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대남 군사행동 계획 보류 결정 이후 중단됐던 북한 관영 매체의 대남 비난이 다시 시작됐다. 특히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사실상 총괄한 서훈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공개 저격했다.
북한이 오는 11월 3일(현지시간) 미국 대선 이후 무력도발을 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상황에서 북한 관영 매체의 대남 비난은 한반도 정세를 향한 우려의 목소리를 한층 고조시킬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 주민들에게 공개되지 않는 조선중앙통신에만 비난 기사를 게재, 나름 수위를 조절했다는 관측도 있다.
29일 조선중앙통신은 ‘동서남북도 모르고 돌아치다가는 한치의 앞길도 없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최근 서 실장이 미국 출장에서 한 발언에 날을 세웠다.
통신은 “남조선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란 자가 비밀리에 미국을 행각하여 구접스럽게 놀아댔다”면서 서 실장이 기자회견에서 한 발언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서 실장은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 국무부 청사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과 면담 후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남북 관계를 한·미동맹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해나갈 방침이냐’는 질의에 “남북 관계는 단순히 남북만의 관계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모든 것들이 미국, 주변국과 서로 의논하고 협의해서 진행할 문제”라며 “이제까지도 그렇게 해 왔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통신은 “얼빠진 나발”이라고 조롱하며 “신성한 북남 관계를 국제 관계의 종속물로 격하시킨 망언”이라고 맹비난했다. 또 “민족자주를 근본핵으로 명시한 역사적인 6·15공동선언과 10·4선언,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에 대한 남조선 당국의 공공연한 부정이고 배신”이라고 꼬집었다.
통신은 남북 관계가 남한과 북한이 풀어야 할 민족 내부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미국 등과의 협의를 “외세에 빌붙는다”고 표현했다.
특히 “북남 관계 문제에 수십 년 동안이나 몸담아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모든 문제를 푸는 근본 열쇠가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는 데 있다는 모른단 말인가”라며 서 실장을 향한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아울러 남북 관계 교착 국면의 책임이 문재인 정부에 있다고 주장했다. 통신은 “오늘 북남 관계가 교착상태에 놓인 원인이 남한 당국이 스스로 미국에 제 발을 얽어매 놓고 자기를 조종해달라고 제 운명의 고삐를 맡겨버린 데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북남 관계를 망쳐놓은 장본인에게 도와달라고 청탁하는 것은 집안 가산을 풍지박산 낸 강도에게 수습해달라고 손을 내미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통신은 서욱 국방부 장관의 최근 방미 시 홀대 논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앞서 서 장관과 마크에스퍼 미국 국방장관은 지난 14일(현지시간) 미국 국방부 청사에서 제52차 한·미안보협의회(SCM)를 가진 뒤 공동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었다. 그러나 에스퍼 장관이 돌연 미국 측의 사정을 이유로 기자회견을 취소했다.
이에 대해 통신은 “외교·안보 관계를 주관한다는 안보실장의 사고와 처신이 이 정도이니 미국으로부터 무시와 냉대, 수치와 망신을 당하고 행각 도중에 쫓겨 온 모양새를 연출한 것도 별로 이상할 것은 없다”면서 “예로부터 망신과 수모는 남이 주기에 앞서 스스로 당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비꼬았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의 이날 비난에 대해 남북 관계에 대한 북한의 기존 주장이 되풀이된 격이라고 해석했다.
다만 임 교수는 북한이 그간 대남 비난을 자제하다 다소 수위가 높은 수준의 비난을 재개한 것에 초점을 맞춰, 미국 대선 이후의 상황을 관리하기 위함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 대선 이후를 대비해 우리 정부의 향후 대미 정책 방향에 영향력을 미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면서 비난의 화살이 서 실장을 향해 있는 것에 주목했다.
임 교수는 “사실상 대북 접촉과 대화의 핵심 당사자인 서 실장을 겨냥해 노골적인 비난과 경고를 보낸 것은 미국 대선 이후 들어설 신(新)정부에 대해 당당하게 처신해 남북 관계의 자율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남북 관계 복원은 기대하지 말라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설명했다.
또 이날 기사에서 판문점선언, 9월 평양공동선언 등이 언급된 것을 두고 북한이 여전히 합의 이행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면서도 “합의 이행을 위한 조건으로 자주적 남북 관계 설정, 대미 자율성 확보를 재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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