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너 너나, 네 글자만 알면 돼
1975년 1월 1일 류영모는 '다석일기'를 멈췄다. 그해 10월호 '성서신애' 206호에 주필 송두용이 이런 글을 실었다.
"어느 날 류영모 선생님을 방문하였더니 선생님은 생시에 꿈을 꾸셨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신문회관을 찾아가다가 차중에서 갑자기 생각이 바뀌어서 원효로 종점에서 내렸다. 어찌된 일인지 몰라 다시 버스로 돌아오다가 무슨 생각으로 남대문에서 내려 걸어서 구기동 집까지 오니 거의 하루해가 소비되었다. '나는 분명히 깨어 있으면서 꿈을 꾸었어요. 이것이 꿈 아닌 꿈이 아니고 무엇이요'."
1976년 8월 30일, 제자 박영호는 류영모의 마지막 말씀을 들었다.
"나는 나라 하고, 하느님을 너라고 하였을 때 나를 하느님 너 속에 바쳐서 넣으면 하느님께서 너가 나아지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나너 너나'입니다. 나와 너는 나너(나누어)지는 것인데 여기서는 나너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
류영모는 '생명'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天命是性命(천명시성명) 천명은 성명이며
(하늘이 내린 명령은 하느님과 같이 되라는 명령이며)
革命反正命(혁명반정명) 혁명은 정명으로 되돌림이며
(그 명령을 바꾸는 것은 바른 명령으로 되돌리는 것이며)
知命自立命(지명자립명) 지명은 스스로 입명함이며
(그 명령을 깨닫는 것은 스스로 하느님의 명령을 세우는 것이며)
使命必復命(사명필복명) 사명은 반드시 복명함이다
(그 명령을 행하는 것은 반드시 하느님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대개 생명을 '생물의 목숨'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生命(생명)이라는 말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태어나는 것(生)과 죽는 것(命)이 결합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죽는 것이 '명령'의 의미인 '명(命)'이라는 말로 쓰인 까닭은, 죽음이란 것이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조물주 혹은 창조주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류영모가 밝힌 '하느님에게로 가는 길'
류영모의 시 '생명'은, 이 점을 뚜렷이 밝히고 있다. 무릇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는 신의 명령을 받는다. 첫째는 하느님과 같이 되라는 명령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에게 생명을 준 것은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명령이라고 봤다. 이것이 천명이다. 천명을 부지런히 그리고 꾸준히 생각하고 실천함으로써 그 생명의 의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천명을 다 하는 일이다. 둘째 하느님의 명령이 실천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때는 가차없이 바른 명령으로 되돌려야 한다고 했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말했다. 정치사회적인 개념의 '혁명' 또한 그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류영모가 기존의 사상과 신앙이 지닌 오류에 대해 과감히 바로잡고 옳은 길을 향해 나아가자고 YMCA 강의에서 부르짖은 까닭도, 혁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셋째, 올바른 명령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궁구(窮究)하고 그 참을 스스로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하느님의 명령을 오직 자율로 세우는 것을 그는 '참지혜'라고 보았다. 평생 하루 한끼로 육신을 정갈히 하면서 무릎을 꿇고 나아가고자 했던 길이 바로 지명(知命, 하느님의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이었다.
넷째, 생명의 완결인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하느님의 명령을 받은 인간이 다시 하느님의 명령 속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생명이 해야할 가장 중요한 미션이 바로 '제대로 복귀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으로 태어나, 결코 회피할 수 없는 긴박하고 절실하며 유일한 사명이다. 생명의 길은 바로 그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천로역정(天路歷程)이다. 류영모의 시, '생명'만 날마다 읽고 그 실천에 제대로 마음을 기울이기만 해도, 신의 명령대로 사는 길을 그대로 갈 수 있다. 그는 한 편의 시 속에, 생명의 길에 대한 안내도를 진북(眞北)의 별처럼 아로새겨 놓았다.
함석헌 부인 장례식, 류영모 추도의 말
1977년 여름에 안병무(安炳茂)가 내는 잡지 '현존(現存)'의 주간 송기득(宋基得)이 류영모를 탐방하였다.
"선생님 말씀 한마디 들려 주세요."
"말씀 그쯤 쉬어."
"세상이 어찌 이 꼴입니까?"
"두어 둬요."
"사는 게 무엇입니까?"
"이 밖에 별 게 있을 리가 있나 모를 일이야."
