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2021년 4월28일) 기증을 밝힌 이건희컬렉션 고미술품 21600여점 중에서 으뜸은 ‘인왕제색도(국보216호)’이다. 이번 기증 작품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79.2*138.2cm)다. 모두 합쳐서 10조원대에 이른다는 기증 컬렉션 중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작품으로 꼽히는 ‘인왕제색도’의 가치는 어디에서 나올까.
우선 이것부터 짚고 가자. 삼성이 어떻게 이 작품을 수장하게 되었을까. 이 작품은 서예가이자 수장가인 손재형(1902~1981)이 수집해서 지니고 있던 것으로 1958년 정치에 투신하면서 선거자금 마련을 위해 잡혔다가 되찾지 못하여 시중에 나온 국보급 예술품(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국보217호), 김홍도의 군선도 병풍(국보139호)) 중의 하나다. 이들 세 작품은 이병철 삼성창업주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 당시 삼성가의 예술 안목과 문화투자 역량이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다.
1. 인왕제색도는 친구를 생각하며 그린 우정작(友情作)일까
이 작품은 1751년(영조27년, 정선 76세) 윤5월 하순에 그려졌다고 작품에 기록되어 있다. 죽어가는 친구를 생각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어왔다. 겸재 정선(1676~1759)과 절친했던 사천 이병연(槎川 李秉淵, 1671~1751)이다. 사천은 겸재와 함께 김창흡의 제자로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다. 사시겸화(槎詩謙畵, 사천의 시와 겸재 그림)의 빼어난 궁합은 조선 영정조시대 진경르네상스를 이끈 동력이었다. 그런 사천의 죽음과 겸재의 걸작을 연결지은 ‘스토리’는 인왕제색도의 인간적 훈기를 크게 돋웠다. 이 주장은 간송미술관의 최완수 선생에게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겸재의 한양진경(최완수 집필, 2004)’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사천은 겸재가 76세 나던 해인 영조 27년(1751) 신미 윤5월29일 81세로 세상을 하직한다. 겸재는 그 반쪽을 잃은 슬픔을 이 ‘인왕제색’으로 표현한 듯 하다. ‘신미 윤월 하완(하순)’이라 하여 바로 사천이 돌아간 그 시기에 그린 것으로 제작시기를 밝혀놓았기 때문이다. 혹은 사천이 소생할 가망이 없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육상궁 뒤편 북악산 줄기 산등성이에서 인왕산 쪽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인데 그의 시계는 발 아래 북악산 밑에 있는 사천의 집까지 포괄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 등성이 위에서 사천과 함께 노닐며 내려다보고 건너다보던 그 정경을 한 화폭에 모두 담아 사천과의 평생 추억을 함축하려 했을 것이다...이 시기는 겸재의 진경화법이 최고로 무르녹아 가경(佳境)에 이르던 때였는데 그가 지음(知音)의 마지막 공감을 얻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린 그림이었다면 어떻겠는가.”(32~33쪽)
이런 인간적인 창작동기를 담았다는 주장에 힘입어, 이 그림에는 묵직한 슬픔이 배어 있으며 거실에 걸어놓고 편안히 감상하기에는 왠지 부담스러운 ‘감정적 무게’가 담겨 있다는 감성적 화평(畵評)도 등장했다. 물론 붓을 든 계기를 270년 뒤의 우리가 섣불리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겸재가 스스로의 화풍을 총 집결하여 주체적인 진경산수를 드러낸 회심의 대작인 '면모'가, 그런 스토리에 가려 오히려 광휘의 조도(照度)를 낮추는 결과가 되었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오른쪽에 있는 기와집이 이병연의 집이라고 본 것도 무리가 있다. 육상궁(현재의 칠궁) 위에 있었던 그의 집이, 화면에 등장하기에는 지리적으로 어색하다는 것이다. 이 집은, 이병연의 집이 아니라, 당시에는 유명했던 인왕산의 벤치마크같은 집이었을 수 있다. 아픈 친구를 위해 그린 그림으로는 너무 사이즈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사경을 헤매는 그에게 필요한 건, 위압적일만큼 엄청난 대작(大作)이 아니라 환자의 절망감을 위로해줄 정도의 소소한 작품이 제격이 아니냐는 얘기다. 한편 최근 이병연의 한산이씨 족보를 검토해보니, 그의 죽음이 윤5월 29일이 아니라, 그해 1월4일로 되어 있었다는 주장(명지대 이태호 교수)이 등장했다. 친구가 타계한지 6개월쯤 지난 시점에 이 그림이 그려졌다는 얘기다. 그의 죽음과 그림의 연관성이 미약해질 수 밖에 없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
2. 인왕제색도는 왜 한국 최고의 그림일까
'선현후겸(先玄後謙)'이란 말이 있다. 조선 초기엔 현동자(玄洞子, 안견)요 후기엔 겸재(謙齋, 정선)이란 뜻으로, 조선조 회화의 2대가(大家)를 가리킨다.
