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열린 ‘반도체 공급망 최고경영자(CEO) 서밋’에서 당부한 것은 예상대로 미국에 대한 ‘공격적 투자’였다. 총 19개 기업 중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참석한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의 반도체 패권주의 경쟁 국면에 끼여 복잡한 셈법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화상회의 방식으로 참석한 글로벌 기업 CEO들에게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미국을 기다려주지 않는데, 미국도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다”며 반도체 공급망 확대 의지를 분명히 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 웨이퍼를 직접 들어보이며 “이 웨이퍼는 (미국의) 인프라”라며 “우리는 과거의 인프라를 고치려는 게 아니라 미래의 인프라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업계에서는 당초 예상과 달리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 기업을 다수 초청한 회의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미국이 주도하는 ‘반도체 동맹’의 적극적인 참여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에 미국의 반도체 기업 인텔은 백악관의 요구에 즉각 화답했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회의 직후 “인텔 공장 네트워크 안에서 차량용 반도체를 생산하는 것을 설계 업체와 논의 중이며 6∼9개월 안에 생산하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대만 TSMC 등 파운드리 기업의 차량용 반도체 생산 확대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삼성전자는 이 같은 미국의 요구에 쉽사리 답하기 힘든 처지에 놓였다. 차량용 반도체를 거의 생산하지 않는 데다, 미국과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 대한 투자도 함께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을 직접 언급하면서, 중국 역시 향후 삼성전자를 상대로 투자 요구를 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이 경우, 삼성전자는 미국과 중국 양국에서 향후 수십조원의 투자를 단행해야 하는 부담을 안게 된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반도체 최대 시장으로, 홍콩까지 더하면 한국의 반도체 전체 수출량의 60%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일단 삼성전자는 미국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 해소를 위한 생산량 증대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인텔과 마찬가지로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을 늘리는 방안과 반도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에 대한 증설 계획을 검토할 것이란 게 업계의 전망이다. 당장은 지난 2월 한파로 가동이 중단돼 지난달 중순 정상 가동에 나선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팹(공장) 생산 설비 가동률을 최대치로 끌어올리는 방안이 유력하다.
이와 함께 삼성전자는 현재 추진 중인 170억 달러(약 20조원) 규모의 파운드리 팹 신설에 더해 추가적인 설비 확대도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오스틴시와 팹 신설과 관련한 인센티브 협의를 해왔으나, 이재용 부회장의 재구속 등으로 정확한 투자계획은 확정하지 않은 상태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가 이번 회의를 기점으로 미국 파운드리 팹 투자 규모를 최대 200억 달러까지 늘릴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반도체업계 한 관계자는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대미 투자를 압박한 상황에서 회의에 참석한 삼성전자가 신규 투자 카드를 제시하기 위해 복잡한 셈법에 돌입한 것 같다”며 “이 과정에서 중국까지 압박할 경우, 외교 문제로까지 갈 수 있어 정부가 조정 역할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한편 삼성전자의 고위 임원들은 지난 9일 유영민 청와대 비서실장과 이호승 정책실장 등을 서울 모처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서 청와대는 최근 반도체 공급난 문제와 더불어 백악관 회의를 앞두고 삼성전자 측의 준비 상황 등을 지원하고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이와 별도로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15일 개최하는 확대경제장관회의에 삼성전자를 비롯해 SK하이닉스, LG화학 등 국내 대기업 CEO를 배석시켜 경제 정책 관련 협의도 할 예정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