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파르헤지아] 한국 증오정치사(史)에 관한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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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04-05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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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월 7일 보궐선거를 앞두고, 우리 앞에 외치고 있는 정치의 본질을 생각함

4·7 재보궐선거 사전투표 첫날인 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1동 사전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넣고 있다. 사전투표는 2~3일 이틀 동안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된다.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악에 대한 증오를 정의(正義)로 삼는 것들

증오는 권장할 만한 것인가. 이런 질문에 전적으로 긍정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종교는 증오를 권장하기도 한다. 기독교의 시편은 "신은 거룩하기에 모든 죄를 미워하며, 죄를 미워하기에 죄인에게 분노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에 대해 증오하는 것은, 종교에서 정의로 권장하는 대목이다. 철학에서도 악에 대한 증오는 윤리의 핵심으로 인식한다.

'악에 대한 증오'가 정의로 등장하는 가장 일상적인 영역은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독재와 반민주를 규정하고 그것을 타도하려 한다. 그 타도의 무기는 바로 증오다. 증오는, 데카르트가 규정하고 있듯, 어떤 집단에게서 악에 해당하는 무엇을 제거하도록 촉구하는 행위이다. 자유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진보주의, 보수주의, 내셔널리즘, 페미니즘도 '악'을 설정하고 그것에 대한 증오를 정당화하는 코드를 내세운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악에 대한 증오는 시민혁명과 민주화, 법치주의, 식민지 해방, 성평등을 가능케 했던 동인(動因)이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빚어지는 많은 정치적 현상은 '악에 대한 증오의 정당화'라는 개념이 없으면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정의(正義)는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불의를 전제하여 그것을 교정하고 타파하고 넘어서는 상대적이고 조건부적인 개념에 가깝다. 불의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정의는 그 존재의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다.

일제, 공산주의, 군부에 대한 증오

우리의 근현대사는 '악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민지 시대 일제는 '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는 일은, 나라를 빼앗긴 우리의 본래 정체성을 회복하는 핵심적인 정의였다. 우리 겨레는 이민족에게 탄압받는 현실 속에서 일제를 '증오'하는 정의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기도 했다. 해방 이후에 일어난 한국전쟁 또한 '악'이 뚜렷한 증오의 격돌이었다. 서로를 섬멸하겠다는 이념의 목표는, 전선의 양쪽에서 동족을 살육하는 일에 머뭇거릴 수 없는 '정의'의 전선을 형성하게 했다.

전쟁 과정에서 군대가 체계화하고 국가 질서 유지의 핵심이 되면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 세력은, 국가 질서를 어지럽히는 존재를 악으로 간주해 탄압을 가했고, 그 탄압에 맞서는 민주세력은 군부 독재자를 악으로 간주했다. 두 사람에 의한 군사 쿠데타로 근대화시기를 보낸 이 나라는 마침내 민주화를 이뤄내면서 정치군인이라는 악을 몰아내고 민주주의의 정의를 실천하게 된다.

군사정부가 사라진 뒤 민주화 동지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차례로 집권하는 과정을 거쳤다. 김영삼은 민간정부를 창출하면서 온건한 노선의 보수적 정치집단을 형성했고, IMF라는 위기를 타개할 적임자로 뒤를 이은 김대중은 그보다는 진보적 노선의 정치판을 만들어냈다. 군부쿠데타 정권이라는 악이 소멸되면서, '악'을 제거하는 정치적 증오가 약해졌고 집권당과 야당의 갈등이 희미해지는 듯 했다.

영호남 지역구도의 증오

그러나 명쾌한 '악'의 대상이 정치적 정의의 선명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오래된 경험치의 효용을 무시할 수 없었다. 군과 민간이라는 구도 대신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 구도가 대결로 진화하면서 새로운 '악'이 탄생했다. 영남은 김영삼 뿐 아니라,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를 배출한 지역으로, 군사정부의 부정적 이미지를 덧입는다. 호남은 전두환 정권의 압제로 떼죽음을 당한 도시로, 영남과 영남이 배출한 권력 전부를 악으로 투사하는 집단 감정을 지니게 됐다.

김대중을 계승한 노무현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존재였다. 지역은 부산에 기반을 두었고, 사상은 민주화 세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김대중 대통령의 지지를 얻어 비로소 어떤 세력의 '악'을 증오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을 지닐 수 있었다. 그가 설정한 악은 오히려 역사적 잔재로 남은 '권위주의'에 가까운 것이었다. 확고한 '악'을 향해 증오를 퍼붓는 정치를 청산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그 의지는 오래 가지 못했다.

노무현의 문제는 '국가경영의 미숙'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이후 국가 경영의 노하우가 기업경영에서 접목되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명박정권이 탄생했고, 군부정권이었지만 새마을운동을 주도했고 국가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냈다는 평가를 받은 박정희의 향수가 일어나, 그의 딸 박근혜가 대통령에 오른다. 이 두 명의 대통령은 부패와 무능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국가경영을 퇴행시켰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노무현 죽음에 대한 증오

노무현정부가 거칠게 퇴장하고 이후 진행된 전직대통령 수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여당과 야당 사이에 '악'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노무현을 죽인 이명박정부 당시의 권력집단 전체가 '악'으로 설정되고, 거기에 그 권력집단을 존재하게 한 핵심혈통이라 할 수 있는 박정희-박근혜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이명박근혜'라는 이름으로 연결된 것처럼 함께 고리지어져 '악'의 거대집단이 되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빚어진 정치적 무능과 혼돈은 그 '악'에 대한 증오를 정치적 에너지로 발전시켰다.