안견은 ‘몽유도원도’를 그린 화가로, 중국 곽희 그림을 바탕으로 독자적 화풍을 열어 북종화(北宗畵)의 거장으로 꼽힌다. 당시 재능의 기준이었던 회화기술과 수련의 성취에 있어서 중국인들도 옷깃을 여민 대가이다.
한편 정선은 조선 진경산수라는 주체적이고 독창적인 장르를 만들어냈다. 그는 남종화(南宗畵, 문인화)의 거맥으로 깊은 교양을 바탕으로 시대적 작가정신을 실천해 독보적인 회화정신을 창안한 화가다. 조선 회화에 단 하나의 정수(精髓)를 꼽으라면 겸재로 수렴된다. 그런 그의 붓끝에서 나온 것 중에 가장 높이 올려져 있는 작품이 인왕제색도다.
한 사람이 탄생하기 위해선 한 시대가 필요하다. 한 작품이 탄생하기 위해선, 그 한 사람의 삶과 열정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리는 작품을 만나면서, 그 작가를 유추하고 그 작품과 작가를 통해 시대를 살핀다. 조선이란 나라가 인문(人文)의 성숙 속에서 자아감과 주체성을 찾아가던 부흥의 시대가, 통찰과 창의를 겸비한 겸재를 배출했고, 겸재가 평생의 고난과 도전과 숙성을 통해 안목과 기량을 익히게 된 말년에 이르러 '가장 조선적인 산수화'를 그리겠다고 벼른다. 맑은 날이나 흐린 날이나 낮이나 밤이나 바라보고 쳐다보았을 인왕산은, 그의 내면 속에 솟아오른 자아를 닮은 심산(心山)이었다. 조선의 강기(剛氣)와 부드러움을, 그 뚝심과 미감을 갖춘 산이기도 했다.
산수화는 원래 선계(仙界)를 그리워한 인간의 꿈이 그려낸 ‘정신의 여행도(旅行圖)'였다. 세상을 떠난 탈속(脫俗)의 염원은, 굳이 산으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방안에 누워서 상상으로 노니는 대리만족물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와유물(臥遊物)이라 했다. 산수화는 누워서 노닐며 즐기는 '옛사람들의 가상현실'이다.
중국에서 온 정형산수화는 도판(圖版)으로 된 ’중국 산수(山水)‘였고, 이 땅과는 상관없는 관념적인 경관이었다. 조선 개창 이후 350년은, 우리 눈앞에 우리의 산이 있음을 깨달은 ’그림의 개안(開眼)‘이 느리게 진행된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의 산수가 새로운 와유물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사람 중에서 가장 능동적으로 움직인 사람이 겸재였다. 때마침 시절이 무르익고 있었다. 영정조시대 르네상스의 기운이 흐르면서 서화(書畵)에 대한 애호가 폭발했고 문화적인 주체감각과 함께 조선산수화의 새벽이 동트고 있었다.
그해 초여름 76세의 겸재는 붓을 들었다. 이 노화가는 한미(寒微)했던 양반가에서 태어나 처절한 '돈벌이 화업(畵業)’으로 끝내 집안을 일으키고 시대를 풍미한 지난 날을 돌아보았다. 70세 때(1745) 5년 근무한 양천현령에서 물러난 뒤, 인왕산 아래 순화방 인왕곡(현재 옥인동, 군인아파트가 있던 자리)의 인곡정사에 솟을대문을 달아 증축했다. 퇴계의 ‘회암(주자)서절요서(序)’와 송시열의 발문을 받아 이를 증명하는 겸재화첩과 함께 책(퇴우 이선생 진적첩)으로 엮은 일은, 외조부댁(풍계유택, 박자진(1625~1694)이 겸재의 외조부)이 소장한 주자서(書)의 권위를 한껏 드높였다. 평생 명문가 의식의 결핍을 느끼며 살아야 했던 겸재에겐 신분의 높이를 단숨에 회복하는 일생의 쾌거였다.
