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일본 정부는 원고들에게 각각 1억 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2018년 10월의 대법원 판결에 이어 일본제국의 불법적인 식민지 지배하에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단죄한 획기적인 판결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국가(주권)면제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가치는 아니라 하더라도 일본 정부에 대한 재판권을 예외적으로 인정한 이번 판결이 국제사회에서 보편성을 인정받을지 현재로서는 단언하기 어렵고 인정받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 과정에서 조금은 극단적이기는 하나 반일과 혐한으로 상징되는 국민감정의 골은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질 수도 있으며, 양국 정부는 일상화는 외교적 충돌을 감내하고 소모전을 반복해야 한다.
1월 18일 열린 신년기자회견에 문재인 대통령은 강제징용문제 등 한일 간의 현안들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가운데 위안부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은 2015년 12월의 한일 위안부 합의가 정부 간의 ‘공식적인 합의’라는 토대 위에서 피해자 할머니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을 찾기 위해 일본 정부와 협의하겠다고 말했지만, 피해자와 양국 정부를 모두 만족시키는 묘안이 있었다면 한일 관계가 지금처럼 악화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강제징용문제와 관련해서도 문재인 대통령은 일본 기업의 자산이 “현금화된다든지 판결이 실현되는 방식”은 한일 관계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는데, 이것은 3권 분립에 따른 사법부의 판단 존중이라는 지금까지의 입장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의 핵심은 일본 정부가 책임을 통감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서 아베 총리가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고, 일본 측이 정부 예산에서 자금을 거출해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양국 정부가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2016년 8월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가 설립한 화해치유재단에 10억 엔을 거출했으며, 이 자금은 양국 정부의 합의에 따라 생존 피해자와 사망 피해자 유가족에 대한 현금 지급사업을 했다.
이 돈이 배상이든 위로금이든 명칭에 상관없이 일본 정부가 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책임을 통감해 사죄의 증표로서 피해자에게 제공한 것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생존피해자와 사망피해자 유족들이 현금을 받은 사실을 강조하면서 그들이 한일 간 합의를 평가하고 있다는 주장을 펴지만, 일본 정부는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의사를 확인한 적이 없다. 지금도 일본 측은 합의에서 약속한 조치를 모두 이행해왔다고 강변하고 있으나 그들이 말하는 약속한 모든 조치란 10억 엔을 거출하는 것일 뿐 피해자의 명예나 존엄 회복, 상처 치유와는 거리가 멀었다.
2017년 5월 정권 출범 이후 문재인 정부는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정부 간 합의였음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합의 불이행을 통해 합의를 사실상 무효화시키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외교부 장관 직속으로 설치된 위안부 합의 검토 TF는 2017년 12월 5개월간의 검토 결과를 공표하면서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이며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균형한 합의였다고 규정했다. 또한, TF는 그런 합의가 된 원인을 박근혜 정부의 외교적 무능에서 찾아 일본 측에 대한 비판은 거의 없었는데, 절차와 내용 면에서 ‘중대한 흠결’이 있는 잘못된 합의의 당사자인 일본에 면죄부를 준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지도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아베 정권과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에서의 해결”을 고집했던 박근혜 정권 사이에는 인식의 괴리가 너무 커서 유무형의 미국의 압력과 개입이 없었다면 2015년 12월의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5년여의 정치공백을 거쳐 2012년 12월 다시 총리가 된 아베를 ‘강경한 내셔널리스트’로 보았던 미국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과거 역사에 관한 아베 정권의 언동이 미국의 국익을 해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2013년 12월 26일 아베 총리가 과거 전쟁을 자위의 전쟁으로 미화하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자 주일미국대사관은 당일 이례적으로 ‘실망’했다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바이든 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었다는 관측이 유력하다.
2014년 4월 25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오바마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는 ‘끔찍하고 지독한 인권침해’라면서 아베 총리와 일본 국민은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솔직하고 공정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고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던 고노 담화(1993년 8월)를 마뜩찮게 생각하는 보수적 지지 세력을 의식해 고노 담화의 수정 가능성을 내비쳤던 아베 총리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비판적인 시각 때문에 결국은 고노 담화의 계승 의사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의 국제지위 회복과 훼손된 동맹관계의 복원과 강화를 강조하는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 대처하기 위해 미국은 아시아와 유럽의 동맹과 우호국과의 협의를 가속화하고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 때문에 소중한 미래를 위해 해야 할 일을 미뤄서는 안 된다. 미국의 협력을 통해 일본의 양보를 끌어내겠다는 식의 편협한 사고를 버려야 하며, 문재인 정부는 2015년 12월 합의가 피해자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은 정치적 합의라는 반대파의 주술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가 정권도 국책을 그르쳐 전쟁의 길을 선택했던 전전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아베 정책에서 벗어나야 하며, 그것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이 이니셔티브를 발휘할 때이다. 민주주의와 기본적 가치를 공유하는 한·미·일 3국이 외교·국방 각료급의 2+2를 시작함으로써 우리 외교의 독자적 공간을 넓히는 창의적 발상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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