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한 가족’으로 불리던 세계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보이지 않는 적(敵)과 싸우며 분열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자국민 보호를 위해 국경을 봉쇄하면서 다자주의 협력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지역 이기주의는 한층 심화했다. 여기에 ‘미·중 갈등’까지 상수로 더해지면서 전 세계가 둘로 갈라질 위기에 처했다.
특히 한반도, 동아시아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시대 개막에 맞춰 ‘각축의 장’으로 다시 부상할 전망이다.
문재인 정부는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 리더십’을 앞세워 현 위기를 극복하려 한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가장 근접한 중국, 일본 사이에 놓인 외교 난제 해결에도 난항을 겪고 있다. 지난해 한·중·일 정상들은 중국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서 만나 동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시대를 약속했다. 그러나 약 1년이 지난 현재, 3국 사이엔 냉랭한 ‘한기(寒氣)’만 가득하다.
전문가들은 정부 특유의 ‘전략적 모호성’을 버리고, 우리만의 외교원칙을 앞세운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 건설적인 한·일 미래 관계를 위해 과거사에 매달리기보다 대국(大國)적인 태도로 정부가 한발 뒤로 물러설 것을 제안하기도 한다.
◆“미·중 사이 한·중, 원칙 있는 유연성으로 대처해야”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한·중 관계는 미·중 갈등의 향방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무역 갈등에서 시작한 미·중 간 패권경쟁은 기술과 이념 분쟁으로 번졌고, 코로나19 사태를 거치면서 한층 격화됐다.
‘언택트(Untact·비대면)’가 일상화되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인 첨단 산업 분야에서의 미·중 갈등은 격화되고, 코로나19 사태를 기점으로 양국 갈등이 인권·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념 경쟁으로 퍼지고 있다.
그 속에서 한국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전략적 모호성’을 견지하면서 그나마 회복하던 한·중 관계는 다시 위기에 놓였다.
이젠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 세계의 무한경쟁이 점쳐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서 미·중 갈등 완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전문가들은 미·중 갈등이 한·중 사이 독립 변수가 아닌 ‘종속 변수’가 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제라도 정부가 ‘중립 외교’가 아닌 ‘실리 외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중이 경쟁 구도 속에서도 국제질서와 규범을 중시하는 만큼, 한국도 외교 원칙과 규범을 내세워 우리만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얘기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원칙이 있는 유연성’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김 교수는 “제일 좋은 것은 정부가 선제적으로 한국의 입장과 원칙을 표명하는 거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기회를 놓쳤다”면서 “현 상황에서는 한국의 원칙에 따라 주요 현안을 유연성 있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미·중 갈등 초기 정부가 한국의 원칙을 먼저 표명하고, 그에 맞는 대응을 해왔다면 현재 미·중의 힘겨루기에 끼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는 아니었을 거란 안타까움으로 읽힌다.
이상만 경남대 극동연구소 교수는 대중(對中) 무역 의존도 때문에 미·중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을 꼬집으며 ‘제3지대’와의 협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미들파워(중견국)로서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데 왜 활용을 못하는지(모르겠다)”라며 “미국과 중국을 제외한 기타 국가들과 협력해 제3지대를 끌고 가는 정통성을 확보하면 굉장히 힘이 된다”고 아쉬워했다.
이어 “(미·중 사이에서) 당당해져야 한다”면서 “왜 일본에는 악을 쓰고 덤비면서 중국에는 아무 말도 못 하는가 그런 말이 나오지 말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이 교수는 제3지대와의 협력으로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과의 신남방 정책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관련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정권이 바뀌더라도 신남방 정책을 연속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며 “특히 동남아 국가들과 전략적 협력이 가능할 정도로 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아세안 국가들과의 협력을 경제 분야에 국한하지 말고 정치, 외교, 군사 등 다양한 측면으로 확대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또한 “전 세계에서 동남아시아가 가장 젊은 경제”라며 “100년 앞을 내다보고 신남방 정책을 계속해 나가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한·일 정상, 늦어도 내년 1월 전엔 만나라”
이런 상황에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 배상 문제에서 비롯된 한·일 갈등도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다.
설상가상 국내에 압류된 일본 전범 기업의 자산 매각, 이른바 ‘현금화’ 절차가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연내 성사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한·일 정상회담 역시 쉽지 않아보인다.
그간 국내에서는 연내 한국에서 열릴 차례인 제9차 한·중·일 3국 정상회의를 계기로 문재인 대통령이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와 만나 강제징용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3국 정상회의 참석을 위한 스가 총리의 방한 조건으로 한국 정부에 현금화 문제 해결을 요구, 연내 3국 정상회의 개최는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스가 총리가 방한했다가 아무 성과 없이 돌아갈 경우 국내에서 맞을 역풍을 우려한 것”이라며 “그럴 바에는 가지 말라고 하는 의견이 다수”라고 전했다.
신 전 대사도 “스가 총리가 방한해서 한·일 정상을 한 뒤 현금화 조치가 이뤄지면 그건 걷잡을 수 없는 것”이라면서 “스가 총리 입장에서는 내년에 총선도 치러야 하고 자민당 총재 선거도 해야 하는데 정치적 부담이 큰 셈”이라고 해석했다.
이 같은 일본 측 요구에 정부가 묵묵부답하면서 연내 한·중·일 정상회의는 물론 한·일 정상회담 개최도 성사되기 힘들어졌다는 얘기다.
최은미 아산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12월에라도 스가 총리가 방한한다면 한·일 관계에 어느 정도 진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교수 역시 “한·일 정부 모두 국민 시선이 있기 때문에 정책 변화를 도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스가 총리가) 한국에 온다면 구체적인 성과를 내야 할 텐데 그럴 정도로 한·일 관계가 성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한·일 정상회담의 순연이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양국 모두 내년에 중요한 정치 일정을 앞둬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양국 정상이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란 비관이 뒤따른다.
한국은 내년 4월 서울·부산시장 보궐 선거를, 일본은 내년 9월 자민당 총재 선거 등을 각각 앞뒀다. 한·일 관계 전망이 내년에도 밝지 않은 셈이다.
양 교수는 “양국 정상이 늦어도 내년 1월에는 만나야 하지만 어려워 보인다”며 “후쿠시마 제1 원전 오염수(처리수) 방류 결정까지 나면 한·일 관계에는 굉장한 악재다. 이런 악재 속에서 양국이 해법을 도출할 수 있을지”라고 우려했다.
결국, 양국이 해법을 찾을 때까지 현금화를 잠시 유보하는 국회의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사법부 판단에 관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 중인 정부 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신 전 대사는 “양국이 물밑으로 여러 노력을 하는 것 같기는 한데 근본적으로 청와대가 바뀌지 않으면 해결이 어렵다”며 “스가 총리 취임이라는 기회 중 기회를 살릴 적절한 행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국회가 대법원 판결을 미룰 수 있는 특별법을 입법해야 한다”며 “그렇게 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 모두 피를 흘리는 심정으로 서로에 한 발짝씩 양보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왔다.
양 교수는 “양국이 국내적으로 최소한의 설명만 하면 가능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어느 한쪽이 이기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동시에 양국 정부 간 물밑외교뿐 아니라 민간외교, 공공외교가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최 위원은 “정부가 한·일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뿐 아니라 국내적으로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한 노력이 좀 더 가시적으로 드러나야 할 것”이라며 “한국 정부 입장이 우리 사회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한국 내부에서도 합의가 도출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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