노경(老境)의 그는 이제, 스스로가 깃든 삶의 터전(자택인 인곡정사)을 기념비적인 '와유물'로 남기고 싶었다. 안개비 뿌린 날이었다. 평생을 통해 어깨 속에 쟁여놓은 화력(畵歷)을 꺼내고 풀어내리라. 그는 눈앞의 인왕산을 그윽히 바라본 뒤 잠시 눈을 감는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마음을 욕심껏 풀어놓아도 천하의 법도를 절로 지키는 경지, 70의 나이를 뜻함)의 진경도(眞景道)가 문득 가슴 속에 사물거렸다. 당시 이웃에 살던 화가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은 “인왕산 아래 유거하던 겸재가 산을 마주 대하고 필묵으로 자가흉중성법(自家胸中成法, 스스로 창안하여 가슴 속에서 이룩해낸 화법)의 그림을 그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겸재 이전에는 없던 그림이 탄생하고 있었다. 자가흉중성법. 조선르네상스가 회심의 화폭에서 완결되는 순간이었다.
3. 인왕제색도 속에는 호랑이가 꿈틀거린다
인왕제색도를 보면 왜 풍경을 넘어서 알 수 없는 감흥이 일어날까. 기초적인 비밀은 상관하찰(上觀下察)에 있다. 인왕산은 겸재의 집에서 '올려다본 경관'으로, 그리고 아래에 있는 집 주변은 '내려다본 시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움직이는 시점을, 관객에게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마치 시점이 저절로 이동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방식이다. 과학적 일점투시법이 그때도 없지 않았지만, 그는 의도적으로 시점을 뒤틀어 생동감을 창조해냈다. 이것이 겸재의 창조적 실험이다.
인왕산은 흰색 화강암으로 이뤄진 골산(骨山)이다. 이름이 인왕(仁王)인 까닭은 불교의 수문신장(守門神將)의 이름을 딴 것이다.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도 불리기에, 금강산과도 같은 맥락의 이름이다. 북악을 등에 진 경복궁에서 보자면 우백호(右白虎)에 해당한다. 이 산의 이미지가 호랑이가 된 것은 그런 점에도 있다. 실제로 이 산은 호산(虎山)이기도 했다. 정선이 살던 숙종과 영조 시절에도 인왕산 호랑이가 도성에 내려오는 호환(虎患)을 겪었다. 고종 때에는 경복궁 앞에까지 호랑이가 뛰어들어 사람들을 기겁하게 했다.
묵직한 괴량감(塊量感)은 인왕산 경관의 핵심이다. 희끗희끗한 바위는 바로 백호(白虎)의 꿈틀거리는 동세(動勢)다. 묵색쇄찰법(墨色刷擦法)이 바로 이것이던가. 짙은 먹으로 거침없이 쓸어내린 한 덩이의 산기운이 우렁차다. 서울의 뒷배를 이루는 북악과 인왕과 북한산이 자아내는 이미지의 핵심은 작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암석지형의 골격이다. 겸재는 여기에서 가장 조선다운 당찬 기세를 포착했던 듯 하다. 나는 착시인듯 인왕제색도에서 백호의 강인한 어깨죽지가 꿈틀대는 걸 느낀다.
이 대목을 설명하는 데는, 미술사학자 이동주(1917~1997)의 탁월한 표현이 요긴하다. "겸재는 실경의 한 특색을 용감하게 뽑아서 그림화하여 과장하였다....(그는) 한국 산천의 한 모습을 암산·암벽과 같은 검고 거센 괴량과 또 나무 없는 나산(裸山)의 황량을 흰 흙색과 미점으로 이해하였는데, 이러한 시감(視感)의 강조는 필연적으로 양감의 강조를 가져오고, 그리고 양감의 강조는 결국 필세가 보태주는 중적(重積, 겹쳐쌓음)과 흑백의 대조에서 화면 구성의 핵심을 구하게 된다. 이 결과 겸재에 있어서는 왕왕 화면 공간의 깊이가 희생되고, 그 대신 양감(量感)이 가장 중점적으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나라의 옛그림'(1995년 증보판) 243~244쪽)
이윽고 비에 씻겨 말쑥해진 암면(巖面)이 붓질을 아끼며 서글서글하게 골짝골짝을 품어냈다. 붓자국은 널찍널찍하면서도 호쾌하게 묵면(墨面)을 만들어 박진감을 준다. 갈필로 물결치면서 꺼칠꺼칠한 산의 면모를 표현하는 피마준(披麻皴), 바위 이끼를 표현한 태점(苔點)도 기이해졌다. 상경(上景)이 활달한 가운데, 산허리를 감아오르는 운무(雲霧)는 풍경의 소란을 진정시킨다. 마치 숲속에 거대한 호랑이를 숨긴 듯 산은 신령해지고 으슥해진 것 같다. 겸재 자택인 인곡정사를 두른 솔숲은 속도감 넘치는 편필과 묽은 횡점이 인상적인데, 살짝 번지는 기법으로 그윽한 느낌을 자아낸다. 스스로의 은처(隱處)를 내려다보는 겸재의 자족(自足)한 시선이 절로 느껴진다.
