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를 기록한 한 언론보도를 보자. “대통령의 개혁의지에도 불구하고 행정규제와 권위의식이 없어지지 않는 한 21세기에 우리가 앞서 나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현재 위치를 지키는 것조차 어려울지도 몰라요. (중략)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반도체 공장 건설을 신청해도 허가가 나오질 않아요. 공장 건설하는데 도장이 1천개나 필요합니다. 첨단산업이라고 우대받는 반도체가 이 정도니 다른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정부는 행정규제가 많이 완화됐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이 정권 들어서고 나서도 크게 완화된 게 없습니다.” 1995년 발언이지만,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모양새다.
한국 정치의 후진적 행태는 그 이후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발언 내용을 보고받은 YS(김영삼 전 대통령)가 격노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부산에서 있을 삼성승용차 공장 기공식에 정부측 인사가 불참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이후 철회됐지만 정부의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다. 이 회장은 국내에 있기가 불편해 일본으로 떠나 있었다. 대통령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한 삼성의 노력이 4개월이나 지속됐다. YS 방미 때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을 위해 500만 달러를 내고, 파격적인 중소기업 지원방안을 발표해야 했다. 그 이후에서야 관계가 회복됐다. 정치 권력이 기업을 옥죈 전형적 사례다.
지금은 나아졌을까. 최근 국정감사 과정에서 발생한 한 ‘통계’ 해프닝은 정치가 여전히 4류, 아니 5류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국감정원과 KB국민은행의 부동산 통계 차이를 두고 논란이 이어지자, 정권 눈치를 본 KB가 슬그머니 매매‧전세거래지수 통계를 중단했다가 부활시킨 사건이다.

이건희 영결식1[사진=사진공동취재단]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