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을 따라 춘설헌(春雪軒)에 오른다. 남종화의 대가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 1892∽1977) 선생의 묵향, 벌써 짙다. 선생이 20여년간 기거했던 이 작은 벽돌집에서 광주의 얘기는 시작된다.
춘설헌의 원래 주인은 석아(石啞) 최원순(崔元淳 1896∽1936). 선생은 1919년 와세다대 유학 중 2‧8 독립선언을 주도했다. 귀국 후 동아일보 기자로 항일의 필봉을 휘두르던 선생은 일제의 고문으로 병을 얻어 낙향, 지금의 춘설헌 자리에 석아정(石啞亭)을 짓고 요양하다 세상을 뜬다. 석아정은 무등산의 성자(聖者)로 불린 오방(五放) 최흥종(崔興琮 1880∽1966)에게 넘겨진다. 최흥종은 택호를 오방정으로 바꾼다. 석아정-오방정-춘설헌으로 이어지는 이 작은 집에서 광주의 정신과 가치가 잉태됐다. 맨 먼저 오방을 만나보자.
광주 최초의 장로이자 목사였던 오방은 다섯 가지를 버린 사람이다. 자신의 소명(召命)에 충실하기 위해서 명예욕, 물욕, 성욕, 식욕, 생명욕을 버렸다. 그래서 오방(五放)이다. 대표적 오방 연구자인 차종순 전 호남신학대학교 총장은 오방을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이룬 사람, 잃음으로써 잃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인물”이라고 했다.
오방의 손자인 최협 전 전남대 교수(인류학과)는 이를 조금 넓게 본다. 가족에 대해선 방만함을 버리고, 사회적으로는 안일한 자세를 버리고, 경제적으로는 물질에 예속되는 것을 버리고, 정치에선 무관심과 무책임을 버리고, 종교에선 신조 없이 옮겨 다니는 걸 버리는 것으로 할아버지는 만년에 ‘오방’을 새롭게 해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수행하는 개인의 자세로서 오방의 원칙을 세웠다면, 나중엔 ‘사회가 필요로 하는 생활의 원칙’으로 확대시키려 했다는 얘기다.(오방기념사업회 『화광동진의 삶』 2000년). 실천하는 성직자로서의 오방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오방은 최 교수가 대학 2년 때 타계했다.
“모든 걸 버림으로써 모든 걸 이룬 사람”
고 김천배 광주 YMCA총무는 생전에 “오방은 성자요, 독립투사요, 기독교전도자요, 사회운동가였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모든 가지의 상충하는 가치가 묶여져 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驚異)가 아닐 수 없다”고 했다.
오방은 잃음으로써 비운 자리를 저항, 포용, 희생, 봉사와 무소유의 삶으로 채웠다. 불의와 위선, 안일(安逸)에는 치열하게 저항했으나 사회적 약자에겐 더없이 따뜻했다. 광주에서든 소록도에서든 한센인 곁에는 늘 그가 있었고, 걸인들과 움막을 짓고 함께 살았다. 그의 삶은 그가 끝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도덕경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의 삶, 그 자체였다. 화광동진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화기광 동기진’(和其光 同其塵)에서 나온 말로 빛을 고르게 하여(和光) 먼지에 섞여(同塵) 사는 것, 곧 자신의 지혜와 덕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하게 속인(俗人)들과 어울려 산다는 뜻이다. 1966년 5월 14일 오방이 세상을 떴을 때 남긴 것이라곤 낡은 성경책과 도덕경, 작은 십자가와 안경이 전부였다.
광주시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 날(5월 18일), 시내 술집과 요정들은 조의를 표하기 위해 철시했다. 일반 상가도 문을 닫은 집이 많았다. 장례식장인 광주공원엔 수많은 학생, 시민, 나환자, 걸인들이 모였다. 선생이 일구신 나주(羅州) 음성나환자 자활촌(호혜원)의 총무 최일담 씨가 예정에 없던 추도사를 하게 됐다.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겨두고 가신단 말입니까.…아버지께서 영영 가셔버리면 누가 우리를 돌봐줍니까. 추운 겨울 누가 옷을 입혀주며 굶주릴 때 누가 밥을 먹여줍니까. 우리는 어찌 살라하고 무정하게 가신단 말입니까!”