힘센 기운은 부드러움이 감싸고, 빠른 것은 여유로운 것이 품으며, 어지러운 것은 단순한 것이 스며들 듯 풀어낸다. 생성화육(生成化育)과 음양의 조화가 화폭을 일으켰다 진정시켰다 한다. 수십년 유람 습작으로 익힌 붓끝이 인왕산의 정령(精靈)이 된 듯, 흐린 풍경 속으로 달려들고 튀어나온다. 인왕산만이 튀어나온 것만이 아니라, 조선산수가 지니고 있는 모든 정기를 호출하고 소환하는 현장인지도 모른다. 겸재는, 진경(眞景)의 전위와 경계를 무심의 붓질로 밀어내고 있다.
경기중고등학교가 있던 북촌 화동의 정독도서관 마당에는 겸재인왕제색도비가 서 있다. 석조물에 인왕제색도가 새겨져 있는데, 1992년 7월15일 문화부 의뢰로 세운 조각가 김영중씨의 작품이라고 한다. 여기에 이 비석이 서 있는 까닭은, 인왕제색도가 이 지점에서 보는 풍경과 동일하다는 주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겸재는 인왕산을 그리기 위해 경복궁을 지나 이 자리까지 걸어와서 그 실경(實景)을 보며 작품을 구상했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뷰’가 복합적인 시선을 활용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림의 구도를 보고 화가의 조망 위치를 상정한 것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한 측면이 있다.
4. 이 그림에는 원래 영의정 심환지의 발문이 있었다
인왕제색도에는 원래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 1730~1802)의 발문이 붙어있었다. 영의정에 오른 인물로 노론 벽파의 영수였던 사람이다.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이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발문이 있었다고 한다.
삼각산 봄구름 비 보내 넉넉하니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 빛 그윽한 집을 두른다
주인 노인은 필시 깊은 장막 아래에 앉아
홀로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를 보고 있겠지
- 임술(1802) 초여름 하한(下澣, 하순)에 만포가 쓰다
華岳春雲送雨餘(화악춘운송우여)
萬松蒼潤帶幽廬(만송창윤대유려)
主翁定在深帷下(주옹정재심여하)
獨玩河圖及洛書(독완하도급낙서)
화악(華岳)은 삼각산을 가리키던 옛 표현이다. 두 번째 구절에 있는 ‘만 그루 소나무의 푸른 빛이 둘러쳐진 그윽한 집’이 의미심장하다. 이 집이 누구 집인가. 주인은 장막 아래에 앉아 홀로 하도와 낙서를 읽고 있다고 했다. 하도는 고대 중국 복희씨가 황하에서 얻은 그림이다. 그리고 낙서는 하우씨가 낙수에서 얻은 글이다. 그림은 하늘의 계시를 담고 있었고, 글은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을 담고 있었다. 이런 그림과 글을 보는 이는 누구일까. 심환지는 그림 속의 집이, 겸재도 사천도 아닌 조선 국왕급의 어떤 이가 기거하는 상징적인 곳으로 보고 있는 듯 하다.
심환지는 겸재의 득의작들을 수집한 대수장가였다. 충남 당진의 만포 후손들은 이 그림을 사당에 모시고 제사까지 지냈다. 물론 겸재의 작품을 모셨다기 보다는 심환지의 친필을 모신 것이다. 한때 인왕제색도는 심환지에게 있었고, 최난식-진호섭(개성)을 거쳐 6.25 이후 삼성가로 들어간다.
5. 금강산에서 인왕산까지, 겸재가 달려온 진경인생
겸재의 진경행로(眞景行路)를 살피기 위해서는, 그의 삶을 일별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조선후기 화단에서 각광을 받은 직업화가다. 김홍도나 신윤복은 중인 신분이었으나 겸재는 한미하지만 양반 출신이었다. 벼슬이 종2품 동지중추부사에까지 올랐다. 북악산 남서쪽 자락인 순화방 유란동(종로구 청운동 89번지, 경복고 부근)에서 태어났다.
14세때 아버지를 여의고, 오직 먹고살기 위해서 그림을 그려 파는 화가가 되었다. 이번에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오른 윤여정씨가 생계형 배우였다고 고백했듯, 겸재 정선 또한 문자 그대로 ‘생계형 화가’였다. 그 또한 조선 최고의 성취를 이뤄냈으니,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윤여정씨와 오버랩 되는 측면이 있다.
