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金忠顯·1921~2006) 선생은 이마와 목으로 흘러내리는 땀을 손수건으로 찍어내며 “아 여기가 맞는데”를 연신 되뇌었다. 36년 전 어느 초여름, 자하문터널을 지난 산 중턱 길들은 참으로 낯설기만 했다.
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에서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 화첩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유준영(兪俊英·1935~) 교수 조교였던 필자가 이 대가들의 ‘청풍계’ 확인 작업에 따라나선 날이었다. 벼랑에 큰 글씨가 있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큰 절벽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이었다.
“아 저렇게 됐네.” 일중 선생의 손짓에 눈을 주니 자동차 한 대가 회전하여 나올 수 있는 둥글고 자그마한 마당 건너편에 나지막한 철문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바위벽이 보였다.
‘백세청풍(百世淸風)’. 시원한 네 글자였다. 초여름의 그 일정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정선의 그림은 실지로 어디서 그렸는지, 어디를 그렸는지 주의를 기울이면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있는 진경산수이기 때문이다.
정선은 지금의 청운동 부근에 살다가 말년의 30여년을 지금의 옥인동인 인왕곡에 살았다. 인왕산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백세청풍’ 글씨가 있는 벼랑 아래 18세기 서인 노론의 집결지였던 김문의 큰집들이 자리하였고 그 건너편에도 노론과 소론들이 기거하였다.
정선은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고 1745년 1월에 퇴직한 후 그동안 모은 돈을 들여 솟을대문을 세우고 여느 사족들과 이웃하며 깃들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평생 인왕산 근처를 많이도 그렸다.
규모가 크거나 볼 만한 작품들은 대개 제발(題跋)을 통해 제작 이유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겸재 만년의 득의작이라 일컫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누구를 위한 그림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으로 갈리는 것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이 겸재 교유의 장소이자 자신과 친우들의 거주지인 탓에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751년 윤5월 하순이다.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仁王霽色 辛未閏月下浣)’과 ‘겸재’를 먹으로 적고 아래쪽에 ‘정선(鄭敾)’과 ‘원백(元伯)’이라는 네모난 도장을 붉은 인주로 찍었다.
최완수 선생은 그림이 그려진 날짜에 주목하여 윤5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이병연(李秉淵·1671~1751)을 위한 그림으로 보았다. 시와 그림을 서로 교환하며 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병석에 눕자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거닐던 북악산에 올라 육상궁 뒤쪽에 있는 그의 집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겸재의 독창성이 집약된 진경산수화의 정점이라 하였다. 임종을 앞둔 절친에 대한 절절함이 배어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한편 홍선표 교수는 “겸재가 자신의 집인 인곡정사와 그 주봉인 인왕산의 경관을 기념비적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며 겸재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보았다.
한미해진 사대부 집안 출신의 겸재는 관직과 그림으로 재물도 모았다. 외가로부터 '주자서절요'를 물려받자 1746년에 이황·송시열의 유거처와 외조부 댁을 그린 ‘풍계유택도’,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도’를 하나의 화첩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그림도 장맛비가 내린 뒤에 “안개 걷히는 인왕산의 기세”와 자신의 집의 운치를 함께 담은 욕망의 표현인데, 증거로 집안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또 1739년에 도승지에서 물러난 이춘제(李春躋·1692~1762)가 인왕산 아래 자신의 집에 다섯 아들을 위해 지은 서재 오이당을 겸재에게 의뢰하여 그린 것이라는 김가희 연구자의 견해도 있다.
한양에 살면서도 은거하는 삶을 추구한 이춘제가 겸재에게 의뢰하여 그린 그의 집이 나타난 다른 그림들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응, 즉 주문에 응하여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를 위한 그림이든 ‘인왕제색도’는 큰비가 온 후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의 빗물이 싸리비로 내리그은 듯 시원하고, 비를 맞아 더욱더 검게 드러난 바위 면은 먹물을 콸콸 부어 쓸어내린 듯하며, 눈앞의 절벽 면들은 도끼로 장작을 팬 면처럼 단호하면서도 리듬감이 있다.
습기를 머금은 대기는 뽀얀 안개에 젖어 있지만 점을 찍어 나타낸 작은 수목과 풀들은 하나하나 명징하게 드러난다. 정선은 소나무를 그릴 때 위에서 아래로 선을 긋고 가로로 길게 몇 개의 선을 그어 완성하는데, 유준영 교수에 따르면 이때 나무들은 마치 3·3·7박수처럼 율동적이거나 운율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왕제색도’에서의 소나무 또한 짙고 옅은 먹으로 마음의 흥취를 드러내니 누구를 위한 그림이든 작가로서 겸재 자신을 모조리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장마가 이어지다가 윤5월 25일 오후에 갰다고 하니 1751년 5월 25일 인왕산 가득한 습기를 지금의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용인의 호암미술관 전시실에서 보던 상태 그대로 ‘인왕제색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등에서 기획한 주요한 전시에 여러 번 나들이를 했다.