박근혜 대통령 당시 국정농단 사건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정치 퇴행의 심각성을 느끼게 하였고 촛불항쟁이 일어났다. 시민들은 폭력으로 악을 응징하려 하지 않았고, 밤마다 대규모로 촛불을 들어 권력의 자성과 스스로의 퇴진을 촉구한다. 이 평화적인 시위는 초기에 '증오'의 양상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상식적인 의사 표현 행위였다. 그러나 이 대열에 박근혜 정권 전체를 악으로 규정하는 '정치'가 스며들면서 급박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박근혜를 탄핵시키면서 새로운 권력을 구성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노무현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정치세력에 대한 깊은 증오를 탑재한 문재인정부가 들어섰다.

문정부와 악(惡)의 전선(戰線)

문정부는, 방금 권력을 빼앗긴 무리를 정확하게 '악'으로 규정하며 그 행적 모두를 청산하겠다는 약속을 하며 등장한다. 이 정부의 이런 특징적 면모는, 지금껏 이 땅의 어떤 정권에게도 없었던 모습이었다. 권력이 등장하면서, 어떤 세력에 대해 응징과 복수를 공언하며 권력 정체성으로 삼는 경우는 이전에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정부는 '증오'의 권력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권력집단을 악으로 투사했다. 그리고, '악'의 전선을 넓혀갔다. 친일파와 재벌과 부유층을 '악'으로 이해했고, 종북-반일-종중-반미의 외교적 기본 입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또한 '악'으로 규정했다.

거기에, 정권의 비위나 혼선이나 실책을 기소하려는 세력 또한 '악'으로 삼기 시작했다. 수많은 '악'을 적발하면서, 정부는 악에 둘러 싸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악과 싸우기 위해 그들은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진영에 대한 항상심을 지닌 홍위병부대를 구축했다. 대열에서 이탈한 자들은 배신자로 낙인찍었고, 그들의 목소리는 모두 거짓으로 규정했다. 그들에게 증오는 정의였다. 정치는 오직 악을 섬멸하고 스스로의 진영의 안정을 지키는 수단이 되어갔다. 문정부의 정치는 종교를 닮았다. 죄를 증오하며 죄인을 증오한다. 이에 동조하지 않는 자들조차도 증오한다. 그 증오의 탄력으로 정치적 결속은 강해지며, 정치적 정체성은 분명해진다. 우리는 이런 증오의 정부를 조마조마하게 쳐다보며 한 시대를 건너가고 있다.

증오의 대상이자, 반민주 부패세력의 잔당으로 지목되는 야당은 '증오를 증오'하는 정치로 그 에너지를 삼고자 하고 있다. 그들이 어떤 정치 철학을 지녔으며, 국가의 비전이나 국민의 삶에 대해 어떤 '경쟁력 있는 견해'를 지녔는지 알지 못한다. 이전의 정치적 경험들이 미래를 위해 어떻게 쓰일 수 있는지 납득할 만한 프리젠테이션을 한 적도 없고, 이 땅의 많은 위기적 상황을 풀어낼 수 있는 솔깃한 방책을 내보인 적도 없다. 그저, 민주당의 증오에 맞불을 놓으며 함께 맞붙어 이전투구를 벌이는 증오 게임에만 능할 뿐이다.

증오정치는 자아성찰이 불가능

증오를 일삼는 정치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 거의 불가능하다. 모든 문제가 악으로 지목된 '적'에게 있기에 스스로의 판단이나 언행을 살필 이유도 여유도 없기 때문이다. 증오에는 안으로 향한 눈이 달려 있지 않다. 내로남불은 그들이 지적으로 혹은 윤리적으로 모자라거나 소홀해서 나오는 태도가 아니다. 공격자는 자기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후하며 타인에 대해선 엄격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며, 타인에 대한 엄격함을 결코 자신에 대한 엄격함으로 치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증오는 모든 문제를 증오의 입장에서만 본다. 상대의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책략이 되기도 한다. 증오를 증오로 맞세워야 정치적인 입장이 선명해지기 때문이다.

증오정치는, 대결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戰場)과 대결의 상대에게서 벗어나 다른 것을 살피거나 헤아릴 수 있는 여지를 갖지 못한다. 정치가 지향해야할, 보다 높은 관(觀)과 격(格)을 지니지 못하기에 언제나 피의 이전투구로 정치의 내용물을 채울 수 밖에 없다. 증오의 정치가 국가경영에 도입될 때 그 국가는, 내부의 수많은 권력투쟁을 비롯한 다양한 갈등들과 골몰하느라 새로운 의제나 미래지향적인 창의로 나아갈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지금 마침 서울과 부산의 자치단체장 보궐선거(4월7일)를 앞두고 있다. 증오를 기반으로 생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서, 그 하나를 뽑아야 하는 선거가 얼마나 한심하고 무의미해 보이는지 이들은 모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나아가야할 것은, 그 증오 너머에 있는 이 나라의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매진인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저 기표난에 있는 이름들이 그 일을 선도를 해나가야할텐데 부동산 선심을 외치고 네거티브로 아우성치는 '습관화된 증오'를 보라. 투표장에 선 국민이 암담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은 이 증오를 넘어, 이 증오의 답답하고 살벌하고 비생산적인 판을 넘어, 급변하는 전환기의 문제들에 경쟁적으로 도전하는 정치로 나아가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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