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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山南義陳)을 기리는 사당인 영천 자양면소재 충효재 본건물 모습.[사진= 김규남 기자]
이날 행사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산남의병기념사업회 일부의 인원과 의병장의 후손들만 모여 지난해에 비해 조촐하게 거행됐다.
우리에게 생소한 '산남의진'이라는 이름에는 피 맺힌 구한말 국권이 일제에 의해 침탈 당할 당시 온몸으로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의병들의 절규가 담겨 있다.
산남은 고려시대 이래 영남(嶺南)을 지칭하는 다른 말로 영남의 의병들이 영천시 자양면 충효재에 모여 거병한 것에서 유래한다.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을 이름으로 의병 항쟁을 준비한 것.
◆ "죽어도 살아있는 이름" 산남의병 양세대장
1862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용기 선생은 1887년 아버지 정환직이 벼슬에 오르자 함께 상경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고종은 정환직을 불러 군주를 대신해 장수가 적에게 맞선 중국 고사 화천지수에 대해 이야기하며 밀지를 내렸다.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용기도 함께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1906년 영천으로 간 정용기는 영천창의소를 설치해 의병을 모으기 시작했고, 같은 해 2월 의병 1천여명의 추대로 의병 대장이 됐다. ‘영남지역 의진’이란 뜻의 ‘산남의진’이란 이름을 정해 본격적인 항쟁을 준비했다.
같은 해 4월 아버지 정환직이 경주에 구금됐다는 소식을 들은 정용기는 급히 경주로 향했지만 이는 산남의진을 막기 위한 관군의 계략이었다. 정용기는 경주진위대에 체포돼 대구경무소에 구금된 후 4개월 뒤 풀려났다. 그 후 일제 책략에 의해 쌓인 외채를 국민의 손으로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해 영천군 국채보상단연회의 회장으로 활동했다.
1907년 봄 산남의진을 다시 조직하고 7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해 포항 청하와 영천 자양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9월 포항 죽장으로 이동해 입암계곡에서 전투를 벌이던 중 일본군에게 역습을 당해 정용기를 비롯한 많은 의병이 전사했다.
또한 아들의 비보를 접한 정환직 의병장은 슬픔을 뒤로하고 계속 의병들을 지휘하며 일본군과의 싸움을 계속하다 1907년 11월 6일 현 포항시 청하면에서 일본군의 포위망을 뚫지못하고 체포돼 대구감옥으로 압송당하던중 현 경북 영천시 조양각에서 향년 64세의 나이로 총살당하게 된다.
한편 용력이 뛰어나 일기당천한 기개로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다 체포돼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 끝까지 저항하며 약관이 갓 지난 나이에 순국한 이세기 중군장이 자손들의 소재를 찾지 못하고 쓸쓸히 영천시 자양면 야산 기슭에 잠들어 있다.
이것이 두 세대에 걸쳐 의병장으로 나라를 위해 싸웠다는 뜻의 양세(兩世) 의병장 ‘양세대장’과 중군장의 내력이다
정부는 지난 1962년 정용기 선생의 공헌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영천, 영남 의병의 메카···"영천시 중심으로 산남의진 뜻 이어갈 것"
산남의진은 국운이 기울어 일제에 의해 온갖 수모를 다하다 급기야 나라의 국권이 일제에 의해 찬탈당한 암흑기에 영남지방이라는 유학의 고장에서 영남의 대부분(영천, 경주, 영덕, 안동, 밀양, 의령 등) 백성들이 호응해 창의한 지역 연합군으로서의 그 의의를 가진다. 동시에 당시 의병의 가장 큰 문제인 지휘 및 군 조직을 어느 의병보다 잘 갖춰 그당시 최신예의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맞아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위력적인 의병활동을 했다.
또한 산남의진의 활약에 자극받은 전국의 의병들로 하여금 ‘13도 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을 도모하는 기폭제의 역할을 했다. 산남의진에 참여한 많은 의병들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세력의 중추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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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장렬히 전사한 의병의 묘소를 사단법인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회원들이 참배하고 있다.[사진=김규남 기자]
임진왜란 당시 의병은 현재 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에 의해 현창되며 기념되고 외부로 알려져 우리 민족사와 향토사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산남의진은 그 치열한 활동과는 달리 역사가 임란의병에 비해 덜 알려져 잊혀진 사람들이 됐다.
이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뜻있는 사람들에 의해 1960년대 말부터 조금씩 그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또한 영천시도 최기문 영천시장이 지대한 관심을 가져 해마다 산남의진의 양세대장 및 여러 의병들을 기념하는 행사에 적극 지원 및 편의를 아끼지 않고 있다.
조충래 사단법인 산남의진 기념사업회의 부회장은 “우리 고장 영천에서 창의한 ‘산남의진’은 구한말 우리 역사에서 빠지면 안되는 중요한 역사의 한 획이다. 그러나 임란의병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고 소외되는 감이 있었으나 점차 영천시를 비롯한 주위의 뜻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차츰 알려져 가는 데 보람을 느낀다”며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산남의진’을 바로 알고 산남의진에 참여한 우리 역사의 선각자이신 의병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 숭고한 뜻을 받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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