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회장을 댁으로 찾아가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고령(87세)에 코로나 때문에 바깥출입을 삼가고 있었다. 인터뷰 확답을 얻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을 만들어 등기우편으로 부쳤더니 “열심히 답변을 쓰고 계시다”는 전갈이 왔다. 질문지를 보낸 지 근 한달 만에 답변서가 동봉된 등기우편을 받았다. A4용지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였다. 몇차례 교열을 본 듯 빨간 글씨로 고쳐 쓰고 오려붙인 종이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다른 인터뷰에 비해 양이 훨씬 많았지만 다석 연구에서 차지하는 그의 비중을 감안해 원문을 거의 그대로 싣는다.
-거의 매년 한 권씩 다석에 관한 책을 썼는데요. 모두 몇 권이나 펴냈는지요?
“레프 톨스토이는 체력이 좋고 소설을 많이 써 지은 책을 쌓으면 톨스토이의 키만큼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약골로 태어난 데다 인생철학을 담은 내용이 많아 다작할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20권 정도 됩니다. 각각 특색이 있어서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책은 없습니다.
마하트마 간디가 생활이 기계화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이해가 됩니다. 컴퓨터는 만지지 않았습니다. 인쇄술 발달에 컴퓨터의 공이 큰 것을 부정할 수 없겠지만요.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한 일도, 운전을 배운 일도 없습니다. 이산화탄소 과다배출로 기후변화를 가져온다니 걱정이 됩니다. 레프 톨스토이가 모스크바에서 야스나야폴리야나까지 걸어다닌 것을 어리석은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석 제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마침보람’(일종의 졸업장)을 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내가 다석으로부터 마침보람을 받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본의 아니게 다른 제자들에게 송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문화일보에 다석사상 연재를 시작할 때 이규행 당시 문화일보 회장이 ‘독자들에게 필자를 소개하는 것이 예의라서 그러는데 어느 대학을 나오셨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심코 ‘이 사람은 대학 문 앞에도 가본 적이 없고 졸업증은 다석으로부터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몇 사람이나 받았느냐고 묻길래 ‘다른 이는 없는 것으로 압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받은 날짜는 다석일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중국 선종에서는 한 선생이 여러 제자를 가르치다가 그중 한 제자에게 인증서를 주고는 그 제자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못 받은 제자들이 시샘을 해 인증서를 받은 이를 해친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공부한다면서 제 맘속의 투기심을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이 무슨 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석이 내게 내리신 마침보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눈 일이 없었습니다. 관제 엽서에 붓으로 써 우편으로 부치셨습니다. 천만 뜻밖의 일이라 펼쳐 놓고 한참 동안 들여다보기만 하였습니다. 조용히 생각해보니 이 사람에게 마침보람을 주신 스승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어버이가 나를 낳고 기른 것은 사실이나 내가 이 세상에 오고 가는데 어버이는 아무런 실권이 없습니다. 실권이 사람에게 있다면 자식을 못 얻어 상심하는 부부가 있을 수 없을 것이며 자식을 먼저 보내고 비통해하는 양친(兩親)도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런 실권이 없는 이 땅의 어버이를 내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것은 단견(短見)이요,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집안의 전등 소켓을 발전소로 아는 것과 마찬가지 어리석음입니다.
