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 이상국의 뷰] 어버이란 무엇인가, 영조대왕과 세 마디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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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논설실장
입력 2021-05-0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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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대왕 어진]

통한의 어버이...세 마디의 절규

"저승의 어머니를 생각하며 한밤 중에 눈물을 삼킵니다"
"아바님, 잘못하였사오니 이리 마옵소서"
"옹주여, 아비가 왔노라 제발 숟가락을 들라"





1. 무수리 어머니 숙빈최씨에게 제문을 올리다

2006년 어버이날 무렵, 영조임금(1694~1776)이 어머니에게 바친 제문이 공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1670~1718)는 일곱 살에 궁에 들어와 숙종비 인현왕후 처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무수리였다. 무수리는 궁궐에서 부리던 하녀를 말한다. 그녀가 숙종의 성은을 입게 된 것은, 1689년 인현왕후가 폐비된 뒤 왕비의 생일상을 차려놓고 홀로 눈물 짓는 모습이 왕의 눈에 띄어서였다고 한다. 이 우연한 총애로 태어난 사람이 영조이다. 스물 다섯살에 어머니를 여읜 영조의 슬픔은 컸지만, 그는 제사를 지내기도 어려웠다. 한 나라의 국왕으로 일개 후궁의 제사를 직접 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숙빈최씨 치제문초'를 쓴 것은 1726년, 어머니 가신지 8년째, 왕위에 오른지 2년째 되던 해였다.

'국왕 금(영조의 이름)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영전에 밝게 고합니다. 아, 소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무술년(1718년) 이후로 세상 살 생각이 모두 없어졌습니다...지금은 사계절에 지내는 제사조차도 직접 행하지 못하니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영혼은 어두운 저승에서 반드시 서운해 하실 터입니다. 항상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한밤 중에 눈물을 삼키곤 합니다. 아, 오늘 이 술잔에 그동안 펴지 못했던 마음을 폅니다.'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를 향해, 만인지상의 왕이 바치는 노래는, '효도에는 조건이 붙을 수 없다'는 도덕교과서의 컨셉트를 힘있게 되살려낸다.


2. 사도세자, "아바님 잘못하였사오니 이리 마옵소서"

영조는, 어버이날에 등장할 '모델'로는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는 둘째 아들 이선(사도세자,1735~1762)을 쌀뒤주에 가둬 죽였다. 1762년 여름의 일이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이렇게 적고 있다.

'동궁(사도세자)께서 영조의 부름을 받아 나가시자마자 임금께서 몹시 노하신 음성이 들려오니, 휘령전이 덕성합과 멀지 아니하여 담 밑에 사람을 보내본 즉, 벌써 용포를 벗고 엎드려 계시더라 하니 큰 처벌이신줄 알고 눈앞이 캄캄하여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거기 있어도 소용이 없으므로 세손(나중의 정조대왕)이 계신 데로 와서 서로 붙들고 어찌할 줄 몰랐더니, 오후 4시 쯤에 내시가 들어와 궁중의 요리장의 쌀 담는 궤를 내라 한다 하니 웬 말일까. 당황하여 내지 못하고 세손이 망극한 일이 있는 줄 알고 그 문 안에 들어가 "아비를 살려 주옵소서."하니 영조께서 나가라고 하시며 엄하게 꾸중하셨다. 할 수 없이 나와서 왕자의 재실에 앉아 계셨으니 그때 그 광경이야 고금천지간에 유례가 없었다."

혜경궁 홍씨는 이날 숭문당을 지나 휘령전으로 나가는 건복문 밑에 서 있었다. 귀에는 영조대왕이 칼 두드리는 소리와, 영조의 아들이자, 홍씨의 남편인 동궁이 "아바님, 아바님 잘못하였사오니 이제는 하라 하옵시는 대로 글도 읽고 말씀도 잘 들을 것이니 이리 마시옵소서."하는 소리가 들렸다. 홍씨는 죽으려 칼을 들었으나 옆에서 빼앗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어찌하여 영조는 자기 아들을 살인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세자 이선은 영조가 마흔을 넘어 낳은 아들이었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요절한 뒤에 태어난 까닭에, 이선은 태어난지 1년 만에 왕세자에 책봉된다. 어릴 때부터 영특해서 영조의 총애와 신뢰를 한 몸에 받았다. 1749년(영조 25년) 임금은 왕세자에게 정사를 맡긴다.

