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을 말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형사 처벌을 받을 수 있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헌법재판소에서 합헌 결정을 받았다. 헌재는 개인이 명예훼손으로 인해 인격권에 피해를 입는 일이 없어야 한다며 표현의 자유보다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다만 전 세계적으로 사실적시를 처벌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있고, 9명의 헌법재판관 사이에서도 5(합헌): 4(일부위헌)로 의견이 갈린 만큼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도 간통죄처럼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면 폐지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26일 법조계에 따르면 헌법재판소는 25일 공연한 사실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한 형법 307조 1항이 헌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결정했다.
이번 결정은 지난 2017년 A 씨가 낸 헌법소원에서 비롯됐다. A 씨는 동물병원에서 치료받은 반려견이 부당한 진료 탓에 실명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하고 수의사의 잘못된 진료 행위를 SNS에 게시하려 했다. 하지만 사실을 알려도 명예훼손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307조 1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냈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는 간통죄와 마찬가지로 오래전부터 논쟁거리가 됐다.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허위로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만 형사 처벌할 뿐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선진국 중에서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형사 처벌하는 국가는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뿐이며, 이마저도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만 명예훼손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은 수정 헌법 제 1조를 통해 사실적시로 인한 명예훼손을 부정한다. 명예훼손으로 인한 피해는 민사 손해배상으로 해결하도록 하고 있다.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대륙법계 국가는 진실한 사실이거나 피의자가 진실로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경우에는 명예훼손으로 처벌하지 않도록 해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일본은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처벌하지만 친고죄(피해자가 고소해야 기소할 수 있는 범죄)로 규정해 타인이나 수사기관이 임의로 고발·기소할 수 없도록 했다.
지난 2015년에는 유엔 시민·정치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위원회(ICCPR)가 한국 정부에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폐지는 시기상조...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 안 돼"
◆폐지는 시기상조... "사회가 받아들일 준비 안 돼"
이러한 상황에서 헌재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폐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한국 사회가 표현의 자유를 견딜 정도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에서 처벌 조항을 갑자기 폐지하면 개인의 프라이버시에 중대한 침해가 일어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합헌 결정을 내린 5명의 재판관은 "자유로운 표현은 보장돼야 하지만 진실한 사실이라는 이유만으로 명예훼손적 표현행위가 무분별하게 허용되면 개인의 명예와 인격은 제대로 보호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정보 전달 매체가 다양해지고 정보의 전파 속도가 빨라졌으며 그 파급 효과도 광범위해진 상황에서 처벌 규정이 없어지면 개인의 인격권 훼손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는 게 헌재의 설명이다. 온라인에 명예훼손적 표현이 가득하고 명예와 체면을 중요시하는 한국 문화도 이번 결정의 한 이유다.
헌재는 "개인의 외적 명예는 훼손되면 완전한 회복이 어려운 특징이 있다. 타인의 명예훼손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개인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일도 종종 일어나는 만큼 (명예훼손으로 인한) 사회적 피해가 매우 심각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처럼) 형사 처벌이 없어도 개인의 명예를 보호·구제할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보기 어렵다. 현재는 명예훼손에 대한 효과적인 구제방법이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명예훼손에 따른 징벌적 손해배상을 인정하는 미국과 달리 한국에선 민사 소송만으로 피해를 구제받을 길이 없다는 지적이다.
또한 헌재는 형법 307조 1항이 적시한 사실이 진실하고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면 처벌하지 않도록 예외(형법 310조)를 둬 표현의 자유가 침해받는 일을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헌법이 규정한 '침해의 최소성'도 인정된다고 밝혔다. 침해의 최소성은 법률은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완화된 수단이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헌법상 원칙이다. 헌재는 국가 기관이 307조 1항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없도록 법원이 처벌 예외 상황을 최대한 넓게 해석하고 있는 점도 이번 결정에서 고려된 부분이라고 밝혔다.
법원이 처벌의 예외 상황을 폭넓게 인정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배드파더스' 사건을 들 수 있다. 양육비를 주지 않는 부모 300여명의 실명, 나이, 거주지, 직업, 사진 등을 공개한 혐의(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로 배드파더스의 운영진이 기소됐지만, 법원은 작년 1월 공공의 이익을 이유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의 항소로 진행 중인 항소심은 이번 헌재 결정 이후 재개될 예정이다.
◆정부 비판 위축될 우려 있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핵심"
◆정부 비판 위축될 우려 있어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핵심"
이러한 헌재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유남석, 이석태, 김기영, 문형배 등 4명의 헌법재판관은 형법 307조 1항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재판관들은 "표현의 자유가 가진 가장 중요한 가치는 국가와 국가를 운영하는 공직자들에 대한 감시와 비판에 있다. 형사 처벌 주체인 정부와 공직자가 감시·비판 대상자가 될 경우 정당한 감시와 비판이 위축될 우려가 있다"며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핵심 요소라고 강조했다.
이어 "사실적시 명예훼손죄의 위법성을 판단하는 '공공의 이익'을 국민이 판단하거나 예측하기 어려운 만큼 정당한 표현 행위마저 위축될 수 있다. 사생활의 비밀(개인 프라이버시)에 해당하지 않는 사실적시마저 처벌하는 것은 헌법에 반한다"고 덧붙였다.
한 언론계 관계자는 "공공의 이익이라는 예외를 인정받아야 위법성이 조각되는(무죄가 나오는) 형법 307조 1항은 경찰·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원의 재판을 거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공익을 위해 사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법안 자체로 표현의 자유를 위축할 우려가 있는 만큼 빨리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 헌재의 결정은 헌법재판관 의견이 5(합헌): 4(일부위헌)로 나뉘었다는 점에서 지난 2016년 7(합헌): 2(위헌)로 나뉜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죄' 헌법소원 때보다 표현의 자유를 더 중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헌법소원은 6명의 헌법재판관이 위헌으로 판단해야 인용 결정이 나온다. '개인의 성적 자유'를 국가가 제약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간통죄는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총 5번 헌법소원의 대상이 됐고 지속해서 위헌 판단을 한 헌법재판관이 늘어난 끝에 2015년 2월 7(합헌): 2(위헌)로 위헌 결정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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