인류 역사가 몇 즈믄(천년)이 흘러갔지만 그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인물이 예수요 석가입니다. 예수가 석가보다 5 백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생각이 꼭 같습니다. 예수는 땅에 있는 아버지(어머니)를 아버지라 하지 말라고 하면서 참아버지는 하늘에 계시는 한얼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석가는 출가했다가 오랜만에 집에 와서도 아침이면 바릿대를 들고 카필라성의 민가를 찾아 다니면서 밥을 빌었습니다. 정반왕이 아들(석가 붓다)을 찾아와 ‘밥 빌어먹는 것을 그만두어라. 샤카(석가) 가문에는 거지라고는 한 사람도 없었다. 어찌하여 너는 밥을 빌어먹고 다니며 가문을 욕되게 하느냐’고 나무라자 붓다가 대답하기를 ‘나는 샤카(석가)족이 아닙니다. 니르바나로부터 온 연등불 아래의 붓다 계통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와 석가는 삶의 목적이 짐승들처럼 종족 보전에 있지 않고 한얼님(닐바나님) 사랑에 있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는 가정을 이루지 않았고, 석가는 이루었던 가정을 해체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뒤가 깨끗합니다. 공자(孔子)도 천명(天命)을 모르고서는 사람 노릇 못한다고 가르쳤는데 뒤에 와서는 한얼님 사랑은 잊어버리고 땅어버이에 대한 효도(孝道)만 내세웠습니다. 그렇게 되니 땅의 어버이에 대한 효도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석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효도는 한얼님께 하라는 것이다. 한얼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한얼님에게 최선의 효를 할 수 있다. 한얼님에 대한 정성이 결국 땅의 부모님에 대한 정성이 된다. 이 근본 이치를 몰라서 오늘날 설움을 받는 어버이들이 많아졌다. 한얼님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땅의 부모에게 불효하는 사람이 없다. 아버지 아버지 한얼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은 나다. 한얼님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한얼님 아버지를 부르는 빈 내 맘속에 계신다. 한얼님이 무엇인지 모르는 일은 끝내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와 사랑을 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 사랑의 정신이 나와야 진리의 불꽃, 말씀의 불꽃이 살리어 나온다. 사상의 나라에서는 나를 생각의 불꽃으로 태우는데 한얼님께서 나에게 진리의 생각, 곧 말씀을 살리어 준다. 나는 그 말씀 밖에 다른 것은 안 믿는다.’(류영모, <다석어록>)
서울 종로에 있던 YMCA 건물은 6·25 전쟁 때 불타버려 임시 가건물에서 다석의 금요강좌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1970년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으면서 가건물을 모두 철거하게 되었습니다. 서울 시경 뒤편에 있는 일본사람들이 쓰던 YMCA 건물로 옮겨서 다석의 금요강좌를 열기도 하고 또 다른 곳으로도 옮겨다니다 금요 모임을 쉬게 되었습니다. 묘하게도 현동완 총무가 돌아가시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30여년 동안 강사료 한 푼 안 받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한얼님의 뜻이 담긴 말씀을 전하던 모임이 끝났습니다.
그래도 나는 끈질기게 구기동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이 사람 한 사람을 방에 앉혀 놓고 스승님은 노트를 펴놓으시고 YMCA에서와 다름없이 한 시간 넘게 강의를 해주었습니다. 그러기가 몇 해였는지를 모르겠습니다만 3년 이상인 듯한데 적어놓은 것이 없어 지금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은 여느 때처럼 강의는 하지 않으시고 귀가 번쩍 뜨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박 형도 이 사람의 말을 들을 만큼 들었으니 단사(斷辭)를 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단사란 끊을 단자와 말씀 사자인데 말씀을 끊는다는 뜻입니다. 주역 계사(繫辭)에 나오는 말입니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어 기르지만 때가 되면 젖을 딱 끊어야 합니다. 늦게까지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아기를 바보로 만들게 된다고 합니다.’
스승님은 손을 들어 위를 가리키면서 ‘이제부터는 박 형도 저 위로부터 직접 말씀을 받아 듣도록 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소와 산양을 길렀습니다. 송아지가 어미소 젖을 빠는데 이따금 머리로 어미소의 젖통을 들이받습니다. 그래도 어미소는 싫어하지 않고 송아지에게 조심스럽게 젖을 끝까지 빨리는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는 금요강좌에 나가면서도 이따금 스승 댁으로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스승께서 회답을 주기도 했습니다(다석일지 4권 끝부분에 사본 자료를 볼 수 있음). 편지 속에 송아지가 어미소 젖을 빨면서 머리로 어미소 젖을 들이받는 얘기를 쓰고서 ‘제가 선생님께 성가시게 글월을 올리는 것은 금요일 스승의 말씀이 잘 나오라고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통을 들이받는 맘으로 글월을 올립니다’라고 한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신이 없었는데 그 다음주 금요강좌 시간에 일부러 이 사람 좌석으로 와서 ‘송아지가 어미소 젖을 들이받는 것을 뜸베질이라고 하는데 박 형은 뜸베질을 하려면 저 위(한얼님)에 대고 해야지 이 늙은이에게 해서 무슨 효과를 보겠어요’라고 하고는 강단으로 돌아간 일이 있었습니다.
