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 프리즘]
지난달 말 2박 3일의 여정으로 중국 외교부장 왕이가 서울을 다녀갔다. 그러면서 우리 외교가 또 한번 홍역을 치렀다. 그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의 만남에 25분 늦게 도착하는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본인의 사과도 없었고 우리 외교 당국도 사과를 받아낼 생각도 없었다. 더 실망한 것은 우리 외교 당국이 이번에도 중국 측과는 전혀 다른 회담결과를 발표한 사실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우리 정부가 발표한 정상회담과 장관회담의 결과 발표는 상대국의 발표와 전혀 달랐다. 외교관계를 연구하는 필자는 애로사항이 한둘이 아니다. 과거에는 양측의 발표 전문이 대칭적이었다. 외교 학도들이 점검해야 할 것은 번역 과정에서 특정 단어의 뉘앙스가 제대로 전달되었는지만 확인했으면 됐었다.
그러나 이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외교정책을 공부해야 하는 노력과 시간이 두 배 이상 늘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가 왜 이런 행태를 보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정부가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 하고, 무엇 때문에 정정당당하지 못한지를 말이다. 이 정부의 출범 모토 중 하나가 ‘정정당당’ 아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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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부가 왜 유독 저자세로 중국을 대하는지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의 2017년 12월 첫 중국 방문에서부터 우리 국민의 자존심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시진핑 주석은 문 대통령의 방문을 알면서도 다른 일정으로 베이징을 떠났고, 대통령은 이틀 동안 아무 일정 없이 혼밥을 해야만 했다. 이런 식의 외교 결례는 초유의 일이었음에도 대통령은 중국의 한 대학 연설에서 중국을 큰 산, 우리를 작은 산으로 비유했다. 우리나라 수행 기자는 대통령의 면전에서 중국의 사설경비업체 직원에게 폭행까지 당했다. 이 사건은 미제(未濟)사건으로 남아 있다.
대통령은 사드 문제의 해결을 호언장담하면서 시진핑의 답방에 목을 매고 있다. 정부와 여당도 모두 동참하고 있다. 우리 국민은 이런 나라의 모습을 보고 실망할 수밖에 없다. 시 주석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수차례에 걸쳐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사드 문제를 해결할 것을 직접 촉구한 데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가장 최근의 것이 작년 6월 오사카 G-20 정상회담 자리에서였다.
물론 시진핑의 이런 발언은 우리 정부 당국의 어떠한 문건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의 언론기사에도 보이지 않는다. 중국 언론에서는 보도되었음에도 말이다. 아직까지 사드 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찾지 못하면서 시진핑의 답방을 기다리는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의 수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6월부터 한·중 양국은 필수적인 경제활동과 기업인의 왕래를 보장하는 이른바 ‘기업인 패스트 트랙’을 시행했다. 이에 우리 정부와 언론은 중국의 호의를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불과 5개월 뒤인 11월 11일 중국은 일방적으로 이를 중단시켰다.
이에 우리 외교부는 ‘전면적인 중단’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결과는 완전한 중단이다. 얼마 뒤 우리 국민의 중국 입국 조건을 강화하는 조치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12월 1일부터 중국 입국을 위해서는 사전 코로나 검사결과뿐 아니라 유전자증폭(PCR) 검사와 혈청 항체 검사를 추가로 제출해야 한다. 이에 우리 정부 당국은 항의는커녕 해명조차 요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동일한 조건을 중국 입국자에게 적용하지도 못한다.
우리 국민을 분노케 한 희대의 사건이 또 있다. 지난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의 6·25전쟁 참전 7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이 중국의 참전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묘사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2008년 방북과 2010년 6·25전쟁 60주년 행사에서 시 주석은 동일한 발언을 했지만 이번에만 부각되었다. 이 정부에 와서 주목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과거 어떠한 중국 지도자도 중국의 참전을 정의로운 전쟁으로 칭송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여기서 우리는 시 주석이 우리 역사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다. 2017년 4월 그가 미국에서 가진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한반도(의 역사)가 중국의 일부라고 발언한 이유를 가늠할 수 있겠다.
