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과 기원후. BC와 AD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서력기원(西曆紀元, 줄여서 서기(西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개념이다. 525년 스키티아 출신의 연대사가(年代史家)이자 신학자인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Dionysius Exiguus)가 교황 요한 1세의 명을 받아 저술한 '부활제의 서(書)'에서 처음 썼으며 9세기 샤를마뉴 시대 이후 서양에서 보편화됐다. 인류역사의 서양식 연대(年代) 표시의 기점인 '서기'를 우리나라가 공식 채택한 것은 1962년이다. 그 이전엔 단군기원(단기)이었다.
지금은 세계 거의 모든 국가가 연대표시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서기'는, 예수 복음의 광명이 지구촌 전체에 퍼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이후 진행된 글로벌화는 역사를 기산(起算)하는 동일한 기준을 필요로 했고, 서구 문명의 확산 형식으로 통합되어 온 세계는 인류의 시간을 '서기'에 맞췄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예수의 시간'을 살게된 셈이다. 그 복음(福音)의 스케줄 속에서 나날이 숨쉬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삶의 시간들이 예사롭지 않아진다.
BC는 before Christ(그리스도 이전)의 줄임말이며 AD는 Anno Domini(그리스도의 해라는 뜻의 라틴어)의 약어다. 원래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는 AD인 안노 도미니란 표현만을 시했다. 이후 AD 이전의 연도를 표현할 말이 필요하면서 BC란 말이 등장했다. AD만 라틴어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사용된 시차 때문으로 보인다.
이 기준에 따르면 예수는 AD 1년에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신약성경 4대복음(마태, 마가,누가,요한)에는 예수가 탄생한 구체적 연도가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태어나는 때가 헤로데왕이 다스리던 시대라고 기록되어 있다. 유대왕국의 마지막 왕조를 열었던 헤로데는 BC 37년 ~ BC 4년이 재위기간이었다. 두 복음서를 믿는다면 예수는 BC 4년 이전에 태어났어야 한다.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복음을 펼치는 서른 살 무렵이 로마황제 티베리우스가 집권한지 15년이 된 때라고 말하고 있다. AD 28년이다.
예수가 복음을 펼친 때의 나이가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지 않은 점을 감안한다면, 32세로 잡았을 때 누가복음의 두 기록의 사실성이 충족될 수 있다. BC 4년에 태어나, 32세인 AD 28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서의 기록은, BC와 AD가 잘못 기산되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예수가 태어난지 4년 뒤를 우리는 '그리스도의 해'라고 인류 문명의 시계를 맞추고 있는 셈이다.
2012년 전임 교황이었던 베네딕토16세가 이 오류를 인정한 책('나사렛 예수, 유년기의 기록')을 냈다. 예수는 서기 1년에 태어나지 않았으며 그 몇 해 전에 탄생했다고 밝힌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탄생 연도에 착오가 생긴 까닭은 BC와 AD를 도입한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계산을 잘못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012년 교황 "예수 탄생 연도가 틀렸다" 인정
그런데, 누가복음의 기록은 과연 믿을만한가에 대한 의문제기도 있다. 이 복음서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칙령으로 인구조사가 진행됐고 예수의 부모가 자신들의 호적지인 베들레햄으로 돌아갔다가 예수를 마굿간에서 낳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아우구스투스의 인구조사는 AD 6년에 시행됐다. 그렇다면 예수는 AD 6년 이후에 태어나야 한다.
학자들은 누가복음의 이 대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AD 6년 이후에는 헤로데왕도 없었고, 복음을 펼치는 시기가 22세가 되어 서른 살 무렵이 되지 않는다. 누가가 이런 무리한 얘기를 넣은 까닭은, 다윗이 난 베들레햄과 예수를 연결시켜 '다윗의 왕 예수'라는 혈통적 숭배를 자아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있다. 기록의 상충이 있지만, 학자들은 AD 4년경 예수 탄생을 정설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는 AD 4년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일까. 우리가 크리스마스(성탄절)라 부르는 12월 25일이 공식적인 기념일이 된 것은 AD 339년이다. 로마제국은 313년 기독교를 공인했고 336년에 12월 25일을 예수탄생 기념일로 정했다. 그 이듬해 이 날을 공식화한 것이다.
교부 히폴리투스가 예수 탄생일 첫 언급
로마제국이 이 기념일을 정하기 이전에도 예수 탄생을 기리는 날이 있었다. 1월 6일이었다. 이 날은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라고 부르는 날로, 예수가 서른번째 생일에 세례를 받고 신의 아들로 공증을 받았던 날(공식적으로 등장했다 해서 공현(公現)절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날은 또 3인의 동방박사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났던 날이기도 하다. 유럽에서는 이 날을 12일제(祭)라고 부른다. 예수가 탄생한지 12일째 되는 날이란 의미다. 1월 6일에서 12일을 빼면, 12월 25일이 나온다.