단사 통보를 받은 이 사람의 마음은 섭섭하기만 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음을 앞두고 아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얼나(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한얼님께서 너희들이 얼나를 깨닫게 하시어라(요한 16:7, 박영호 의역)‘라고 한 예수의 말씀이 떠올라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석일지 3권 620쪽(1973.11.21.)에 다석 님의 생각을 한자로 써놓은 짧은 문장이 나옵니다. ’단사지성 수득심음 계천사명‘(斷辭至誠 收得心音 繼天嗣命). 이를 제가 우리말로 옮겨 봅니다. 단사(斷辭)를 하였으니 참에 이르러 한얼님의 말씀(맘의 소리)을 거두어 얻어서 한얼님 자손의 사명을 이어 행하라. 다석이 내게 이르신 말인 것 같습니다. 직접 듣거나 받은 일은 없습니다.
다석으로부터 단사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 뒤로는 스승을 찾지도 않았고 편지도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했습니다. 그 때는 스승 댁과 저희 집에 전화가 없을 때였습니다. 있었다고 해도 편지도 하지 말라는 말에 전화도 하면 안된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 때 함석헌 선생이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함 선생이 사상계 잡지에 기고하여 온 나라 젊은이들의 마음을 소용돌이치게 할 때입니다. 집필 전에 천안 씨알농장 안마당을 걸어 다니며 큰소리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어떤 때는 영어로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는데 나에게 <지음이 먹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집필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한얼님의 말씀을 듣는 체험을 별로 못한 이 사람으로서는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서 영감이 떠올라 생각이 술술 풀리면 한얼님이 일러주시고 불러주시는 것을 받아적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얼님이 일러주시는 말씀이 내 맘에서 얻는 복음(福音)이요 정음(正音)인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님께 배우는 대신 한얼님께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주제를 <새시대의 신앙>으로 정했습니다. 부제는 <입체적인 새로운 신관(神觀)>으로 했습니다. (탈고하여 출판하니 4.6판으로 350쪽 정도가 되었음. 현재는 절판되어 구입할 수 없음. 10페이지 정도 소개함.)
씨알(人) 큰알(大) 한알(天)
‘이 나는 누구인가? 이 나는 무엇인가? 이 나는 무엇하는가?
이 땅 위에 왔다 간 수많은 사람 가운데 이 ‘나’를 알고자 한 구도자(求道者)들이 온갖 고행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나를 모르고 제 맘대로 살은 방탕자(放蕩者)들이 온갖 추행을 일삼았으며 이 나를 바로 안 자각자(自覺者)들이 빛나는 성행(聖行)의 자취를 남겼다.
이 나를 바르게 알고자 하면 반드시 내 생명의 임자이고 근원이시며 참나 되시는 마루(머리)님이신 한알(한얼)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세 겹으로 되어 있다. 몸과 맘과 얼이 그것이다. 몸이 자랄 때는 땅의 어버이가 한얼님 노릇을 한다. 맘이 자랄 때는 스승님이 한얼님 노릇을 하고 마지막 얼이 자랄 때는 한얼님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 노릇을 하려면 몸과 맘과 얼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날마다의 명상록>에서 말하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육은 얼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으니 다석 류영모는 오늘의 교육은 도둑놈의 교육을 해 공부할수록 교만해진다고 말했다.