초반에 생계가 막막했던 그에게 행운이 있었다면, 태어나 살았던 거주지가 마침 뜨는 신흥 안동김씨(장동김씨라 불렀다)들의 세거지(世居地)였던 점이었다. 이웃에는 김수항과 여섯 아들(창집, 창협, 창흡, 창업, 창즙, 창립)이 살고 있었다. 김창흡은 그의 스승이 되었고, 김창업은 그의 작품 ‘해악전신첩’을 청나라 연경으로 가져가 중국 화가에게 품평을 받아주는 역할을 한다. 겸재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겸재는 또한 영조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 세제(世弟)이던 시절 겸재에게 그림을 배운 영조는 이후 왕이 되어서 그의 후견인이 된다. 그의 호를 겸재(謙齋)라 지어주고, 재능에 대한 질투를 잘 극복해내기를 바란 것도 영조였다. 이후 그가 화업(畵業)을 이루도록 산수가 빼어난 지역의 지방관으로 발령을 내주기도 한다.
18세기 후반 행세깨나 한다는 집의 서재엔 겸재화 한 폭이 안 걸린 곳이 없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400여 점에 달했고, 그를 따르려는 이들이 겸재화파를 이뤘다. 심사정, 강희언, 최북, 김홍도, 이인문, 김석신, 이재관이 뜻을 이었고, 문인화가 강세황, 이윤영, 정수영도 겸재바람에 붓을 보탰다. 화가로선 더할 나위 없는 행운과 다복(多福)과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예술의 측면에서, 겸재의 생을 관통하는 핵심은 '산'이며, 그중에서도 금강산이다. 겸재는 30대때 스승 김창흡 덕분에 금강산 여행을 하게 된다. 36세 때의 일이다. 이때 그는 ‘신묘년 풍악도첩(보물 1875, 국립중앙박물관)’을 그렸다. 이때는 다른 제자들과 동행하는 일정을 따르다 보니 실컷 보고 실컷 그리지 못했기에, 겸재는 이듬해인 1712년 동생과 함께 한번 더 금강산 여행을 한다. 이때 그린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이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청나라에서 이 그림을 본 화가들이 “공재(윤두서)를 능가했다”고 호평을 쏟아냈다. 이 소리를 들은 공재가 상심하여 고향으로 낙향하는 일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후 ‘금강산’은 화인(畵人) 겸재에게 일생을 따라다니는 중요한 ‘인생 화두(畵頭)’가 되었다. 59세 때 포항 청하현감으로 근무하면서 그는 ‘금강전도(국보 217호)’를 그린다. 포항 내연산폭포 그림을 그리면서, 금강산의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72세 때는 해악전신첩을 떠올려, ‘정묘년 해악전신첩(보물 1949호, 간송미술관 소장)‘을 그린다. 그가 생애를 통해 집착한 ’금강산도‘는, 조선의 산에 대한 그의 감각과 애정을 드높였다.
우리가 늘 만나는 산이야 말로, 풍성하게 그려낼 가치가 있는 진정한 경관이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반드시 실경에 천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산이 담은 정신과 가치와 생기와 영성까지도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 바 진경(眞景)에 눈을 뜨는 과정이었다.
’경교명승첩(보물 제1950호, 간송미술관, 친구 사천 이병연은 이 작품에, 천금으로도 전할 수 없는 보물(千金勿傳)이라고 새긴 인장을 찍었다)‘을 생산해낸 경기도 양천현감을 끝으로, 70세의 겸재는 관직을 마무리했다. 그리고는 동쪽 기슭 인왕골짜기에 있는 ’인곡정사‘로 와서 여생을 보낸다.
그에게 이제 인왕산과 세검정, 백악산(북악산)은 조선의 정신을 이루는 중대한 산령(山靈)으로 날마다 다가왔을 것이다. 거기에 '인왕'은 '금강'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84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인곡정사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며, 그가 달려온 진경의 삶을 완결하고자 했다. 그 결과가 그 비오는 날의 꿈틀거리는 인왕(仁王)이었다.
거대한 호랑이와 씨름하듯, 불세출의 조선천재 겸재는 젖은 화강암 덩이를 움켜안고 조선 역사상 처음 보는 서울의 ‘살아있는 큰 바위 얼굴’을 세상에 그려냈다. 이것이 얼마 전, 삼성이 내놓은 ‘인왕제색도’의 정체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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