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公州)는 고려 태조 왕건이 최초로 명명한 지명이다.
공주(公州)는 본래 백제의 웅천으로, 문주왕이 한성에서 옮겨와 도읍했다. 성왕 때 이르러 다시 도읍을 남부여로 옮겼다. 신라와 당이 협공해 백제를 멸망시켰는데, 당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군대를 잔류시켜 진압했다. 당 군대가 돌아가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문왕때 웅천주로 고치고, 도독을 두었으며, 경덕왕때 또 웅주로 고쳤다. 태조 23년(940)에 지금 이름 공주로 바꾸었다. 『고려사』, 56권 지10 지리 양광도 공주
남한에서 세 번째로 긴 강 금강(1)*은 충남 공주시에서는 웅진강 또는 곰강으로 불린다. 공주강이라 하지 않는다.
‘백두산 이남부터 한라산 이남까지’란 말이 있는가? ‘백두산 이남부터 한라산 이북까지’ 해야지 정상 아닐까. 이병도와 그 후예 식민사학계는 차현이남, 공주강외를 각각 차령산맥이남과 금강이남으로 조작하고, 또 이를 충청 호남차별 또는 호남차별로 악용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 북쪽에 산을 등지고 남쪽의 강을 바라보는 입지를 뜻한다. 중국에서 장성외(長城外)는 만리장성 이북을 뜻한다. 성·산·강 외는 주로 북쪽을 뜻하고, 성·산·강 내는 남쪽을 의미한다. 성외는 북쪽을, 성내는 남쪽을 가리킨다. 공주강외(公州江外)는 다시 말하면 공주성 금강 북쪽을 가리킨다.
◆왜 공주강외(금강이북)인가
기마대장군 이흔암을 역모죄로 길거리에서 처형하여 시체를 버려 놓았다.
(馬軍大將軍伊昕巖, 謀叛棄市) 『고려사』 세가1권, 918년 6월 28일(음)
이는 태조 왕건이 고려 건국을 선포한 지 불과 10일째 되던 날 기사다.
이흔암은 누구인가? 아래 『고려사』 열전 40권 반역열전(1) 두 번째 등장인물 기마부대 총사령관 이흔암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자.
공주 출신 이흔암(伊昕巖)은 궁술과 기마술을 일삼았으나 다른 재주와 식견은 없었으며 이득 있는 일이라면 재빨리 챙기는 자였다. 궁예(弓裔)를 섬기다가 기략으로 벼슬을 얻었다. 궁예 말년에는 군사를 거느리고 공주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그곳을 수비하였다. 태조가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몰래 흉계의 마음을 품고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태조에게 이르니, 사졸들이 대부분 도망하였으므로 이에 웅주는 다시 백제의 땅이 되었다. 한찬(韓粲) 수의형대령(守義刑臺令) 염장(閻萇)이 이흔암과 이웃하여 살았으므로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 갖추어 보고하였으나, 태조가 말하기를, “이흔암은 지키던 곳을 팽개치고 스스로 나에게로 와서 변방의 영토를 잃었으니 그 죄는 참으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나와 어깨를 견주며 궁예를 섬기었고 평소 정분도 있으니 차마 처형할 수 없다. 또한 모반의 증거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그는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염장이 그를 은밀히 감시할 것을 건의하니, 태조가 내인(內人)을 염장의 집에 이르게 하여 장막 속에서 몰래 엿보게 하였다. 이흔암의 처 환씨(桓氏; 청주출신 반역자 환선길의 여동생)가 변소에 이르러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소변을 마치고 길게 탄식하며 말하길, “남편의 일이 제대로 잘되지 않으면 나도 화를 입겠구나.”라고 하고 들어갔다. 내인이 정황을 보고하니, 마침내 이흔암을 하옥시키고 모두 자백을 받아내었다. 백관에게 그 죄를 논하게 하니, 모두 말하기를, “처형함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친히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평소 흉계를 쌓아두고 있다가, 스스로 형벌에 빠진 것이다. 법이란 천하의 공평한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라고 하니, 이흔암은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저자거리에서 참수하고 가산을 몰수하게 하였으며 그 일당들의 죄는 불문에 부쳤다.
-『고려사』 127권 열전 40 반역叛逆 이흔암
이흔암은 태조 왕건과 어깨를 견주며 궁예를 섬기었던 동급 대장군이었다. 공주 출신 이흔암의 반역에 대한 왕건의 충격은 유훈 『훈요십조』에 공주강외로 남길 만큼 깊고 아팠으리라.
왕건이 940년 웅주(熊州)를 공주(公州)로 지명을 바꾼 이유도 기마대장군 이흔암 공(公)에 대한 애증의 추모가 아니었을까?
◆태조 왕건에 끝까지 저항한 청주호족들
차현이남과 공주이북 사이에는 청주가 있다. 청주지방 일대는 신라 말 5소경의 하나로 궁예의 정치적 기반이었다. 궁예는 백두대간과 금북정맥, 금남정맥 등의 산줄기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는 청주출신 사람들을 각별히 신임하여 중용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청주 사람들을 철원으로 이주시켜 왕조의 기반으로 삼았다.
궁예가 철원으로 도읍을 정할 때, 청주민호 1천호를 철원으로 이주시켰다(靑州人戶一千 入鐵圓城爲京) -『삼국사기』 궁예 열전
『고려사』 열전 제40권(환선길)부터 제45권(신돈)까지 반역열전이다. 반역 열전 첫 번째 등장 인물은 청주출신 환선길, 두 번째 인물은 앞에서 이야기한 공주출신 이흔암이다.
