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공포는 어디서 오는가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하여 제한되어 있는 인생의 한 소부분을 전인생이라고 해석하는 데서 생긴다." 톨스토이의 이 말은, 태어난 모든 인간이 지닌 치명적인 문제의 진상을 밝힌 탁월한 성찰이다.
죽음을 왜 두려워 하는가. 인생에 대해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제한되어 있는 인생의 한 소부분'은, 우리가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생이다. 이것을 인생의 전부라고 보는 시선이 왜 잘못인가. 우리가 태어나서 죽는 그 사이에 있는 인생은, 오직 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몸이 태어났고 몸이 죽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 말고 또 무엇이 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죽음의 공포는 '몸의 삶이 끝나는 것에 대한 공포'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몸이 전부가 아니라면, 죽음 또한 전부의 죽음일 수 없으며 죽음이 아닐 수도 있다. 바로 이 문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몸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데서 온다. 톨스토이는, 몸의 삶이 인생의 소부분이라고 단언했다. 몸의 삶과 일시적으로 동행하는 다른 삶이 있다. 몸의 삶이 철저하게 시간에 속한 것이라면, 다른 삶은 시간을 초월한 것이다. 몸의 삶이 생멸을 겪는 상대세계의 것이라면, 다른 삶은 상대세계 너머에 있다.
몸의 삶 속에 다른 것이 들어와 있다
그 다른 삶을 뭐라고 말해도 좋다. 몸의 삶에 깃든 영원한 무엇. 그것을 성령이라 부르든, 얼이라 하든, 하느님이라 하든, 생령(生靈)이라 하든, 또다른 무엇이라 말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왜 있는지, 그것이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오며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것은 우리의 몸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를 고양시키고 완전하게 하는 무엇이라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종교는 죽음이라는 육신의 멈춤 상태에 대한 충격과 허무를 직면하지 않기 위해 생겨났다고 여긴다. 톨스토이의 입장에서 말하면, 신이나 종교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육신이 아닌 영적인 감관으로 접한 무엇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표현한 것에 가깝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고안한 인간적 처방일 뿐이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개체적 죽음은 완전한 멸망'이라는 원초적 오해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인간이 만난 것이다. 인간 육신의 어떤 안테나가 인간 육신 너머의 거대한 질서와 규칙을 만난 것이다. 영성(靈性)은 시간적 존재인 인간의 불완전을 극복하게 하고 완전하게 한다. 동서양 인류가 오래전부터 기록해온, 절대적인 존재에 관한 면모는 인간이 불멸의 염원을 담아 그려놓은 신기루가 아니라 육신의 삶을 살면서 뜻밖에 접한 영적인 존재에 대한 끝없는 증언들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톨스토이를 믿는가.
톨스토이가 한 이 말은, 문득 생각난 김에 한 말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반복되어온 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오소이유대환자, 위오유신. 급오무신, 오유하환) 노자 도덕경 13장이다. "내가 크게 걱정이 있는 까닭은 내게 육신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육신이 없다면 내가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노자 또한, 인간의 많은 불안이 몸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갈파했다. 그러나 노자는, 그 불안의 원인이라고 여기는 육신이 사실은 인간 삶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다만, 인간이 본능적으로 육신을 사랑하는 맹목을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돌린다면 천하를 맡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다.
부활은 영성의 삶이다
톨스토이의 생각은, 정확하게 기독교 성경에서 왔다. 성경에선, 육신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말하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한복음 11장 25-26) 예수의 이 말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킨 말이기도 하다. 부활과 영생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신이 부활하고 육신이 죽어도 사는 것이고 영원히 죽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읽을 때, 2천년간 이 종교를 초현실적인 육신신앙으로 바꾼 그 혼선에 들어서게 된다.
예수는 신의 뜻을 전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의 육신을 오래 살리는 '장수의 과학'이나 죽음을 맞았을 때 다시 살려내는 '신의 의료'를 제안했을 수가 없다. 신은 인간의 필생과 필멸을 기획한 창조주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가 스스로의 창조원칙들을 깨며 그를 믿게 하려고 했다는 '인격신(인간의 캐릭터를 지닌 신)'의 발상은 결코 예수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 아닌가.
예수가 말한 부활과 영생은, 육신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야 맥락이 자연스러워진다. 즉 몸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몸이 죽어도 사는 게 있으며 몸의 죽음과는 상관없이 부활이 가능하며 살아있는 몸이 나를 믿을지라도 그 몸과 함께 있는 무엇이 너희를 영원히 죽지 않게 할 것이다. 이것을 믿느냐고 질문한 것이다. 불사와 부활과 영생은, 몸이 아니라 바로 영성의 삶이다. 톨스토이가, 몸의 삶과는 다르게 죽음을 겪지 않는다고 했던 그것이다.
