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韓·中정상 함께 예찬한 정율성... 시대를 넘은 '음악의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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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초빙논설위원,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5-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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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정신] ③ 광주가 낳은 중국 최고의 음악가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정율성로에 설치된 정율성 동상]

중국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1914~1976년)이 ‘먼저 온 미래’가 될 수 있을까. 그에 관한 신화도, 논란도 결국 미래라는 그릇 안에서 다시 해체되고 정의될 터. 광주시는 벌써 20여년째 그 작업을 진행 중이다. 그의 생가 터였던 남구 양림동의 한 도로를 정율성로(路)로 명명했고 흉상과 시비도 세웠다. 중국인 관광객들이 빠짐없이 찾는 명소다. 해마다 그를 기념하는 음악제와 학술대회도 열린다. 정율성 브랜드화? 아니다. 광주는 그 너머를 보고 있다.

정율성은 이곳 양림동 79번지에서 태어났다. 만19세에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난징(南京)으로 건너갔고 연안(延安)을 중심으로 항일운동가 겸 음악가로 활동하다 62세 때 베이징에서 중국인으로 생을 마쳤다. 25세(1939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고, 이 해 작곡한 ‘팔로군 대합창 6곡’ 중 ‘팔로군행진곡’이 중국의 공식 군가(軍歌)인 중국인민해방군가로 채택돼 항일전쟁의 영웅이 된다. 이에 앞서 작곡한 ‘연안송(頌)’은 요즘도 중국인들의 애창하는 노래다. 군가와 가곡, 오페라 등 총 360여 곡을 작곡했다. 중국 현대음악의 3대 악성(樂聖)으로 꼽힌다.

그는 북한에서도 활동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12월 부인과 딸을 데리고 평양에 와 조선노동당으로 당적을 바꾸고 황해도인민위원회 선전부장을 맡는다. 김일성과도 면담한다. 1947년 북한군 협주단을 창설하고, 1949년 조선음악대학 작곡부장으로 북의 공식 군가인 ‘조선인민행진곡’을 작곡한다. 1950년 6‧25전쟁이 터지자 중국으로 돌아갔다가 그해 10월 중국인민지원군 창작 팀과 함께 다시 나와 북의 문예활동을 돕는다. 서울에도 잠깐 다녀갔던 그는 1951년 4월 중국으로 완전히 되돌아간다. 말년엔 문화혁명의 여파로 간첩 혐의를 쓰고 구금되고, 창작활동도 금지되는 등 극심한 고통을 겪는다.(『정율성』 김은식 2016년)

文대통령과 시진핑이 함께 불러내

사후, 신(新)중국 100대 영웅으로 선정된 정율성은 베이징 팔보산(八寶山)의 혁명열사릉에 안장됐다. 그의 비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정율성 동지는 생명을 중국인민 혁명사업에 바친 혁명가다. 인민은 영생불멸한다. 그의 노래도 영생불멸할 것이다.”(『정율성 평전』 이종한 2006년) 2014년 7월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韓‧中) 우호에 기여한 역사 속 인물로 김구 선생과 정율성을 들었다. 2017년 12월 중국에 간 문재인 대통령도 양국 역사에 기억될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정율성을 꼽았다. 두 정상이 똑같이 그를 소환한 것은 한·중 간 역사에 대한 긍정의 기억을 - 그런 기억이 얼마나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 공유함으로써 미래의 우의를 더 돈독히 하자는 뜻으로 읽혔다.

광주는 지금도 실험 중이다. 정율성을 불러냄으로써 이념과 전쟁으로 인한 과거의 상처와 단절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 차원에서 정율성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2005년 노무현 정권 때 여운형(1886~1947)과, 정율성의 동지이자 선배 격인 김산(본명 장지락 1905~1938) 등 사회주의 계열의 일부 항일 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됐으나 그는 빠졌다. 중국에서 초기에 조선의열단 활동도 했지만, 주로 중국공산당이나 팔로군에서 일했고,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탓이 크다. 더욱이 북한정권에 잠시나마 협력한 이력도 있다.

그럼에도 광주사람들은 정율성의 삶을 ‘시대의 아픔’으로 이해하고, 그걸 감싸 안고 극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비로소 광주건, 대한민국이건, 한 단계 더 성숙해진다고 본다. 우리 취재팀이 만난 많은 광주사람들은 “이런 일들은 광주니까 가능하다”고 말했다. “민주정신의 기반 위에서 이념적 유연성과 포용성을 추구하는 광주니까 정율성을 되살려내, 구존동이(求存同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새로운 한·중관계를 꿈꿀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北의 조선인민군행진곡도 작곡”

이런 믿음과 희망이 얼마나 현실정합성이 있는지 선뜻 답하기 어렵다. 미·중(美中) 신 냉전 속에서 사실상 선택을 강요받고 있는 게 작금의 우리 처지가 아닌가. 내부적으로 부정적인 시각도 만만치 않다. 2018년 8월 15일, 베이징의 한국대사관은 광복절 경축식에 정율성의 딸 샤오티(小提‧80)를 특별 초청했다. 이에 한 보수언론은 “정율성은 중국 공산당원이었고, 조선인민군 행진곡을 작곡해 김일성에게 바친 인물로, 우리 정부의 서훈을 받은 독립투사가 아니다”고 비판했다(조선일보 2018년 8월 16일자). 초청해선 안 될 사람을 불렀다는 얘기다.

