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석, 과학의 시선] 중고교때 배운 우주관이 뒤집히고 있다 ..중장년층은 아는가?

기자정보, 기사등록일
최준석 과학작가, ‘나는 과학책으로 세상을 다시 배웠다’ 저자.
입력 2021-03-02 09:16
    도구모음
  • 글자크기 설정
  • 인문학보다 요긴한 과학적 소양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 '독배를 마시는 소크라테스'(1787년]

 
 
 

[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한때 자연을 탐구했다. 플라톤이 쓴 책 <파이돈>을 보면, 인문학자가 되기 전 자연철학자의 길을 걸으려던 소크라테스 이야기가 나온다. 소크라테스는 “젊었을 때 나는 자연 탐구라고 불리는 지혜에 몹시 열중한 적이 있네”라면서 그 이유는 “개개의 사물이 생성하고 소멸하고 존속하는 원인을 안다는 것이 대단한 일로 보였기 때문이지”라고 말한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죽기 직전에 감옥으로 찾아온 지인들과 나눈 마지막 대화록을 담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가 자연탐구에 매료된 건, 아낙사고라스라는 사람이 쓴 책을 접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아낙사고라스는 오늘날 터키 땅에 있던 이오니아 사람이며, 이오니아는 과학적 사고와 철학의 출발지라고 얘기된다. 아낙사고라스는 이오니아의 과학을 아테네에 전해줬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에 이내 실망한다. ‘놀라운 희망’이 금세 사라진 이유는, 내가 보기에는 소크라테스 자신의 착각 탓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지구가 평평한지 둥근지”, “지구가 (우주의) 중앙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뭐, 이런 점은 놀랍다. 동아시아인은 당시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으니까. 소크라테스는 막상 아낙사고라스 책을 보니, 엉뚱한 얘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아낙사고라스는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지성의 소관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아낙사고라스는 “대기, 에테르, 물, 그 밖의 이상한 것을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원인”으로 내세웠다. 아낙사고라스 얘기가 내게는 더 그럴듯해 보이는데, 소크라테스는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걸까?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이런 식이다. “아테네 시민들의 재판 결과를 받아들이고 내가 죽기로 한 건, 내 지성의 결정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연도 무엇이 자신에게 좋은지, 즉 무엇이 선(善)인지에 따라 행동할 것이다, 그런데 아낙사고라스는 그런 식으로 자연을 설명하지 않는다. 또 팔을 움직이는 건 내 지성의 결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낙사고라스는 팔 움직임은 뼈와 뼈에 붙어 있는 근육의 움직임이 원인이라고 설명한다. 이건 잘못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탐구의 방향을 바꿔 ‘두 번째 항해’에 나섰다. 두 번째 항해는 ‘도덕 철학자’가 되는 길이었으며, 그는 자연 대신, 인간을 탐구했다. 소크라테스가 그 탐구 행로에서 남긴 위대한 유산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로 압축할 수 있다. 오늘날 인문학자가 금과옥조로 삼는 말이기도 하다. 자기를 이해하기 위해 내면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너 자신과 만나야 한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면서 ‘인문학적 소양’을 쌓도록 강조한다.

내가 보기에는 ‘인문학적 소양’ 운운은 진부하다. 그보다는 ‘과학적 소양’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더 요긴한 것으로 보인다. ‘좋은 말’로 가득 찬 인문학적 소양도 좋지만, ‘과학적 소양‘을 충전하면 인간을 더 깊고 더 넓게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조건을 둘러싼 전체 그림이 보인다. “지난 1세기 동안 이룩한 과학 발전은 더 없이 웅장하고 폭발적이었으며 혁명적이라는 다소 진부한 수식어가 완벽하게 어울렸다. 과학자는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언어처럼 복잡한 원자의 침실을 발견했고, 사실상 탄생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우주의 자서전을 읽어냈고, 꼬여 있는 DNA를 풀어냈고….”(나탈리 앤지어의 책 <원더풀 사이언스>)

그런데 한국인 상당수는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란 과학의 최전선에서 알려온 땅이 흔들리는 소식에 귀를 닫고 있다. 그리고는 중고교 때 배운 수십년 이상 낡은 지식에 근거해 여전히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예방 카드’ 배포 시도 사건과 같은 황당무계한 일이다. 서울의 한 대형교회는 코로나바이러스 퇴치 효과가 있다는 한 신자의 근거 없는 주장을 받아들여, 무슨 카드인가를 신자들에게 배포하려 했다가 망신살을 사고, 철회한 바 있다. 과학자가 치열하게 검증한 지식에 근거해 사고하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라는 큰 질문에 대한 보다 나은 답을 구할 수 있다. 그리고 주변의 유사과학적 헛소리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가령 개인적으로 며칠 전 이런 경험이 있었다. 서강대 화학과 조규봉 교수를 만나러 갔다가 지도를 하나 보았다. ‘빙하시대 동아시아의 해안선‘이라고 영어로 써 있었다. 빙하시대라니, 몇 만년 전 이야기인가 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지도를 보니, 중국과 한반도가 땅으로 이어져 있고, 일본과 한반도는 아주 좁은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바싹 붙어 있었다.

