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인가? 국토면적으로 보면 세계 110위이므로 작은 나라 맞다. 하지만 인구(28위), 경제규모(10위)로 보면 결코 작은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남반구의 호주, 뉴질랜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면 영향력이 막강한 지역강국이 되었을 것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중국, 일본, 러시아와 같은 큰 나라들과 이웃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국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 한반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흥망성쇠에 많은 영향을 받아 왔으며,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따라서 나라의 안녕과 발전 여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정학적으로 외교가 중요
4강 외교에 치중할 수밖에 없는 현실
바이든 대통령 취임 후 이루어진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통화에서 바이든이 한미동맹을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의 핵심축(린치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인도태평양에서의 평화와 번영의 초석’이라 표현한 미일동맹에 비해 격하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다. 며칠 뒤 이루어진 정의용 외교부장관과 블링컨 미 국무장관 간의 통화에서 ‘동북아시아와 자유롭고 개방적인 인도태평양 지역, 그리고 전 세계 평화와 안보, 번영의 핵심축인 한미 동맹의 강력함을 더욱 증진하기 위한 완전한 파트너십을 약속했다’고 함으로써 이 논란은 가라앉았지만, 이 해프닝은 우리가 얼마나 미국과의 관계에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우리에게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북한 요소가 있다. 최근 수십년 동안은 북핵문제가 늘 최대의 이슈가 되어 왔지만, 우리는 동족이면서도 때로는 호전적인 북한과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통일을 지향해야 한다는 숙제를 안고 있다. 북한문제는 단순히 우리 민족끼리 양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복잡성을 띠고 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4강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 외교의 최우선 과제가 4강과의 관계를 여하히 관리해 나갈 것인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최근 우리가 처한 상황이 구한말과 비슷하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그때와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강력한 한미동맹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의 동맹은 이를 기초로 나머지 3강과의 관계를 풀어 나가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는 큰 외교적 자산이다.
아시아는 넓고, 세계는 더 넓다
그러면 우리는 늘 발등의 불인 4강 외교에만 매몰되어 있어야 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나라가 위치한 곳은 아시아의 맨 동쪽 끝이지만, 아시아만 해도 동남아, 서남아, 중동까지 우리가 잘 모르는 곳이 더 많을 만큼 넓고, 세계는 더더욱 넓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에서 세계를 보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시각으로 세계를 보고 있으리라 착각하면 안 된다. 동남아 사람들은 그 지역이 아시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모든 문제들을 보고, 판단한다. 인도인들은 인도가 아시아의 중심이라 생각하며, 다른 나라들이 인도를 중요하게 여겨 주기를 바란다. 우리나라는 대외무역 의존도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최근에는 케이팝을 비롯한 우리 문화가 전 세계에서 호응을 얻으면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세계인에 대한 노출도가 크게 높아졌다. 이제 우리는 다른 나라를 대할 때 우리의 좁은 시각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보려는 노력을 하고,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과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지를 생각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이익을 보는 관계는 있을 수 없다.
구호에만 그쳐 온 외교다변화
2019년 9월 24일 당시의 이낙연 국무총리는 “외교다변화가 외교부 문서에 등장한 게 박정희 대통령 시대부터일 것”이라며 “그로부터 30년, 40년 이상 흘렀지만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이는 당시 부산에서 개최 예정이던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의 준비를 독려하기 위해 국무회의에서 한 말이지만, 우리 외교에 대한 맞는 지적이었다. 새로운 정권이 출범할 때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4강외교와 함께 외교다변화를 주창하지만 대부분 진정성이 없고, 용두사미에 그치곤 한다. 외교부는 외교다변화의 필요성을 잘 알고 있고, 정권의 어젠다에 외교다변화를 집어넣기는 하지만, 5년 단임 정권이 꾸준히 외교다변화를 추진해 나가기에는 의지도 능력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정상외교에 함몰된 한국외교
특히 최근에는 청와대가 외교의 사령탑 역할을 하다 보니 모든 외교가 대통령이 직접 나서는 정상외교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에 대한 대통령의 방문 일정이 잡히면 청와대와 외교부를 비롯한 정부 각 부처가 총력을 기울여 그 나라와의 관계 강화를 위한 소위 ‘성과사업’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이렇게 급조된 사업은 대통령 방문 시 서명식이나 착공식 등의 그림을 위한 행사를 만들어 내지만, 대통령 방문이 끝나면 대부분의 경우 후속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켜지지 않는 약속에 대한 주재국의 채근은 대개 현지 대사가 감당할 몫으로 남는다.
우리 외교의 블루오션
우리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투자를 하면 큰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는 외교의 블루오션은 많이 있다.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남방정책의 대상인 동남아와 인도가 있고, 우리 외교의 불모지로 남아 있는 아프리카가 있다.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우리나라가 너무 경제적 이익의 관점에서만 접근하려고 하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거리가 멀어서 아득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투자 대비 성과가 매우 클 수 있는 중남미의 여러 나라가 있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나름대로 우리나라와의 인연을 강조하며 다양한 분야에서의 협력을 강화하기를 바라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 우리의 진정한 친구를 많이 만들어 놓는 것은 당장 눈앞의 경제적 이익보다 장기적 발전과 번영의 토대가 될 것이다.
외교다변화를 위한 시스템 마련 필요
어느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외교다변화의 필요성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지 쇄신을 위해 명칭은 바꾸더라도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외교다변화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추진할 필요가 있다. 어느 나라도 반짝하는 단기간의 관심으로 우리의 진정한 친구로 만들 수는 없다. 취임 초기에는 4강과의 관계 설정에 전념할 수밖에 없는 5년 단임 정권이 최우선적 외교과제로 외교다변화 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겠지만, 2차적 관심 정도는 가지고 제도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바람직한 것은 외교부를 중심으로 외교다변화 정책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시스템을 만들어 추진해 나가는 것이다. 정상외교의 효과가 크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모든 나라를 다 방문하기는 어려우므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외교다변화를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탤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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