인간 속의 신을 확고하게 말한 건 기독교뿐
기독교가 동양의 종교나 사상의 주류를 이룬 불교, 유교, 도교 등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본질을 이루는 차이를 말한다면, 인간에게 하느님이 들어와 있음을 확신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믿음의 체계를 구성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불교도 유교도 도교 속에도,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암시나 묘사는 있었지만, 인간 속에 들어온 신을 인간에게 직접 만나게 해주는 성서적인 기적을 프레젠테이션하지 않았다. 이 같은 생각을 쉽게 해내지 못한 까닭은, 상대세계(물질계와 현상계)에 존재하는 인간과 절대세계의 신이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접점을 지니는 것의 상식적 한계를 상대세계의 관점으로는 넘어설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점 때문에, 인간과 신의 사이에는 '애매모호하거나 어둑한 경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서양적 신관(神觀)이 그 경계를 뚫고 신과 인간을 소통하게 한 힘은, 고대 그리스로 대표되는 '인간의 거울인 신들의 세상'에 대한 상상력에 일정 부분 힘입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인간의 특징들이 그대로 투영된 신들은, 그들의 세계를 이루며 인간세계로 넘나들며 관계를 맺어나간다. 고대의 사유체계는, 신들의 개성을 뚜렷하게 함으로써 불가사의하고 예측불허의 미래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려 했던 것 같다. 유태인들은 알 수 없는 신에 대한 공포를 구약에서 '분노의 신'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예수가 지상에 옴으로써 분노의 신이 인간의 오해였음을 깨닫게 하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신은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며 자식처럼 귀하게 여기며 생명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구원할 대상으로 삼고 있다. 신에 대한 관점의 획기적 전환은 기독교를 인류의 신앙으로까지 확장하게 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
신은 왜 인간을 사랑하는가. 예수는 그 물음에 대해, 가장 놀라운 답을 주었다. 세상을 창조한 신은 인간에게 하느님 그 자신을 넣어주었으며 자기 속에 들어와 있는 그 하느님을 발견하라고 한 것이다. 예수는 스스로가 그 말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뚜렷한 모델케이스였다.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으나 자신 속에 하느님이 있음을 자각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냈다. 성서 속에는,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과 하늘이란 신성한 위치 속에 있는 하느님이 뒤섞여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의 내면에 절대세계의 신이 들어와 있을 수 있다는 관점을 열어준 점이다. 기독교가 인류를 감동시킨 핵심은 여기에 있다.
예수는 얼나를 증언하러온 얼나
예수 말하시기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人子)가 너희에게 주리니 아버지 하느님께서 도장을 찍으신 자니라."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한 6:27~29)
썩을 양식은 몸을 위한 양식이고 영생의 양식은 마음속에 들어와 있는 하느님인 얼나를 위한 양식이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이는 인자인 예수다. 예수는 하느님이 도장을 찍어 보증한 존재다. 천부(天符)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일을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예수는 명쾌하게 말해주었다. 얼나의 양식을 주는 존재이자, 얼나의 시범자(示範者)인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성서는, 인간 속에 '하느님의 얼'을 불어넣어준 예수를 믿는 일이 곧 하느님을 믿는 일이라고 설명해준다. 예수의 이 말은 인간에게 몸 이외에 영생하도록 있는 무엇이 깃들어 있으며 이것에 양식을 주는 일을 충실히 하라는 조언이다. 하느님이 도장을 찍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업인 예수는 바로 '인간 속에 든 얼나'다. 그 얼나를 부양하면, 예수와 같이 인자가 될 수 있으며 육신이 생을 멈추었을 때 하느님의 영생에 합일할 수 있다는 약속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들에게 말하노니 어떤 이라도 예외없이 위로부터 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는 예수의 말은 '위로부터 난다'는 표현으로 인간 육신의 탄생과는 다른 탄생을 말하고 있다. 아래로부터 나는 탄생인 몸생명에 비하여 성령의 생명이자 하느님 그 자체인 얼생명은 위로부터 난다고 했다. 이 얼생명의 탄생은, 몸생명과는 상관없는 생명이지만 몸생명 위에 다시 태어나는 부활임을 암시하고 있다. "몸으로 난 것은 몸이요, 얼(靈)로 난 것은 얼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요한 3:6~7)고 예수는 그 뜻을 분명히 한다.
류영모는 "피와 살을 가진 짐승인 우리가 개나 돼지와 다른 것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얼을 가졌다는 것 밖에 없다. 예수는 뚜렷이 하느님을 모시고 태초부터 자기가 모신 하느님이라 불렀다. 나도 이에 성령의 숨을 쉼으로 뚜렷이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답게 살겠다는 한마디만 하고 싶은 것이다."('다석어록')라고 하였다. 예수가 예수다운 것은 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나를 가르쳐준 데 있다. 류영모와 간디가, 예수를 '하느님'으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 모시고자 했던 까닭도 거기에 있다. 예수는 '얼나'의 앞길을 간 스승이기 때문이다.
기독교회가 예수라는 이름과 성경이라는 경전을 우리에게 건네주었지만, 그들은 핵심진리인 얼나를 제대로 전수해주지 못했다. 그야말로 '얼'빠진 종교를 전해줬다는 비판은 바로 거기서 나온다. 마태복음은 이 어리석음을 이미 경고하고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 7:21)
집필 = 이상국 논설실장
감수 및 자문 = 박영호 다석사상연구회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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