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데뷔전에서 US여자오픈(총상금 550만 달러·60억875만원) 트로피와 함께 올해부터 명명된 미키 라이트 메달을 목에 걸었다. 역사상 다섯 번째 데뷔전 우승이자, 한국 선수가 들어 올린 11번째 트로피다.
USGA가 주관하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2020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 제75회 US여자오픈이 순연된 마지막 날 최종 4라운드가 14일(한국시간)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위치한 챔피언스 골프 사이프러스 클럽 크리크 코스(파71·6731야드)에서 재개됐다.
전날 아침 대회장에는 낙뢰를 동반한 폭우가 내렸다. 이에 USGA 경기위원회는 선수 보호 차원에서 여러 차례 연기 후 대회 순연을 결정했다. 월요일까지 US여자오픈이 이어진 것은 2009년 이후 11년 만이다.
모든 선수들은 아웃코스에서 출발했다. 4언더파인 시부노 히나코(일본), 3언더파인 에이미 올슨(미국), 1언더파인 모리야 쭈타누깐(태국)이 챔피언 조로 편성됐다. 세 명 모두 전반 9홀까지 점수를 줄이지 못했다. 동반 하락이다. 반면, 김아림, 고진영(25), 박인비(32)는 순위표를 성큼성큼 올라갔다.
챔피언 조가 11번홀(파4)을 마쳤을 때가 전환점이었다. 선두였던 시부노는 보기 4개(2·7·10·11번홀)를 범해 이븐파로 밀려났다. 자꾸만 왼쪽으로 감기는 샷에 '신데렐라 스토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올슨은 한 타, 모리야는 두 타를 잃었다.
한국 선수들은 추격의 고삐를 당겼다. 김아림과 고진영이 한 타를 줄이며 이븐파로 시부노와 공동 2위에 위치했다. 2언더파로 선두인 올슨과는 두 타 차인 상황. 16번홀(파3)에서 플레이하던 김아림이 티잉 그라운드에서 호쾌한 스윙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잘못 쳤던 것일까, 아니었다. 정타에 대한 확신이었다. 핀과 가까이 붙었다. 부드러운 퍼트와 함께 버디. 한 타 차로 올슨을 추격했다.
17번홀(파4) 김아림이 또다시 힘을 냈다. 두 번째 샷을 완벽하게 깃대에 붙였다. 탭인 버디. 올슨과 어깨를 나란히했다. 동시간대 13번홀(파5)에서는 흐름이 끊겼던 시부노가 첫 버디를 적었다. 1언더파로 전환을 시도했다.
마지막 홀인 18번홀(파4). 김아림의 두 번째 샷이 깃대에 붙었다.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던 김아림이 그린으로 걸어가며 마스크를 내렸다. 현지 중계진은 그의 우승을 예측하듯 오랜 시간 얼굴을 비추었다. 부드러운 퍼트와 함께 버디. 김아림은 공을 집으러 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최종 4라운드 버디 6개, 보기 2개를 엮어 4언더파 67타, 최종 합계 3언더파 281타를 기록한 김아림은 올슨의 잔여 홀을 지켜봤다.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그는 "마지막 3홀 티잉 그라운드가 당겨져 있었다.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버디 3개를 기록했다"며 "아직 경기가 진행 중이라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기다리면서 캐디백에 휴대전화를 빠뜨리기도 했다.
올슨은 16번홀에서 보기를 범했다. 결국, 김아림이 US여자오픈을 제패했다. 생애 첫 출전에 트로피를 품에 안고, 메달을 목에 걸었다. 우승 상금은 100만 달러(10억9250만원), LPGA투어 시드는 1년(비회원)을 받았다. 10년 동안 이 대회에 출전할 수 있는 권리는 덤이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투어에서 통산 2승(2018년 박세리 인비테이셔널, 2019년 문영 퀸즈 파크 챔피언십)을 거둔 김아림은 운이 좋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예선이 폐지되면서, 세계여자골프랭킹(롤렉스랭킹) 50위까지 초청되던 자격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롤렉스랭킹 94위였던 그는 생애 처음 출전 자격을 받았다.
우승이 확정된 직후 가족과 함께 화상 통화를 통해 인사를 나누었다. 그는 부친에게 "영혼을 담아서 축하해줘", "아빠 미안 이따 연락할게"라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상식에서 제75회 US여자오픈 우승자 김아림의 이름이 호명됐다. 그는 트로피를 받아 들고 환한 미소를 보였다. 인터뷰에서는 "3라운드 경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오늘은 공격적인 플레이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대로 됐다"고 이야기했다.
이어 그는 "일찍 도착한 만큼 준비하는 시간이 많았다. 얼떨떨하다.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을까"라고 덧붙였다.
김아림은 어린 시절 왈가닥에 말썽꾸러기였다. 사고를 치는 만큼 호기심이 많았다. 처음 골프채를 쥔 것은 초등학교 5학년, 김효주(25) 등 쟁쟁한 경쟁자들에 비해 늦게 시작했고, 재능도 뒤떨어졌다.
초·중·고를 거치며 국가대표를 꿈꿨다. 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효주 등 국가대표가 된 선수들이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훈련을 받을 때 노동에 가까운 비과학적인 훈련을 했다. 모든 것이 늦었다. 골프에 필요한 훈련법이 있다는 것도 2014년 말에 알았다. 그야말로 낙제생이었다.
뒤처진다는 생각에 자신을 분석하고 연구해 단점들을 뽑아냈다. '산만하게 하는 것을 멀리하고, 나에게 집중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더니 성적이 좋아졌다. 2015년 드림투어 4승으로 2016년 정규투어에 진출했고, 정규투어 2승에 이어 US여자오픈 첫 출전에 트로피를 거머쥔 것이다.
이 대회에서 첫 출전에 트로피를 들어 올린 선수는 총 5명이다. 김아림은 초대 챔피언인 패티 버그(1946년), 캐시 코닐리어스(이상 미국·1956년), 김주연(39·2005년), 전인지(26·2015년)에 이어 다섯 번째 기록자로 등극했다.
한국 선수로는 11번째 우승이다. 1998년 국내 정세가 어지럽던 시절 '맨발 투혼'으로 국민들에게 힘을 주었던 박세리(43)를 시작으로 김주연, 2008·2013년 박인비, 지은희(34·2009년), 유소연(30·2011년), 최나연(33·2013년), 전인지, 박성현(27·2017년), 이정은6(24·2019년)가 10승을 쌓았다.
올해는 코로나19 확산으로 국내를 포함한 세계정세가 어지러운 상황이다. 이번에는 마스크를 쓴 김아림이 마스크를 쓴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용기를 불어넣었다. 22년 전에 이어 또다시 저 멀리 미국 땅에서 말이다.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내 플레이가 누군가에게는 희망과 에너지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한편, 롤렉스랭킹 1위 고진영은 2언더파 282타로 올슨과 나란히 2위에 올랐다. 시부노는 1언더파 283타 4위, 메간 강(미국)은 1오버파 285타 5위에 위치했다. 박인비와 타이틀 방어에 나섰던 이정은6는 2오버파 286타 공동 6위로 대회를 마쳤다.
이날 66명 중 언더파를 기록한 선수는 총 6명(김아림, 고진영, 이민영2, 박인비, 앨리 유잉, 아마추어 가브리엘라 루펠스)이다. 그중 4명이 한국 선수다. 한국 낭자들은 두둑한 '뒷심'으로 US여자오픈이 '우승 텃밭'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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