1978년 5월 10일 함석헌 부인 황득순(黃得順)의 장례식에 류영모가 참석하였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추도의 말씀을 해 달라고 말했다. 류영모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여기 서서 말씀 한마디 하라고 합니다.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말씀이란 건 사람이 하느님께 얻어서 하느님 뜻에 맞는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여기 마침 지나다가 역시 하느님께 맞는 말씀을 한마디 이 앞에 해 드리고 지내가자는 뜻입니다. 그걸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대단히 어렵습니다. 이렇게 말씀해서 우리 아버지 말씀을 한마디 드린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내고자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이랬든 저랬든 여기서 지낼 동안에 하느님이 들으시면 어떠하실까? 하느님이 들으시기에 마땅한 말씀을 '이 사람이 얻어서 드리는 말씀으로 되어지이다' 하고 지나가고자 하는 바입니다. 아멘."
1980년 3월 13일. 류영모의 90세 생일이었다. 제자 박영호가 구기동 자택을 찾았다. 류영모는 널판 위에 꿇어앉아 있었다. 생불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박영호는 그 앞에 방석을 깔고 꿇어앉았다. 한마디 대화도 없었다. 일어나면서 박영호는 말했다. "오늘이 선생님 90회 생신 날입니다." 류영모는 귀에 손나팔을 하고 들으려고 했다.
저쪽에는 부인 김효정이 중태로 사람이 온 줄도 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둘째 며느리 유윤용이 조용히 설명을 했다. "온종일 가도 말씀이 없으십니다."
박영호가 일어섰을 때 스승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이렇게 꼭 막히었는지 나고 드는 것을 도무지 몰라. 알 수 없어요. 저 얼굴(아내)이나 이 얼굴(박영호)이나 많이 낯익은 얼굴인데 도무지 시작을 알 수 없어요. 모를 일이야. 참 알 수 없어."
9억번의 숨을 쉬고 멈춘 류영모
7월 31일 부인 김효정이 87세의 나이(1893년 5월 17일생)로 세상을 떠났다. 류영모는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상태였다. 마루에서 밤을 지키는 조문객들을 보고 "왜 돌아가지 않으시오"라고 물었다. 김효정의 장례는 함석헌이 주재를 했다. 다른 의식(儀式) 없이 묵념의 기도만 했다. 함석헌은 류영모를 장흥의 신세계 공원묘지에 모시고 갔다. 홍일중의 승용차를 이용했다. 돌아올 때는 박영호가 구기동 자택으로 모셨다. 박영호가 집을 나서자 "가시겠소? 잘 가시오"라고 말을 하였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187일 뒤인 1981년 2월 3일 오후 6시 30분에 류영모는 91년 입은 세상의 몸옷을 벗었다. 90년10개월23일. 날수로 3만3천200날을 살았다. 약 9억번의 숨을 쉬고 멈췄다.
류영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마지막을 거룩하게 끝내야 끝이 힘을 줍니다. 끝이 힘을 준다는 말은 결단하는 데서 힘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끝이란 끊어 버리는 것으로 몸과 맘으로 된 나(自我)는 거짓이라고 부정하는 것입니다. 끊어 버리는(부정) 데서 정신이 자랍니다.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생명의 찰나 끝에 생명의 꽃이 핍니다. 마지막 숨 끝 그것이 꽃입니다. 그래서 유종지미(有終之美)라 합니다. 마지막을 꽃처럼 아름답게 끝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지막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이 마지막 끝을 내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끝이 꽃입니다. 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끝이요 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엄숙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순간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할딱 숨 너머 영원한 숨이 있습니다
속은 넓어지며 우리 꺼풀은 얇아지니
바탈 타고난 마음 그대로 왼통 올려
속알 굴러 깨쳐 솟아 날아 오르리로다
<류영모의 시>
하늘나라에 가는 것에 대해선 이렇게 역설했다.
"참나를 알아야 하늘나라를 알아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몸생명은 가짜 생명입니다. 우리는 참 생명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통히 몸생명으로 좀 더 오래 살 수 없을까 하고 궁리합니다. 잠도 안 잤으면, 죽지도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나는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도 있어야 하고 밤도 있어야 합니다.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딱 숨을 쉬어야 사는 몸은 참 생명이 아닙니다. 이 할딱 숨 너머 영원한 숨이 있습니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됩니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을 뽑았으면 죽는 것입니다. 집을 지었으면 그 속에 드는 것입니다. 니르바나에 드는 것입니다. 생각의 실을 다 뽑기까지는 살아야 하고 실을 다 뽑으면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려는 맘은 버려야 합니다. 무(無)에서 와서 무(無)로 가는 것 같아서 허무를 느끼는데 무가 무가 아닙니다. 신정(新正)의 새시대입니다. "
류영모는 생전에 화장을 바랐지만, 유족의 뜻에 따라 장흥 신세계 공원묘지에 묻혀 부인과 합장을 하게 됐다. 아들 류자상은 "아버님의 사상은 제자들이 이어받더라도 아버님의 유해만은 자식들에게 맡겨달라"고 청했다. 류영모와 김효정의 묘는 수난을 겪는다. 1998년 장흥지구의 대홍수로 산사태가 나서 신세계 공원묘지의 분묘가 유실됐다. 9월 17일 유가족이 천안 병천에 있는 풍산공원묘지로 옮겼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하느님을 내가 부릅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맘에, 아무것도 없는 내 속에 있습니다. 과대망상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생각하여서 찾아야 합니다. 믿는 이는 이것을 계속 믿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생각은 나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하느님 아버지를 생각하는 성령이 끊임없이 오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큰 성령(하느님)이 계셔 깊은 생각을 내 속에 들게 하여 주십니다. " (류영모 어록)
숨을 끝으로 내쉰 것이 죽음
류영모는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긴 한시를 남겼다. 명쾌하고 유려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는 철학시(哲學詩)다. 표현 하나하나가 생명의 정수를 담아낸다. 필자가 그 뜻을 종잡아 풀어보았다.