조 교수가 보여준 지도는 나중에 확인해 보니 2만1000년 전 동아시아 해안선 모습이었다. 빙하시대가 끝나면서 기온이 올라가 거대한 대륙 빙하들이 녹았고, 녹은 물이 바다로 유입되었다. 그 결과 전세계적으로 해안선이 올라갔으며, 동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은 동아시아 대륙의 해안선이 만들어졌고, 옛 해안 지역은 바다 밑에 잠겼다. 2만년 전 선조들의 생활 모습은 모두 수장되었다. 내가 본 지도는 기후학자-인류학자 등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걸로 보인다. 어느 업체나 기관이 만들었는지, 확인하지 못했으나, 말로만 듣던 빙하시대 동아시아의 모습을 보니 놀라웠다.

빙하시대 지도에서,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는 넓은 평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서해는 없다. 동아시아인의 생활공간은 동쪽으로는 한반도, 서쪽으로는 티벳 고원 사이의 드넓은 지역이었다. 특히 한반도와 중국 사이에 많은 사람이 살지 않았을까 싶다. 1만5000년 전 서해에 바다가 들어오기 전에는 이곳을 가로지르는 큰 강이 있었을 것이고, 큰 강 주변이 빙하시대 동아시아인의 생활 터전을 이뤘을 것이다.

빙하시대 동아시아 해안선 지도가 내 눈을 잡아 끈 건, 다른 시야를 제공하고, 인간의 삶에 대해 더 알려주기 때문이다. 빙하시대 동아시아에 중국이 어디 있으며, 한국이 어디 있는가? 너와 나를 구분하던 경계가 무너지고 만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이다“라는 말이 있다. 아프리카대륙에서 현생 인류가 기원했음을 이 말은 전한다. 지구에 사는 인간 모두가 하나의 유전자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우리 모두는 아프리카인이다“라는 생각을, 한·중·일 3개국에 대입하면 어떻게 될까? ”우리는 동아시아인이다“가 된다. 한국, 중국, 일본인이 하나의 뿌리를 갖고 있다는 걸 말한다. 삼국인의 조상은 이웃 마을 사람이었거나, 한 마을 주민이었다.

그러니 한·중·일이라는 구분은 시간을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면 아무 의미도 없다. 2만1000년이라는 시간은 ‘인문학’자에게는 선사시대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아득한 옛날 얘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과학자에게는 오래전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를 떠나 중앙아시아 혹은 인도 해안선 루트를 거쳐 동아시아까지 온 선조를 둔 후예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데 지금은 ‘탈(脫) 아프리카 동지들’끼리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며 때로 으르렁대고 있는 것이다. 결국, 과학의 장점 중 하나는 “우리가 남이가”라는 걸 가르쳐주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당신이 장년 혹은 중년이라면 ‘과학적 소양’과 담을 싼 지 수십년 되었을 거다. 학교를 졸업하면 과학은 멀리하니까. “머리 아픈 과학을 왜 다시 공부해”라는 식이다. 내가 보기에 과학이 어렵게 보이는 건 다른 게 아니다. 낯설기 때문이다. 과학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서다. 과학의 언어가 낯선 건 외국어가 낯선 것과 마찬가지다. 낯설면 그 언어는 외계어나 다름없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과학 언어를 잘 모르기에 과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괜찮은 소식이 있다. 학교에서 배운 과학은 어려웠다. 교육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교양과학서는 그렇지 않다. 수식이 없다. 이야기 책들이다. 그리고 과학은 재밌지 않은가? 어린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과학을 싫어하는 어린이가 있던가? 당신이 손을 잡고 과학관에 데려갔던 어린 자녀는 어땠는지? 과학의 세계에 매료되었을 거다. 당신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어른이라면 교양과학서는 재밌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조건과 현상에 집중하는 인문학은 구태의연하다. 과학적 소양을 우리는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건 손만 뻗으면 주변에 있다. 빅뱅 직후의 우주와 세포, 삼엽충, 시아노박테리아, DNA와 같은 광대한 우주와 미소 우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자연에 관한 이해를 넓힐 때 역으로 인간은 자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또 지구라는 행성에서 오래 살 수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컴패션_PC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실시간 인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