시진핑의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왕이 외교부장의 방한 동안에도 우리 국민의 자존심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한·중 외교장관회담 종결 직후 중국외교부가 홈페이지에 회담 결과를 ‘10가지 공동인식’의 제목으로 먼저 올린 사건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외교부의 보도 자료에는 ‘10가지 공동인식’ 중 두세 개만 선별적으로 포함되었다. 이에 대한 외교부의 변명은 더 궁색했다. "일부러 뺀 게 아니라, 각자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달라 생긴 차이"라고 했다. 중점을 두는 부분이 다를 수 없다. 중국의 자료에 의하면 양국이 ‘상정(商定, 상의하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런 외교부의 해명이 안일하다고 들릴 수밖에 없는 것은 10가지의 공동인식 내용이 중국의 요구에 의해 이뤄진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가령, 세 번째 결정사항이 한·중 외교안보전략대화(2+2)를 시작하자는 것이었다. 대화의 수준이 장관급인지 차관급인지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한·중 양국 간에는 이미 외교안보대화 기제가 존재한다. 2013년과 2015년 두 차례 개최된 바 있다. 중단된 것이 재개될 뿐이다.
그런데 중국 측의 문헌에 이를 시작(启動)하자고 발표한 것은 상당한, 고도의 전략적 의미를 내포한다. 재개의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측의 의견이 수용되었다면 재개가 되어야 한다. 중국이 한·미관계를 견제하겠다는 의사가 담긴 대목이다. 이 세 번째 사항에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언급됐다. 양국 간 해양실무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단순히 불법조업과 어업협정을 논의하자는 목적이 아니다. 이미 이를 협의하는 기제가 운영 중이기 때문이다. 중국이 우리와 해양 분야에서 실무회담을 하자는 의도와 목적을 간파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우리 외교 당국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했을 공산이 크다.
우리 국민을 더 비참하게 만든 것은 왕이가 일본 방문에서 일본 외무상에게 제안한 협력사안 때문이다. 그의 제안은 우리 측에 제안한 것과 차원이 달랐다. 그는 중·일 양국이 경제무역투자, 서비스무역, 에너지 절감 및 환경보호, 전자상거래, 의료서비스, 재난방지, 디지털경제, 녹색발전, 지방 간의 교류, 기후변화 등의 영역에서 서로 이익을 보게 협력을 확대하자고 했다.
이에 일본 외무상 모테기 도시미쓰는 고위급 왕래와 소통을 유지하면서 양국 간 의회 교류의 재개, 경제무역외교 당국의 협상과 안보대화의 재개, 양국의 관광업, 의료서비스, 에너지 절감 및 환경보호, 농산품무역, 기후변화 등 분야에서의 협력 확대 등에 동의했다. 우리와는 한·중 경제무역과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에 집중한 것에 비하면, 일본과는 실로 글로벌한 이슈들이 논의됐다.
더 어이가 없는 것은 그의 방문 목적이 미·중 갈등과 관련 있다는 시각을 제시한 기자의 질문에 세계에는 미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일축한 발언이다. 그러면서 우리더러 독자적이고 자주적인 나라니까 잘 알아서 행동하라는 함의를 담은 경고성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그의 발언은 매우 모순적이다. 독립자주적인 나라로서 우리가 주권이익을 위해 취한 결정에는 중국이 제재를 취하는 행위에 반문하고 싶게끔 만드는 대목이다. 그야말로 병 주고 약주는 언행이다.
그런데 더 답답한 것은 왕이가 문 대통령에게 “(시진핑의)국빈방문 초청에 감사하고 여건이 허락될 때 방문하고자 한다”고 한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통령은 그가 언급한 ‘여건’을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는 대로”로 해석한 것이다. 그야말로 동문서답한 격이다. 역지사지의 지혜가 필요한 대목이다.
시진핑의 입장에서는 그의 발이 한국 땅에 닿는 순간 사드 문제의 해결을 선언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우리는 ‘손에 코 안 데고 코 푼 격’이다. 중국에 주는 것 없이 문제 해결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보다 더한 금상첨화의 결과는 없다. 이런 결과를 시진핑은 중국공산당에 어떻게 해명할 수 있을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국익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현실은 중국이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한 모두를 제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반도 전체를 통제하려는 중국의 야욕에 냉철하게 대응해야만 하는 시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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