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의 조선8도분할보호안
북3도는 청 소유, 남4도는 일 소유, 경기도는 공동지배조선8도의 분할보호안 전문 조선이 'Corea'로 조선국왕이 'Corean King'으로 되어 있다.
청일전쟁 전야다. 1894년 6월 12일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6월 16일 혼성 제9여단 4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다. 6월 21일에는 일본군 선발대가 한양으로 진군해 용산에 주둔했다.
다음날 6월 22일 쓰오(陸奧)일본 외무대신은 재미 주일공사로부터 아래와 같은 전문을 받았다.
∙ 발신일 1894년 6월 20일 오후 1시 30분 ∙발신자 재미 공사
∙수신일 1894년 6월 22일 오전 2시 27분 ∙수신자 동경 외무대신 쓰오
조선(Corea)(1)*에 관한 청국과의 최종 합의 문제와 관련, 본인은 1888년 2월 2일에 체결된 ‘소말리 해안’의 공동 관리 안에 관한 영불협정에 대해 각하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함. 분할 보호는 항상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남부 4개도의 대외 및 대내 문제를 우리의 단독 감독권의 보호 하에 넣고 동시에 북부 3개도도 동일한 조건 하에 청 나라의 보호를 인정해 주어야 할 것임. 한편 경기도는 이 지역에 대한 어떤 권리를 얻으려 하거나 주장하려는 제3세력의 여하한 책동도 방지한다는 양대 보호국의 상호 의무 조항을 붙여 잠정적으로 조선국왕(Corean King)의 전적인 통제하에 둘 것을 건의함.
만일 청 나라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우리나라는 중일양국의 보호를 받는 ‘경기민국’으로 남을 뻔 했다.
다음날 6월 23일 이토 히로부미 내각과 참모본부·해군군령부 합동회의에서 오오토리 주한 공사의 요청에 따라 인천에 주둔하던 혼성여단의 한양 추가 주둔을 명령했다.(2)*
일제, 영국정부의 조선분할조정안을 거부
7월 3일, 조선 정부는 일본군의 철병 요구를 했으나 오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주한 일본 공사는 철병 요구를 거부하고, 도리어 조선정부에 내정개혁안을 제시했다. 7월 19일 청일전쟁 개전에 대비하여 일본의 연합함대가 구성을 완료했다.(3)* 청일전쟁 준비를 끝낸 바로 그날 아오키(靑木) 주영공사가 일본의 조선분할 점령안에 대한 청국의 반응과 영국외무대신의 조정안을 쓰오 외무대신에 발신했다.
[조선 분할 점령에 대한 영국 외무대신의 제안]
영국 외무대신 킴벌리 경이 은밀히 본 공사에게 통고한 바에 의하면, 청국 정부는 동 대신의 권고에 대하여 조선 분할점령 즉, 일본은 남부, 청 나라는 북부를 점령하고 서울은 서로 점령하지 않고 놓아둔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뜻이 있음. 따라서 이 관헌으로서 7월 20일까지 이야기를 타결함이 긴요함. 그렇지 않으면 청 나라는 12만 명의 군대를 인천에 파견할 것임. 청 나라는 담판에 이를 때까지 일본 군함이 결코 그 항구로 들어오지 않기를 바람. 영국 외무대신의 생각으로는 청 나라는 지난 2, 3일 사이에 크게 적개심을 더하였다는 것으로, 영국 대신은 귀 대신이 항상 본 공사에게 실황을 보고하여 영국대신이 조정을 하기에 편리하게 하기를 간절히 희망함. 점령과 개혁의 건과는 같이 행할 수가 있음. 만약 귀 대신께서 교전을 피하기를 바란다면 직접 청 나라에 주재하는 영국 공사와 왕복하지 않을 수 없음. 동 공사는 그 뜻의 훈령을 받았음. 본 공사의 의견으로는 그 점령은 이집트의 경우처럼 조선의 긍정적인 허락을 얻거나 혹은 청 나라와 조약을 맺어서 이것을 해야 함. 점령은 양쪽이 분할 점령을 하며, 1885년 조약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어야 함을 요함. 그리고 그 본문은 이것을 막연히 인정하고, 그 계속 기한 같은 것은 우리 편의에 따라 해석을 내릴 수 있어야 함.
그러나 쓰오 외무대신은 7월 19일 즉일 아오키 주영공사에게 분할점령안에 관해 협조할 시간이 없음을 통보한다.
[분할점령안 관해 협조할 시간이 없음을 통보]
분할점령안에 관한 7월 19일자 페테르부르크 발신 귀하의 전문을 7월 21일에 받았음. 따라서 합의할 날짜는 이미 지났음. 청국주재 영국공사를 통한 청 나라의 제의에 대한 본관의 수정안 제시는 최종 회답까지 5일간의 시간 여유밖에 없으므로 이젠 다른 안을 수용하기는 불가능함. 청국군의 추가 파견 보도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되풀이 되어 유포된 유사한 보도가 사실이 아님이 판명되었으므로 거의 신빙성이 없음.
일본군, 경복궁 난입하여 고종을 체포하다 (1894년 7월 23일)
1894년 7월 23일 0시30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작전이 개시됐다. 오토리 주한 공사가 용산주둔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 급전을 보낸 것이다.
중무장한 1000여명의 일본군의 야습에 경복궁을 수비하던 장위영과 통위영 병사들이 격렬히 대항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새벽 5시 일본군은 영추문을 폭파하고 경복궁으로 난입, 고종을 체포했다.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여 조선군을 무장해제하라고 지시했으나 고종은 듣지 않았다. 이에 일본군은 조선인 첩자를 시켜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어 끝까지 저항하던 조선군을 무장해제시켰다.
일본 군사들이 새벽에 영추문으로 대궐에 난입하다
일본 군사들이 대궐로 들어왔다. 이날 새벽에 일본군 2개 대대가 영추문(迎秋門)으로 들어오자 시위 군사들이 총을 쏘면서 막았으나 고종이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대원군(大院君)이 명을 받고 입궐하여 개혁을 실시할 문제를 주관하였는데,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도 뒤에 입궐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894년(고종 31년) 7월 23일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김홍집, 김윤식, 김가진 등 종일매국노 일색으로 구성된 친일 내각은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는 조선독립을 선포하고 일본군이 청나라 북양군을 조선에서 몰아내도록 허용했다.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을 점령당하고 고종이 체포된 1894년 7월 23일은 최초의 국치일이자 일제강점기 시작일이었다. 그날 이후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까지 한반도의 사실상 최고권력 중심은 주한일본공사관과 조선통감부였다. 즉 1894년~1910년은 한국이 독립국이었다는 시대 인식의 치명적 착오가 오늘날 친일잔재 유지 또는 옹호 현상을 낳고 있다.
◆◇◆◇◆◇◆◇각주
(1)*15세기부터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이전까지 국제외교문서 대다수는 한국의 국호를 'Korea'가 아닌 'Corea'로 표기했다. 이건 차후에 상술하겠다.
(2)*佐谷眞木人, 『日清戦争 「国民」の誕生』, 講談社, 2009년, 43쪽
(3)*原田敬一, 『日清戦争』, 吉川弘文館、2008년, 23-25쪽.
(2)*佐谷眞木人, 『日清戦争 「国民」の誕生』, 講談社, 2009년, 43쪽
(3)*原田敬一, 『日清戦争』, 吉川弘文館、2008년, 2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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