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국내 리메이크 소식에 기대만큼이나 우려의 목소리가 컸던 것도 같은 이유다. 그만큼 해당 영화를 '인생 영화'로 꼽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배우 한지민(38)은 많은 기대와 우려 속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리메이크작인 '조제'(감독 김종관)의 주인공 조제를 연기했다. 한국적 색채와 정서가 담긴 조제는 원작과는 다른 인물로 담겼다.
"(원작은) 워낙 여운이 강해서 겨울이 되면 한 번쯤 떠오르는 멜로 영화인 것 같아요. 우리 영화는 시대적 흐름과 한국적 색채를 담아내려고 했고 감독님께서도 어떤 변화를 주려고 노력하셨어요. 리메이크를 만들되 우리만의 것을 가져가자고 했죠."
"두 연인의 사랑 이야기지만 사람들이 만나 관계로 변화하고 그들이 이별하지만, 관계의 끝이 아니라는 이야기에 끌렸어요. 인물들의 성장과 변화로 이루어진 영화에요."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등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은 감각적인 영상과 찰나의 디테일로 '조제'만의 세상을 만들었다.
"김종관 감독님을 워낙 좋아해요. 그분의 전작도 좋아하고 그분의 정서도 좋아하죠. '조제'를 함께 하자고 하셨을 때 감독님만의 화법으로 만드는 조제가 기대됐어요. 원작과 차별점이 있을 거라고 봤고 그런 지점에서 새로운 점들이 있을 거로 생각했죠."
조제는 자신만의 세상에 사는 여자다.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 집,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세계를 짓고 고립된 채 지낸다. 하지만 우연히 영석을 만나 그의 도움을 받은 뒤 조제의 세계에 변화가 생긴다.
"부담감보다는 설렘으로 시작했어요. 조제의 세계, 주제, 언어 등 표현할 것들이 많았지만, 그것들을 표정, 대사로 전하지 않고 눈빛, 공간, 음악, 시선 등이 전해줄 게 더 컸죠. 과정에서는 배우로서 즐겁고 흥미로웠지만, 개봉을 앞두고는 (원작과 비교가) 부담이 없을 수 없더라고요."
이케와키 치즈루가 연기한 조제와 한지민이 연기한 조제는 결이 달랐다.
"원작을 20대 후반쯤 봤어요. 원작 속 조제는 사투리 억양을 쓴다고 하더라고요. 그 억양이 독특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꾸미지 않은 모습에서 나오는 사랑스러움이 있고 제가 연기한 조제보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곤 하죠. 저는 '다르게 연기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다른 캐릭터라고 생각했어요. 요리, 책, 위스키 등을 통해 상상하는 조제의 새로운 면들을 저만의 것으로 만들고자 한 거죠."
비주얼적인 면으로 조제의 심리 변화도 담아내고자 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긴 채 지내고, 푸석한 피부도 영석을 만나며 빛이 스며들게 되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숨기고 있는 모습이 울타리처럼 느껴졌어요. 사실 제가 곱슬머리인데…. 하하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제 머리로 표현할 수 있었죠. 피부 같은 경우는 거칠고 잡티가 드러난 살결을 보여주려고 했어요. 각질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영석을 만나고 사랑을 느끼면서 조금씩 그것들을 덜어내고 조제의 얼굴에 빛이 스며들게끔 했어요. 어둠에서 밝음으로 변화하는 미세한 변화를 보여주려고 했어요."
조제는 표현의 폭이 넓지 않은 캐릭터다. 배우로서도 고민할만한 부분이 많은 인물. 특히 드라마 '아는 와이프' '봄밤' '눈이 부시게' 등을 통해 망설이지 않고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인물들을 표현해온 그는 조제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새로운 표현법을 익혀야 했다.
"그간 제가 해온 캐릭터들이 성격적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이어서 연기할 때도 명확하게 감정 전달을 하는 게 익숙해졌었어요. '조제' 시나리오를 받고 밑그림만 있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조제의 세계가 독특하고 물음표가 생기는 지점들이 있었는데 감정 지문이 많지 않아서 배우가 채워야 하는 지점이 있었어요. 그건 제게도 모험이었고 새로운 도전이었죠. 숙제처럼 느껴지는 과정이 배우에게는 특별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요."
