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에 죄송하다더니 뒤돌아선 "우리 잘못 아냐"
25일 만난 송파구 A재건축조합 조합원 이모씨는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자료 뭉치를 보여줬다. 지난 2년여간 서울시와 송파구청에 보낸 민원과 답변, 각종 법률 해석집이다.서울시는 본지 취재가 시작되자 곧바로 행정 실수를 인정하고 시정조치를 약속했다. 6년 전 정비사업 비리를 막기 위해 대대적으로 개정하고 현장에 적용하겠다고 약속한 '정비사업 예산회계규정'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정비사업 조합에서 비리가 일어나는 핵심 문제인 깜깜이 예산 집행 문제는 근절되지 않았다. 각종 조합에서는 아직도 언제 얼마가 왜 쓰였는지, 비리가 의심된다며 다툰다. 지키지 못한 서울시 약속이 막대한 사회비용으로 돌아온 셈이다.
서울시가 지난 2015년 개정한 '정비사업 조합 등 표준예산회계규정'과 해설집을 보니 문제가 심각했다. 의무사항으로 바뀐 대다수 정보공개항목이 포함돼 있지 않았다.
개정된 예산회계규정은 그동안 깜깜이었던 조합의 돈 문제를 투명하고 명확하게 제시하는 데 목적이 있다. 뭉뚱그려 관리했던 사업비는 여러 항목으로 세분하고 한 해에 들어오고 나가는 예산을 정확히 분리하는 등의 작업이다.
하지만 조합에 왜 이 규정을 지키지 않았냐고 항의해도 돌아오는 답변은 "모른다"거나 "공개 대상이 아니다"는 식의 회피성 답변이었다.
서울시나 구청도 마찬가지였다. 회계감사 주체별로 수입 내역에 적게는 700억원부터 1400억원가량 차이가 난다는 지난해 6월 민원에는 아예 답변이 없었고 예산회계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에는 "구청에 확인하라"고 답이 왔다.
국토부도 마찬가지였다. 총회 절차 없이 예산을 쓴 조합 문제에 관해 국토부 관계자는 "현행법상 5000만원 이상 계약은 사전 총회 의결이 있어야 하지만, 실제 위법 여부는 법정으로 가봐야 안다. 정부가 해결할 문제는 아니고 조합원이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답했다.
이씨는 "수년간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조합이 잘 굴러가고 있겠거니 했다가 뭔가 문제가 보이는데도 아무도 협조해주질 않았다"며 "내 재산을 가져가서 사업을 하는 조합이나, 조합원을 보호해야 할 정부나 어떻게 이렇게 무관심할 수가 있는지 분노가 치민다"고 토로했다.
A조합 김모씨도 "지난 40년간 정비사업 비리가 만연했고, 국가적으로 단죄의 의지가 없는 토착 비리로 자리잡았다"며 "개별 조합원은 조합의 조직력에 맞설 수가 없고 건설사와 정부, 조합의 유착 또는 무관심에 억울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눈먼 돈 가득한 정비사업조합…서성이는 이리떼, 누가 막나
최근 조합의 일방적인 공사 발주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성동구 B조합 백 모씨도 "계약 한 건당 조합에 들어가는 리베이트가 막대한 건 다 아는 사실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경쟁입찰이라 해도 일단 연줄 있는 업체 하나를 정해두고 나머지는 들러리 세워서 뽑는다"며 "한두푼도 아니고 수천, 수조원대 사업이 이런 식으로 운영되는데 언제까지 말로만 엄벌할 생각인가"라고 부연했다.
실제로 익명을 요청한 1군 건설사 도시정비팀 소속 김모씨는 "정부가 공공지원자라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하는 건 없다"며 "추진위 또는 안전진단부터 각 건설사가 붙어서 영업을 하고, 작게는 현수막부터 사업성 분석까지 각종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유착이 안 생길 수가 없지 않겠냐"고 전했다.
서초구에서 조합 임원을 지낸 현직 공인중개사사무소 대표 박모씨도 "조합에 있으면 철거업체부터 각종 자재업체, 건설사까지 온갖 곳에서 리베이트를 한다"며 "조합원이 모여서 눈먼 돈을 만들어놨는데 얼마나 탐스럽겠냐. 정부도 알면서 더러우니까, 손을 못 대니까 모르는 척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재건축 복마전⑤] 서울시 '정비사업 비리와의 전쟁'…만든 시스템만 활용해도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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