몸나는 몸으로 어버이의 품속에 안겨 일체감을 느낄 때 내가 어버이의 몸아들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어버이의 품 속에 안기지 못한 아이는 나란 존재에 대해서 회의를 일으켜 나에 대한 자신감을 갖지 못하게 된다. 몸나의 마르(머리)님 곧 한얼님인 어버이에 대한 회의는 곧 자신에 대한 의심이요, 나의 존재를 의심하게 되면 삶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어릴 때 어버이를 잃은 고아가 가장 가엾은 것이다. 어버이가 없는 고아는 살았으되 죽은 삶을 살게 된다. 그래 고아들이 정상으로 자라지 못하고 문제아가 되기 쉬운 것이다. 다석 류영모는 광주 동광원에서 6·25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수녀들에게 당부하기를 아이들의 맘속에 어머니상을 뚜렷하게 심어주라고 하면서 자신도 자기 맘속에 심어진 어머니의 40대의 모습이 뒤에 예수님의 상, 늙어서 한얼님의 상에 뚜렷해질 때까지 삶의 힘이었다고 말하였다. (YMCA 연경반에서) 어버이 품속에서 어버이 가슴속에서 뛰는 심장의 박동 소리를 듣고 자라는 아이는 나는 어버이에게서 나왔고 어버이를 사랑하며 높이는 효심(孝心)이 생긴다. 효도가 한얼님께 이르는 신앙의 첫걸음인 것이다.
몸나가 자랄 만큼 자라면 이제는 맘나가 자라야 한다. 어버이를 통해서도 맘이 어느 정도 자랄 수 있고 자라기도 하지만 맘나가 인격이 형성되도록 자라려면 훌륭한 스승을 만나야 한다. 제자가 스승의 맘에 안기고 스승이 제자의 맘을 안아줄 때 제자의 맘이 쑥쑥 자라서 제자의 언행(言行)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제자는 자기가 스승의 맘아들, 곧 제자가 된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옛말에도 스승의 그림자도 안 밟는다는 것이다. 스승님은 화장실에 안 가는 줄로 알았고 스승님의 방귀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기도 한다. 스승님 맘은 스승님의 생각이다. 스승님의 생각은 말과 글로 나타난다. 그래서 스승님의 말 듣기, 글 읽기를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칼라일이 ‘도서실은 교회요 독서는 예배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서 책을 밟거나 깔고 앉는 일은 대단히 불경스럽고 해서는 안될 일로 알았다.
공자의 제자 안연은 스승의 말씀을 지루해한 적이 없었다 하고 석가의 제자 수보리는 스승 석가의 말씀을 듣고서 감격하여 울었다고 한다. 제자 베드로는 스승인 예수의 말씀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으로 알았다. 마지막으로 얼나 곧 살고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한얼님의 아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땅의 아버지 어머니는 물론 스승님까지도 떠나서 한얼님의 품속인 얼나요, 허공인 한얼님의 품속에 안기어야 한다, 예수와 석가는 얼나로 솟나(깨달아) 한얼님(니르바나님) 품에 안긴 한얼님의 아들들이었다. 예수가 “아버지께서 내 안(맘)에 계시고 내(얼나)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고 한 말은 예수가 얼나로는 한얼님과 하나가 되어있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 붓다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춘다야 니르바나님이 보낸 얼나는 모든 생명 가운데 으뜸이니라. 그러므로 내 말을 믿는 것은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다. 또 모든 가르침 가운데서 제나(ego)의 자만심을 깨뜨리고 애욕과 번뇌를 없애고 나고 죽는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것은 내가 가르쳐 보인 니르바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으뜸이다.”(팔만대장경 아함경법문 제6장 제1절)’
다석 류영모도 예수 석가와 같은 진리의 말을 했다.