918년 6월 19일(음) 왕건은 고려를 건국한 지 4일만에 암살사건이 일어나 죽을 고비를 넘긴다. 암살의 역모 주도자는 청주출신 기마장군 환선길(이흔암과 처남 매부)이었다. 그는 왕건과 함께 고려의 건국에 참여한 장군이었다.
마군 장군 환선길이 역모를 꾀하다가 주멸되다.(馬軍將軍桓宣吉, 謀逆伏誅.)
-『고려사』 세가 권 918년 6월 19일(음)
환선길(桓宣吉)은 그 동생 환향식(桓香寔)과 함께 태조를 보좌하는 공을 세웠다. 태조는 환선길을 기마장군에 제배하여 심복으로 삼은 다음 항상 정예군을 거느리고 호위하게 하였다. 그 처가 일러 말하길, “당신은 재주와 용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들이 복종하며 큰 공도 또한 세웠는데, 권력은 다른 사람에 있으니, 어찌 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환선길도 마음으로 그렇다고 여기고, 드디어 병사들을 몰래 집결해 두었다가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 하였다. 기마장군 복지겸이 이를 알고 은밀히 보고하였으나 태조는 증거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태조가 궁전에서 학사 몇 사람들과 국정을 논의하고 있는데, 환선길이 부하 50여 인과 함께 무장하고는 동쪽 곁채에서 안뜰로 돌입하여 곧장 태조를 해치려 하였다. 태조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큰 소리로 질책하며 말하기를,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천명이 이미 정하여졌거늘 네가 감히 이럴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환선길이 태조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한 것을 보고 매복한 군사가 있다고 여겨 부하들과 함께 달아나니, 태조의 호위병들이 구정까지 추격하여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 환향식이 뒤에 이르러 일이 실패했음을 알고 역시 도망하였으나 병사들이 추적하여 모두 죽였다.
환선길 뿐 만이 아니었다. 청주 출신 호족들은 옛 태봉 세력인 궁예의 친위세력으로, 새롭게 권력을 잡은 왕건에 저항을 거듭했다.
순군리(徇軍吏) 임춘길 등이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처형하였다. -918년 9월 15일(음)
고려가 건국된 지 4개월 만에 순군리(경호원), 임춘길, 배총규, 강길아차, 경종 등을 청주출신 반역자를 처형했다. 왕건은 이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지만 청주 출신 수하 현률이 왕건을 만류해 왕건은 이들을 용서하고 회유를 하는 것을 고려하다가 이들을 처형하는 것이 옳다는 염상의 건의를 듣고 모두 처형했다.
고려 건국 5개월 만에 청주의 수령 진선(陳瑄)이 그의 동생 선장(宣長)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였으므로 처형했다. -『고려사』 918년 10월 21일(음)
∙ 태조가 즉위하자, 청주인 가운데 변란을 일으키려는 자가 많아서 일찍 대비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 같았다. 태조가 기마군장군 홍유·유금필등에게 병사 1,500명을 이끌고 진천에 진을 치고서 대비하게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안군에서 아뢰기를, “청주가 몰래 백제와 우호를 맺고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또 기마장군 능직에게 군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반란을 일으킬 수 없었다. -『고려사』 열전 5권 견금전,
태조 왕건은 다른 지역과 달리 끝까지 저항하는 청주가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고려사』에는 수도 개성에서 머나먼 청주까지 위무하기 위해 세 번이나 행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청주가 귀부하지 않고 쥐떼 두목처럼 반역의 기회만 엿보며(首鼠順逆) 유언비어가 자주 일어나므로, 태조가 직접 행차하여 위무하여 성을 쌓게 했다. 919년 8월 9일(음) 계묘(癸卯) ,
∙ 태조가 청주에 행차하다. 928년 7월 13일(음)
∙ 태조가 청주에 행차하다. 930년 8월 12일(음)
태조 왕건은 고려 건국 후 불과 4일 만에 자신을 암살하려 한 청주 출신 환선길 일족을 주멸하고 청주 일대에 번창하던 환(桓)씨의 씨를 말렸다. 연이어 고려 건국 후 불과 10일 만에 반역한 공주 출신 이흔암 일족을 참살하고 공주 일대에 번성하던 이(伊)씨들의 씨를 말렸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환(桓)씨는 125명, 이(伊)씨는 850명에 불과하다(2000년 인구조사)
◆◇◆◇◆◇◆◇◆◇미주
(1)*금강(錦江 408㎞). 금강의 발원지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읍 산 109번 신무산의 뜬봉샘이 발원지다. 금강이 충남 금산에 들어오면 적벽강으로 불리다가 충북 영동군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양강으로 불린다. 금강이 공주시에 곰강 또는 웅진강으로 바뀌다가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으로 불린다.
◆◇◆◇◆◇◆◇◆◇미주
(1)*금강(錦江 408㎞). 금강의 발원지는 전북 장수군 장수읍 신무읍 산 109번 신무산의 뜬봉샘이 발원지다. 금강이 충남 금산에 들어오면 적벽강으로 불리다가 충북 영동군을 지나는 구간에서는 양강으로 불린다. 금강이 공주시에 곰강 또는 웅진강으로 바뀌다가 부여에 이르면 백마강으로 불린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