예수 탄생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한 사람은 초대 교부로 일컬어지는 히폴리투스(170~235)다. 그는 춘분인 3월 25일 수태고지가 있었고, 9개월 뒤인 12월 25일 예수가 탄생했다고 했다. 12월 25일을 가리켜 1월 1일에서 거슬러올라 8번째 되는 날(1, 31 , 30, 29, 28, 27, 26, 25)이라고 표현했다. 수태고지가 잉태한지 한달 정도가 되었을 때 이뤄진 것이라면, 인간의 대체적인 회임기간인 10개월이 된다. 주현절을 12일제로 불렀던 것도, 히폴리투스의 탄생일 추정 이후에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히폴리투스가 내놓은 이런 날짜의 근거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복음의 기록이 전하고 있는 가장 명시적인 날짜는 예수가 처형된 날과 그 사흘 뒤인 부활한 날이다. 처형일은 유월절(逾越節) 첫날인 금요일이었다. 유월절은 유태의 최대명절이다. 출애굽기에 그 내용이 나온다. 신은 이집트가 히브리인 노예를 풀어주도록 하기 위해 이집트에 10가지 시련을 내린다. 그중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첫 아이와 가축을 죽이는 것이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에게 문간에 어린 양의 피를 발라두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그냥 지나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유월(逾越, Passover, Pessah, 죽음의 신이 지나감)절이 된다.
예수 처형일과 부활일은 성서에 명시
예수의 시대에도 유태인들은 유월절을 신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보내고 싶어했다. 예수가 체포되고 처형된 때는 유월절 기간이었다. 예수가 제자들과 열었던 최후의 만찬 또한 유월절 식사였다.(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앉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누가 22:15)) 요한복음은 로마총독이 매년 유월절을 맞아 유대인 죄수 1명을 풀어주는 관행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중은 예수가 아니라 정치혁명가였던 바라바를 외쳤다. 고리도전서(5:7)에는 초기 기독교도들이 예수를 '유월절의 어린 양'이라고 불렀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피가 죽음의 사자를 지나가게 했다는 의미다.
유월절 날짜는 레위기 23장에 나와 있다. 성력(유태 달력)으로 1월14일이다. 성력은 매년 9~10월에 신년이 시작된다. 이에 따르면 올해(2020년) 유월절은 4월8일에서 16일까지였다. 부활절은 서구 교회에서 춘분 당일 혹은 춘분 직후의 보름날 다음 첫번째 일요일로 정해놓았다. (325년 로마제국 니케아공의회가 이를 결정했던 해의 춘분은 3월 21일이었다.) 대개 3월22일부터 4월25일 사이다. 유태 달력으로만 따지면, 부활절은 유월절 이틀 뒤다.
올해는 4월12일이 부활절이었다. 4월 12일 부활을 했다면, 예수는 4월 9일에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올해의 경우라면 예수는 유월절 첫날인 4월 8일 저녁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진 뒤 이튿날 9일 죽음을 맞은 셈이다.
초창기엔 부활절이 3월 25일이었다. 이 날은 춘분 날이며 수태고지일과 같은 날이다. (2020년 춘분은 3월 20일이다) 춘분은 태양의 중심이 적도 위를 똑바로 비추는 날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고 추위와 더위가 같다.춘분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날 성모는 수태고지를 받았고, 예수는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했다. 이 날을 3월25일로 잡으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의 날짜가 나오게 된다. 예수는 BC 4년 12월 25일에 태어나 AD 28년 3월 23일에 죽음을 맞았다.
수태고지 날짜와 부활일이 같은 까닭
물론 순교일은 성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실적인 추론이 가능하지만, 탄생일은 그야 말로 추정일 뿐이다. 부활한 날짜와 수태고지를 한 날짜를 맞춘 것은 유태인들의 믿음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선지자나 예언자가 잉태된 날에 죽음을 맞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에 맞춰 태어난 날짜가 정해질 수는 없다.
로마제국이 당시 채택했던 율리우스력으로 12월 25일은 동지였다. 일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이었고 어둠이 짙은 날이었다. 그리스도의 도래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의미를 뚜렷이 드러낼 수 있는 상징성을 지닌 날짜였다. 다른 정치적인 의미도 있었다.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는 것은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는 국가로서의 빅 픽처 안에 있었다.
12월 25일은 태양신을 우러르는 고대 로마의 기념일이기도 했다. 274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솔 인빅투스(정복되지 않는 태양)이란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로마에 세웠다. 그는 12월 25일을 태양신에게 경배하는 태양절로 선포하기도 한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1년 매주 하루를 교회에 가는 예배일로 삼으면서, 그 날을 태양의 날(일요일)이라 불렀다. 이런 정치적인 의도들이 뒤섞이면서 12월 25일은 의심할 나위 없는 그리스도의 날이 되어왔다.
12월 25일은 로마의 태양절
물론 역사적 사실에 의거한 '그 날'이면 좋겠지만, 시간에 대한 기억과 기록과 기준들이 달라져 있는 지금, 이 일을 바로잡는 일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리고 예수가 오신 날보다 예수가 다시 오신 날이 인류에게 훨씬 중요할 것이다. '부활'이야 말로 지금 안노 도미니(Anno Domini)를 살고 있는 우리가 영적으로 거듭나는 길을 제시한 인류 최고의 간증이기 때문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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