‘이 사람은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이러한 말을 하였다. 사람이 자고서 남은 것이 깸이다. 잠을 푹 잔 뒤에 깨는 것이다. 우리가 밤에 8시간 동안 잘 잔 뒤에 깨면 머리가 산뜻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참나인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우리가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몇 년이나 잠을 자고 있었는데 잠자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다. 한잠 푹 잤으면 깨야 한다. 게으른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얼나인 한얼님이 참나임을 아는 것이 깨는 순간이다.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것이 아니다. 몸 옷은 마침내 벗어 버릴 것이라 결국 사람의 임자는 얼이다. 사람의 생명에서 불멸하는 것은 얼나 뿐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인 한얼님이시다.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이다. 얼나는 제나(自我, ego)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形而下)의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나로는 죽을 때 얼나가 드러난다. 얼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자는 것도 멸망이다.’ (류영모 <다석강의록>·이상은 박영호 저 <새 시대의 신앙> 일부 간추림 인용)
다석으로부터 단사(斷辭)하자는 선언을 받아들이고는 4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 ‘띄운 일이 없었습니다. 새 시대의 신앙을 탈고하고 출판까지 하였으나 책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2000평 넘는 논밭의 농사를 하자니 늘 바쁘게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책 쓰는 일도 주로 겨울 농한기에 했습니다. 이웃집 사람들이 ‘어디 여행 다녀왔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봄 못자리에 볏모가 파릇파릇 자랐을 때 봄에 금요강좌에서 자주 뵙던 전병호님이 이 사람의 집으로 찾아 왔습니다. 다석이 ‘박영호 죽었는지 살았는지 통 소식이 없으니 한번 찾아보라’고 해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석 모임에는 회식하는 일이 없으니 친분을 쌓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다석이 단사하자면서 ‘찾아오지도 말고 편지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무슨 걱정을 하시다니요라고 반문하자 스승이 크게 걱정하고 계시니 한번 찾아보도록 하라는 당부를 하면서 떠나는데 그동안에 쓴 책이라면서 두 권을 드렸습니다. 한 권은 다석에게 갖다드리면서 ‘박영호는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인사말씀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때가 봄인데 느긋하게 가을 추석 때 구기동 다석 댁을 찾았습니다. 5년 가까이 못 뵈었으니 얼굴을 잊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인사 올리며 ‘박영호입니다’ 라고 하였더니 ‘내가 알지’ 하면서 힘들여 쓴 책을 전병호 님 편에 보내준 것을 잘 읽었다고 하시면서 한 가지 지적해 줄 것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형이하(形而下)로 같은 것은 한 가지 동(同)자를 쓰고 형이상(形而上)으로 같은 것은 합할 합(合)자를 쓰지요’라고 일러주었습니다. 제자로서 당신의 진리사상을 어긋나게 하거나 변질시키지는 않겠다는 신뢰감을 가진 듯 보였습니다. 사제(師弟) 사이에는 진리 정신의 일치가 가장 중요하지요. 쉽게 말하자면 이 사람은 <새 시대의 신앙>으로 마침보람을 받을 자격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석 스승으로부터 마침보람을 받는 데 중요한 몫을 한 것이 있다면 대학을 안 다니고 스스로 농부가 되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다석이 3남 1녀를 두시었는데 모두가 건강하고 수재였는데 중학교(구제 5년)까지만 공부시키고 한 사람도 대학공부를 시키지 않고서 농사하라는 바람이었습니다. 사모님(金孝貞)은 글자 그대로 현모양처(賢母良妻)였는데 일생 동안 두 번 남편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하나는 자식들 대학공부를 안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귀농한다고 천안 광덕에 농가와 농토를 사놓고 다른 사람에게 준 것입니다. 구기동에도 밭이 있어 이웃에서 일을 도와주던 젊은이(李相雄)에게 ‘광덕에 가서 농토를 짓고 살겠느냐’고 물으니 ‘그러겠노라’고 대답해서 광덕 농토를 경작케 하였는데 정식으로 소작료를 받지 않고 그곳 잣나무에서 딴 잣을 좀 가져오면 받고, 메주콩을 가져오면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상웅씨가 자기 자식들을 공부를 많이 시키지 못하여 농사짓고 살아야 하는데 제 땅이라고는 없으니 선생님의 농토와 농가를 저에게 주시면 좋겠습니다고 하자 다석이 ‘그렇게 하라’고 허락하는 말씀을 듣고 옆에 계시던 사모님이 ‘내 자식들이 있는데 다 주어버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를 했습니다. 둘째 아드님(柳自相)은 강원도 평창 대미산 자락에 화전민의 농토를 사서 귀농하였습니다. 다석은 그곳에 가서 머물기를 좋아했습니다. 사후에 지금 그곳 솔밭에 뼈를 묻고 무덤도 없이 비석만 서 있습니다. 내가 농사짓는 것을 그렇게 기뻐하셨으며 교통이 불편한 시절인데도 전병호 님을 대동해 내 집을 찾아오기까지 하였습니다. 다석일지에 보면(1970.12.18.) 내가 농사지으며 살았던 경기도 의왕의 주소를 적은 위에 <참삶>이란 주제로 시조 한 수를 써 놓았습니다.