광주가 이런 논란을 딛고 한·중관계의 새로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을까, 정율성이 그 징검다리가 될 수 있을까, 광주의 숙제이자 대한민국의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정율성은 뼛속까지 항일의 피가 흐르는 집안 출신이다. 아버지 정해업(1873~1931년)도 젊어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상해까지 갔던 적이 있다. 형들인 호룡, 충룡, 의은과 누나 봉은, 그리고 자신까지 5남매도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율성이 광주 숭일소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중학교를 다니다가, 중국으로 간 것도 의열단 단원이었던 셋째 형 의은을 따라서였다. 집안의 항일정신은 율성에 이르러 음악과 만나게 되고, 그 음악은 중국대륙을 울리게 된다.

정규교육 6개월, 경이로운 음악적 재능

정율성의 음악적 재능은 경이롭다. 그는 20대 초반 난징에 머물 때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던 소련 레닌그라드 음악원 출신의 크리노바 교수를 주말마다 찾아가 성악과 음악이론을 배운다. 크리노바는 율성에게 “당신은 동방의 카루소(이탈리아의 세계적 테너 1873~1921)가 될 것”이라며 이탈리아 유학을 권한다. 유할 갈 형편이 안 됐던 율성은 독학하던 중 프랑스 유학파 출신인 센싱하이(洗星海)를 만나 사사한다. 이후 율성은 1938년 3월부터 8월까지 6개월간 연안의 노신(魯迅)예술학교에서 공부한다. 제도권 음악교육은 이게 전부였다. 율성은 피아노를 제대로 배우지 못해 서툴렀던 것을 평생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음악적 성취는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정율성 연구자인 신정호 목포대학 교수(중국언어‧문화학)의 평가다.

“정율성은 니에얼(聶耳), 센싱하이와 더불어 중국의 3대 음악가로 칭송되는데 이 두 사람과 비교해 뛰어난 면이 있다. 그의 음악에는 동요, 민요. 군가, 뮤지컬, 오페라, 영화음악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망라돼 있으며 …그가 창작한 동요는 오늘날에도 중국 초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어린이들이 애송하고 있다.… 그의 음악 창작은 한‧중 문화교류의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되는데…천재적 음악가의 면모 이면에는 중국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내재되어 있다….” (신정호, 「정율성으로부터 배우는 한‧중 문화교류의 경험과 오늘의 과제」 『정율성 음악세계와 현대성의 지평』 광주학총서 9, 2018년 광주문화재단).

정율성의 음악을, 개화기 광주의 선교사촌(村)이었던 양림동에 살면서 소년 율성이 경험했던 ‘기독정신의 정서적 바탕’과, 당대의 명창 이화중선과 임방울의 판소리로 집약되는 ‘한국의 전통문화’가 함께 어우러져 ‘중국적 사회주의’가 지향하는 음악적 언어로 전환된 걸로 보기도 한다. 연구자 전인평은 그게 가능했던 이유로 “(당시) 서양음악은 중국에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서구식 군가와 학교, 기독교를 통해 유입됐고, 아편전쟁 이후 상하이, 산동 등에 설립된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악과 피아노 교육이 실시됐기 때문”으로 본다(노동은, 정직, 진인평, 윤신향, 「아시아의 내부와 외부 : 정율성과 윤이상의 노래기억」 광주학총서9, 2018, 재인용).

혁명수도 延安에서 꽃핀 사랑

율성이 혁명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연안(延安) 시절, 24세의 젊은 나이에 작곡했던, 중국인들이 불후의 명곡으로 꼽는 ‘연안송’은 이렇게 시작된다.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오르고/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치고/산과 산 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대한 도시!/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아, 연안!…. 연구자 윤신향(아시아문화원 방문연구원)은 “’연안송‘이 서구 근대의 전형적인 가요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면서 “음악은 서정가요풍, 송가풍, 그리고 두 부분으로 구성된 행진곡 풍의 중간부를 거쳐 송가풍으로 돌아옴으로써 다섯 연의 시구(詩句와 상응한다”고 설명했다 (윤신향 2018).

정율성의 일생은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이다. 피 끓는 혁명수도 연안에서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 대장이었던 딩쉐쑹(丁雪松)을 만나 결혼(1941년)에 이르게 되는 과정은 사랑, 당(黨), 이념, 정치, 그리고 권력이 버무려진 한편의 대하드라마다. 딩쉐쑹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중국 초대 총리의 수양딸로 알려졌고 뒷날 중국 최초로 여자 대사(大使)가 된다. 두 사람 사이의 유일한 혈육인 딸 샤오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오늘도 광주와 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17번지에 있는 정율성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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