목이 메는 추도사에 2백여 명의 음성나환자들은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장내가 울음바다가 됐다. 여기저기서 몰려온 걸인들까지도 목 놓아 울었다. 이들은 무등산 장지까지 따라와 해가 설핏 기울도록 무덤 앞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부르며 울었다. (문순태 <성자의 지팡이-영원한 자유인>, 2000년)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다
광주 얘기를 시작하면서 우리 취재팀은 고민했다. 누구라야 광주의 정신과 가치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100여명의 후보를 놓고 여러 사람의 의견을 구했다. 압도적 다수가 오방을 첫 번째로 꼽았다. 오방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두 번 놀랐다. 한 사람의 일생이 이처럼 정의롭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런 인물이 왜 국내외적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광주 출신 출향인사들만 해도 오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다행히 근래 광주의 지식인사회와 종교계가 오방 재조명에 팔을 걷고 나섰다. (사)오방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오방로(五放路)가 지정됐으며, 오방아카데미와 오방학교도 문을 열었다. 작년 10월엔 남구 양림동에 오방기념관도 세워졌다. 오방의 삶을 파고 들수록 오방의 품에 깃든 광주는 축복받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방은 1880년 광주 불로동에서 광주의 호족이었던 탐진 최씨, 최학신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5세 때 어머니를 잃고, 19세 때 아버지까지 잃어, 어려서는 거칠고 난폭했다. 그는 20대 초반까지도 광주에서 알아주는 싸움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쇠망치’라고 불렀다.
오방은 24세 때인 1904년 독실한 기독교인 김윤수와 미국인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을 만나면서 바뀐다. 이 무렵 그는 기독교에 빠져들지만, 생계를 위해 대한제국 광주경무청의 순검(순사) 일을 해야 했다. 순검으로서 그는 항일의병들을 잡아들여야 했으나 앞에서 잡고 뒤로 풀어주기 일쑤였다. 1907년 평소 오방을 의심해온 일본인 상사로부터 광주국채보상운동본부에 걸려 있는 간판을 떼어오라는 지시를 받고 끝내 사직한다. 그해 봄, 그는 세례를 받고 이름을 영종(泳琮)에서 ‘흥종’으로 바꾼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새 삶이 시작된 것이다.
나환자의 피 묻은 지팡이를 집어주고
미국인 선교사 윌슨(Robert Wilson)의 한국어 선생을 하면서, 의료도 배우고 성경공부도 하던 1909년 초여름, 오방은 광주예수교병원(현 광주기독병원)에서 목포(木浦) 선교부의 포사이트(William Forsythe) 선교사와 마주치게 된다. 포사이트는 광주로 오던 중 길가에 쓰러져 있던 여자 나환자 한 사람을 발견하고, 자신의 말에 태우고 병원으로 들어서던 참이었다.
다음은 오방의 회고다. “나환자가 그때 마침 오른손에 들고 있는 참대 지팡이를 떨어뜨렸다. 포사이트가 나를 보고 ‘형님, 저 지팡이 좀 집어주시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주저했다. 지팡이에는 고름인가 핏물인가 더러운 진물이 묻어 있었고, 환자는 흡사 썩은 송장이요, 두 가락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은 그나마도 헐어서 목불인견이었다.…그러나 다음 순간 뜨거운 감동이 내 마음을 뒤흔들어 그 지팡이를 주워서 환자에게 쥐어줬다.…내 동포 중에서 생겨난 환자를 내가 꺼려하고 천만리 이역에서 온 외국인이 오히려 따뜻한 손길을 펴주고 있으니 예수님의 박애정신은 고사하고 동포애조차 결여된 인간으로서 무슨 신앙이냐는 자책이 나를 사로잡았다.” (오방 최흥종 「구라사업 50년사 개요」, 1960년 3월 17일 호남일보)
이 순간을 뒷날 김천배는 “한 변신(變身)이 이룩되는 찰나”라고 했고, 차종순은 “오방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은 축적인 변화(axial change)가 일어난” 순간이라고 했다. 차종순의 말은 이어진다. “오방은 자신을 용서하였다. 용서는 자신을 짓누르던 ‘잃음, 상실’이라는 한(恨)의 감정을 밖으로 끄집어내서 예수님을 위하여(때문에) 내버리는(잃는) 것이다. 오방은 잃어버림을 통하여 생긴 빈(空) 자리에 나(自己)를 채움으로써 더욱 더 자유로워졌다.” 오방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하편에서 계속.)
이재호 논설고문 ‧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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