내가 알기 쉽게 풀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지닌 이 몸이 이 세상에 있거나 이 세상 뜨거나 한얼님을 모신 우리의 얼나다. 그대 맘 가운데 얼나는 짐승인 제나(ego)의 짐승 성질을 다스려 얼나가 스스로 뜻대로 살아 자유롭다. 그래서 몸나는 얼나의 뜻을 받들어 땅 위에서 땀흘려 일을 한다. 다섯 손가락에 일하느라 땀을 쥔 손 씻고 일에서 쉴 날(죽는 날) 얼나는 위로 솟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리라.’
쓰고 보니 내가 다석으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습니다. 경애하는 스승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니 다른 것은 더 바랄 것이 없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 유명해지는 것은 이 사람에겐 아무런 의미도 기쁨도 없습니다. 다석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도 세상에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숨으려 하였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한얼님으로부터 사랑(인정)을 듬뿍 받는데 다른 무엇을 더 바라시겠습니까? 한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증거는 다석일지에 나오는 참삶이라는 시가 그 증표입니다. 그 말씀이 한얼님으로부터 받으신 것을 이 사람이 확신합니다. 그 말씀에서 한얼님의 거룩한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다석 스스로도 한얼님 아버지께서 건네주시지 않으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영감(inspiration) 이란 말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인터뷰어=황호택 논설고문·정리=이주영 인턴기자>
<박영호 약력>
-1934년 출생.
-1952년 공업학교 학생이던 17세에 학도의용군으로 징집됨.
-1953년 전쟁터에서 숱한 죽음을 목격하고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걸렸으나 톨스토회의 <참회록>을 읽고 마음의 평화를 찾음
-1956년 사상계 신년호에 실린 함석헌의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읽고 감동 받아 편지를 왕래하다 대구 YMCA에서 강의하러 온 함석헌을 처음 만남.
-1956년 함석헌의 천안 씨알농장에서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함석헌의 강의를 들음. 이때 유영모라는 이름을 처음 듣게 됨.
-1959년 함석헌의 실덕(失德)을 확인하고 씨알농장을 떠나 경기도 의왕에서 농사를 지으며 매주 금요일 서울 YMCA를 다석 연경반에 나감. 1963년 연경반 강의가 중단된 뒤에도 구기동 다석 집을 찾아가 배움.
-1965년 다석으로부터 ‘단사(斷辭)’라는 말을 듣고 스승 댁 출입을 끊고 혼자 공부.
-1970년 다석과 단사한 5년 동안 집필한 첫 책 <새 시대의 신앙> 펴냄.
-1970년 다석에게서 마침보람(졸업증) 봉함엽서 받음.
-1985년 <다석전기> 출간. 1971년부터 10년간 자료를 준비하고 1981년 글을 쓰기 시작해 탈고까지 13년이 걸림.
-1994년~1995년 문화일보에 <다석의 생각과 믿음>을 325회에 걸쳐 연재.
-<다석사상 전집> 등 저서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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