이때 계비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을 비롯한 노론 일파가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기 시작한다. 영조가 왕세자를 크게 꾸짖는 일이 잦아지고, 이후 이선은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는 등 왕세자의 기행(奇行)이 잇달아 발생하자 영조의 분노가 점차 극에 다다랐다. 1761년, 정순왕후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왕세자의 나쁜 짓을 열가지로 나눠 상소한다. 영조는 왕세자에게 자결명령을 내렸고, 듣지 않자 뒤주에 가둬 죽게 한다. 그때 나이가 27세였다.

사도(思悼)는 왕세자가 죽은 뒤 영조가 내려준 시호이다. '슬픔을 생각함'이란 그 의미는 영조의 통절한 뉘우침을 담은 것이었으리라. 한때 이 뒤주살해 사건을 군주의 지엄한 훈육으로 이해하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대체로 정치적 음모에 의해 사도세자가 희생되었다고 보는 견해들이 많아졌다. 이 여름날의 영조를 생각하면 막내딸 코델리어의 시신을 안고 황야를 헤매는 리어왕이 떠오른다. 진정으로 효심을 가진 딸을 알아보지 못한 왕은 다른 두 딸의 학대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진실'을 알게되지만 그때 이미 사태는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리어왕의 거대한 분노와 끝없는 슬픔의 장면은, 저 영조대왕의 뉘우침에 비하면 사소해 보이기까지 한다. 무수리 어머니에 대해 절을 올리는 영조대왕의 모습과, 격분과 미망에 사로잡혀 아들을 죽이던 영조대왕의 모습은, 한 인간 속에 깃든 '여러 겹의 인간'을 느끼게 한다. 지하에 있는 그가 어버이날에, 모범 효자로 등장했다는 사실을 알게된다면, 마음이 어떨까.



3. 옹주여, 제발 숟가락을 들라

예산 추사고택 옆에는 추사 김정희의 증조할머니이자 영조의 둘째딸인 화순옹주(1720~1758)의 열녀문이 서 있다. 왕의 딸이 열녀가 된 것은 조선역사상 그녀밖에 없다. 화순옹주는 13세이던 1732년(영조8년) 추사의 증조부인 김한신(월성위라 불린다)과 결혼한다. 26년 뒤인 1758년 1월4일 38세의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옹주는 슬픔이 극에 달하여 곡기를 끊었다. 드러누워 그대로 죽기를 자처하자, 주변에선 온갖 말로 음식을 권해보지만 그녀는 한 방울의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단식 7일째 되던 날 아버지 영조임금은 군주의 체통도 내려놓고 딸의 사저로 찾아갔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딸에게 말했다. "옹주여, 제발 숟가락을 들라." 아버지의 간청에, 미음 죽 위에 놓여있는 그 숟가락을, 옹주는 마지못해 들었다. 죽을 입에 넣는 듯 했으나 그녀는 모두 토해내고 말았다. "마마, 미음이 목구멍을 넘지 못하오니..." 다혈질의 왕은 울컥 화를 내며 "어찌 그러하냐? 아비의 명이 들리지 아니하는가?"라고 채근을 했지만, 옹주는 눈물만 흘리며 다시 숟가락을 놓았다. 한숨을 쉬며 왕이 떠난 7일 뒤, 그러니까 그녀가 식음을 전폐한지 14일째 되던 날에(1758년 1월17일) 옹주는 사랑하는 남편의 길을 따라가고 말았다.

이후 신하들이 왕에게 화순옹주 열녀문을 세우자고 간했다가 노여움을 사서 귀양을 가기도 했다. 아비의 말도 듣지 않고 자진한 여식을 어찌 열녀라 하겠는가. 추사고택 옆의 열녀문은, 영주가 돌아간 뒤 정조에 의해 세워졌다.

세상의 일이 맘대로 되는 것이 많지 않지만, 그중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일 또한 그리 만만하지 않다. 부자유친(父子有親)하는 오륜의 원론이 뜻한 바 대로 온전히 화합하는 복을 누리는 이 또한 많지 않다. 군왕조차도 제 의욕대로 못했던 일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저 무탈하고 그저 덤덤하여 살아주고 따라주고 돌아봐주는 것이 고마운 일인지 모른다. 무수리 어머니에 대한 깊은 애련, 아들에 대한 집착과 불같은 분노, 눈을 뜬 채 딸이 자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절망과 미련. 조선의 군주 영조를 둘러싼 이 절박하고 처절한 소용돌이를, 어버이날에 문득 돌이켜 보게 된다.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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