大塊能變如常 小我執着欲常逢變乖常(대괴능변여상 소아집착욕상봉변괴상)
우주는 변할 수 있음으로 한결같은데
인간은 한결같음을 붙잡고 있다가 바뀜을 만나 한결같음에서 이탈했다
呼吸代謝百年九億 吸始以生呼終而死 一生一死不外氣息之頭尾也(호흡대사백년구억 흡시이생호종이사 일생일사불외기식지두미야)
내쉬고 들이쉬는 숨의 오가는 일이 백년간 9억번이다
처음 들이쉰 것이 삶이요 끝으로 내쉰 것이 죽음이다
나고 죽는 것은 숨쉬는 일의 처음과 마지막일 뿐이다
一吸無常恍兮反呼 一呼非常惚兮復吸(일흡무상황혜반호 일호비상홀혜부흡)
첫숨 들이쉴 때 무상하게 황홀하여 도로 내쉬고
첫숨을 내쉴 때 비상하게 황홀하여 다시 들이쉰다
一息之間可見生之無常命之非常 一呼一吸卽生命之左右也 呼吸死生 各二極而反復(일식지간가견생지무상명지비상 일호일흡즉생명지좌우야 호흡사생각이극이반복)
한 번 숨쉰 사이에 삶의 무상함과 죽음의 비상함을 볼 수 있구나
한 번 내쉬고 한 번 들이쉼은 곧 생명을 좌우하는 것이다
내쉼과 들이쉼, 죽음과 삶, 각각 두 끝이 반복되는 것이다.
氣息生命自中正而剛健 中正之謂常知常之謂道 一陰一陽謂之道(기식생명자중정이강건 중정지위상지상지위도 일음일양위지도)
힘차게 숨쉬는 생명은 스스로 중정中正이 되어 강건한 것인데
중정中正을 일러 상(常, 한결같음)이라 하고 상을 깨닫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한 번 음이 되고 한 번 양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
釋生命曰 無常生非常命 知常處中於東於西無非生命(석생명왈 무상생비상명 지상처중어동어서무비생명)
생명을 풀이하면 한결같음이 없는 것이 삶이요 한결같음이 아닌 것이 죽음인데,
한결같음을 깨닫고 가온(中)에 처하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하느님 명령 아닌 것은 없도다
[ 그림 읽기 : 다석 류영모 초상화 - 석도(夕濤) 유형재]
석도 유형재(兪衡在, 1955~ )는 10대 때부터 붓을 잡은 대전 출신의 서예가로 국내 10대 서예가로 손꼽힌다(서법예술사 선정). 그는 다양한 서법(書法)뿐 아니라 탄탄한 한학 실력까지 갖춰 시서화(詩書畵)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전통적으로 글씨와 그림은 뿌리가 같기(書畵同源) 때문일까. 그는 10여년 전부터 인물화에 손을 댔다. 인물화에도 묘하게 자신의 뿌리인 서법이 드러난다. 진한 먹을 바탕으로 윤곽을 강조하면서 속도감 있게 인물을 묘사한다. 그는 글씨를 쓰고 있는 추사 김정희의 모습을 담은 '완당집필도'를 비롯해, 왕희지 같은 서예 대가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기도 했다.
유형재는 류영모 제자 박영호를 만나 이런 말을 했다. "글씨는 진리(道)를 담을 그릇인데 진리를 모르고 글씨만 쓰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이 말을 듣고 박영호는 유형재의 서실에서 6년간 다석사상 강좌를 열게 됐다.(1990년부터 1995년까지) 유형재는 연초서(連草書, 이어서 쓰는 초서 글씨)를 즐겼는데, 일필휘지하면 붓끝이 종이 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글자들이 한 글자인 것처럼 흐르며 쓰여진다. 박영호는 이 글씨를 보며 세상의 사람들이 한 '얼'로 꿰뚫린 모습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유형재는 먹냄새가 짙게 밴 듯한 류영모 초상화를 그렸다. 동서양의 신학과 종교를 회통(會通)한 류영모를 잘 드러내고 있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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