대본 리딩을 할 때도, 촬영 현장에서도, 카메라 앞에서도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조제의 삶을 들여다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길었던 한지민은 조제의 '눈', 그의 시선이 표현해야 할 몫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불안감도 있었어요. 눈빛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이 감정을 다 담아낼 수 있을까? 계속해서 덜어내는 작업을 하다 보니 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게 다 전달이 될까 하는 불안감이 들었던 거죠. 후반 작업하면서 제가 불안하고 고민한 지점들을 여러 소리, 빛, 음악으로 풍부하게 채워주신 것 같아요. 감독님은 저희가 보지 못하는 것, 듣지 못하는 것을 항상 담아내시거든요. 감독님을 믿고, 의지했어요."
조제는 휠체어를 타야만 외부에서 이동할 수 있는 인물이다. 장애를 가진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배우에게도 고민이자 조심스러운 부분이고 부담감도 커지기 마련이다.
이미 한지민은 단편영화 '두개의 빛: 릴루미노'를 통해 시각장애인 역을 연기했고, '그것만이 내세상'에서 다리가 불편한 인물도 연기한 이력이 있었다. 그래서 '조제' 역시 조심스럽게 다가갔고 진심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신체적 장애를 가진 인물의 연기할 때는 보이는 것보다 그들의 삶, 이야기를 들어보는 작업이 먼저예요. 감독님께서 많은 영상을 보내주셨고 다큐멘터리나 그들이 삶을 이야기 하는 영상들을 주로 봤어요. 그다음은 제게 최대치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을 찾으려고 했죠. 집안에 휠체어를 두고 자주 타보면서 익숙해지도록 연습했고요. 힘들다고 표현하기 조심스럽지만, 하반신에 힘을 빼고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하는 게 힘들었어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니까요."
영석 역을 맡은 남주혁과는 두 번째 호흡이다.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통해서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두 사람은 절절한 감정 연기로 많은 이에게 호평받았고, 재회를 바라기도 했다.
"(남)주혁 씨는 전작을 통해 호흡을 맞춰봤기 때문에 이 친구가 현장에서 연기할 때 어떤 결, 어떤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지 인지하고 있었어요. '눈이 부시게'의 경우는 워낙 선배님들이 많이 계셔서 항상 뒤 편에 있으려고 하고, 폐가 될까 봐 조심스러워했었거든요. 저를 친구로 대하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편하게 지내려고 했어요. 이후에도 시기가 잘 맞아서 저는 '미쓰백'으로, 주혁 씨는 '안시성'으로 영화 시상식에서 자주 만나서 이야기할 시간도 많았죠. 주혁 씨는 솔직하고 숨기지 못하는 게 매력이에요. 연기에 대한 열정도 많고요."
배우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생략된 상태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조제와 영석으로 지낼 수 있었다. 워낙 영화가 섬세한 감정을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배우 간 주고받는 호흡도 중요했다.
"이별하는 과정도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감독님의 시나리오에는 사랑하는 과정이 길고, 이별 과정이 짧아서 그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죠. 이별에 있어서 한 가지 이유만은 아닐 거로 생각했어요. 조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가 생겼고, 영석을 놓아줄 때가 되었다고 여긴 것 같아요."
한지민은 실제로도 영화 속 조제처럼 마음을 다했던 사랑과 이별을 경험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별은 언제나 아프고, 상처가 아무는 과정은 흉터를 남기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런 사랑을 해본 경험이 있죠. 이별은 아프고, 그만큼 뜨겁게 사랑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프지만 다시 돌이켜보니 다시 만난다고 해도 이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최선을 다할 수는 없을 거 같아요. 하지만 아프다고 그 시간을 잊고 싶지는 않아요."
연기도 마찬가지다. 한지민은 '미쓰백' 이후 배우로서 성장통을 겪고 있다고 고백하며, 이 과정 끝에 그에게 남기는 것이 있으리라 확신하고 있다.
"배우로서, 한지민으로서 성장통을 겪고 있어요. '조제'가 배우로서 성장통을 주기도 했고, '조제'를 찍은 뒤에는 인간 한지민으로서 성장통을 겪고 있죠. 요즘 상황이 그렇다 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데 '조제'가 자주 떠올라요. '조제'는 세상 밖으로 나와서 그가 말하는 가장 먼 곳을 어디까지 가봤을까요?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때는 솔직해졌을까요? 요즘도 문득문득 조제가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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