 견해를 밝힌 바 있다. 국가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가(家)'는 유교의 가족주의 발상에서 나온 말이다. 이 나라가 망한 것도 지나친 가족주의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일본이 쓰는 말인 '국가'란 말을 굳이 따라쓸 필요가 있는가. 류영모는 국가 대신 '국방(國方)'이라는 말을 쓰자고 제안했다. 이 말은 나라라는 개념이 포함하고 있는 영토 개념을 담고 있고 또한 사방천하(四方天下)라는 포괄적 의미도 담는다. 그는 또 민족이란 말 또한 틀렸다고 했다. 즉 민족 대신, 유기체의 개념을 담아 '민체(民體)'라고 표현하는 것이 좀 더 뚜렷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방(國方)과 민체(民體)란 말을 제안한 까닭은 뭘까. 우리가 서있고 몸담은 곳이 분명해야, 생각과 깨달음의 방향과 좌표가 정해지며 삶과 죽음의 초석을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자 서완근이 입대 통지서를 받고 고민하다가 류영모에게로 달려왔다.
"스승님, 인민군과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가는 것이 옳습니까. 평화와 사랑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감옥으로 가는 것이 맞습니까."
류영모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고자 목숨을 바친 그 은혜를 몰라서는 안돼요. 그렇게 목숨을 바친 것이 평화정신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전선에 나가 싸우다가 전사하는 일도 귀합니다."
전쟁의 경험은, 국가의 근본적인 폭력성에 대한 자각을 낳았고 그것이 국민을 위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라는 국가의 대리행위자들을 통해 독점적 폭력을 잘못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크다는 인식도 낳았다. 또 전쟁이 발생하는 상황은 인간이 지닌 수성(獸性)인 '탐진치(貪瞋痴)'가 집단적으로 폭발한 경우라고 보기도 한다. 더 가지려는 욕망과, 타인에 대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성적인 약탈심리가 더해져 극악한 양상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 탄생의 근원이 탐진치라고 류영모는 말한다.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무슨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서로 활동하고 경쟁을 하여서 나온 것이 나입니다." 그러니까 진(瞋, 공격 욕망)이 있었기에 태어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전쟁이란 무엇이던가. 남을 먹으려는 탐(貪)이 움직이고 남을 이기려는 진(瞋)이 들끓고 남을 굴복시키려는 치(痴)가 꿈틀거리면서 전쟁이 일어난다. 인간 수성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의 집단 비극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함석헌은 6·25 전쟁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은 미국과 소련이 38도 선을 그어 나라를 동강낸 데 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것은 조선왕조가 백성을 지나치게 수탈했기 때문이다. 남과 북으로 나눠진 이 나라가 하나 되자면 자주(自主)하려는 정신이 있어야 한다. 자주하는 정신이 있으려면 깊은 종교를 낳아야 한다. 깊은 종교를 낳으려면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일찍이 역사상 위대한 종교 없이 위대한 나라를 세운 민족이 없다. 또 종교가 잘못 되고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다." <함석헌 '새 시대의 신앙'>
분열의 극복과 전쟁의 방지를 위해서는 깊은 종교가 있어야 하고, 깊은 종교를 낳기 위해선 생각하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전후(戰後) 피폐한 삶과 무너진 민족적 자부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류영모는 오히려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한복판에서 말씀을 듣다
"전쟁을 겪으면서 말씀이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말씀의 임자가 누구인가. 성령이 말씀의 주인공입니다. 마태복음 10장20절에서, 말하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맘 속에서 말하는 이는 성령입니다. 참말을 듣는 이가 많아야 나라가 바로 되어 흥하게 됩니다. 인생에서 말씀을 빼면 재 한줌 밖에 될 것이 없습니다. 결국 사는 길은 말씀뿐입니다."
류영모를 지나간 전쟁은, 류영모를 더욱 단단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류영모는 죽음의 광기로 가득 찬 전쟁의 한복판에서 오직 '말씀'을 듣고 있었다. 천지가 광란일수록 그의 내면은 고요하고 순일(純一)했다. 이 땅에서 이 전쟁을 겪어내면서 이렇게 고요한 '영성의 자아'를 유지할 수 있었던 사람이 또 있었을까.
그가 성자로 불릴 수 있는 까닭은, 호화로운 말이나 현학적인 지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토록 담담한 영적 기풍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는 대목이다. '전란'이란 지독한 어리석음과 고통을 떨치고 나라를 바로세우는 일은, 함석헌이 말하는 자주정신이나 깊은 종교일 수도 있지만, 각자의 생각 속에 성령의 불꽃을 더욱 지피는 것이라는 류영모의 '근본'이 우리의 옷깃을 더욱 여미게 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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