작품이 제작된 후 첫 나들이는 아마도 정선의 손자 정황(鄭榥·1735~1800)의 손을 떠난 때였을 것이다. 정선을 ‘우리나라 화가의 스승’이라고 극찬한 심환지(沈煥之·1730~1802)는 정선의 그림 7점을 수장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그 생애 마지막 컬렉션이 된 이 그림에 그는 시를 적어 붙여 두었다. 심씨 집안에 전해져 오던 그림은 일제강점기 말에 개성 최씨 집안으로 옮겨졌다.
1945년에 창간한 '대동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언어학자 최원식(崔瑗植)이 이를 소장하게 된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유섭은 이 즈음 그림을 보고 '배관기'를 남겼다. 그림은 다시 개성의 부호이자 수집가이자 언론인이자 사업가인 진호섭(秦豪燮·1905~1951)이 수장하였는데, 그는 그림과 제시를 함께 사진을 찍어 두었다. 진호섭은 1948년 삼성무역주식회사 사장을 하였는데 그때 ‘인왕제색도’가 삼성가로 오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선은 집안과 관련되거나 사적인 그림은 ‘천금을 주더라도 팔지 말라’는 의미의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을 찍어 두었다. 정선의 아들 정만수(鄭萬遂·1710~1795)가 정선의 손자 정황의 조언에 의해 심환지에게 건넨 <경교명승첩>에는 이 도장이 찍혀 있다. 현재 ‘인왕제색도’에서는 이 도장을 발견할 수 없지만, 이 그림이 심환지에게 건네질 때 정선의 뜻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이 그림은 비록 수장가 모두가 분명 귀히 여기지만 ‘거래’로 옮겨졌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84년에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는 이제 국가 문화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다. 정선의 ‘천금물전’ 도장이 있든 없든 이 그림은 돈으로 거래되지 않음으로써 정선의 그 말이 실현된 작품이 되었다. 이 사실 또한 귀히 여길 일이다.
◆조은정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국제평론가협회 정회원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2018~201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술자문위원(2018~2019)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2019~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작품소장기획위원(2020~현재)
석남미술이론상 수상, 구상조각평론상 수상
독일 성오틸리엔 수도원에서 겸재 정선(鄭敾·1676~1759)의 화첩을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유준영(兪俊英·1935~) 교수 조교였던 필자가 이 대가들의 ‘청풍계’ 확인 작업에 따라나선 날이었다. 벼랑에 큰 글씨가 있다는데 아무리 보아도 큰 절벽이 있을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길이었다.
“아 저렇게 됐네.” 일중 선생의 손짓에 눈을 주니 자동차 한 대가 회전하여 나올 수 있는 둥글고 자그마한 마당 건너편에 나지막한 철문이 있었고 그 오른쪽에 바위벽이 보였다.
‘백세청풍(百世淸風)’. 시원한 네 글자였다. 초여름의 그 일정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정선의 그림은 실지로 어디서 그렸는지, 어디를 그렸는지 주의를 기울이면 그 장소를 찾아낼 수 있는 진경산수이기 때문이다.
정선은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천거로 관직에 나갔고 1745년 1월에 퇴직한 후 그동안 모은 돈을 들여 솟을대문을 세우고 여느 사족들과 이웃하며 깃들어 살았다. 그러다 보니 평생 인왕산 근처를 많이도 그렸다.
규모가 크거나 볼 만한 작품들은 대개 제발(題跋)을 통해 제작 이유가 드러나기 마련인데, 겸재 만년의 득의작이라 일컫는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는 ‘누구를 위한 그림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으로 갈리는 것은 인왕산이 바라다보이는 곳이 겸재 교유의 장소이자 자신과 친우들의 거주지인 탓에 있다.
이 그림이 그려진 것은 1751년 윤5월 하순이다. 그림 오른쪽 윗부분에 ‘인왕제색 신미윤월하완(仁王霽色 辛未閏月下浣)’과 ‘겸재’를 먹으로 적고 아래쪽에 ‘정선(鄭敾)’과 ‘원백(元伯)’이라는 네모난 도장을 붉은 인주로 찍었다.
최완수 선생은 그림이 그려진 날짜에 주목하여 윤5월 29일에 세상을 떠난 이병연(李秉淵·1671~1751)을 위한 그림으로 보았다. 시와 그림을 서로 교환하며 마음을 나누던 친구가 병석에 눕자 쾌유를 비는 마음으로 그와 함께 거닐던 북악산에 올라 육상궁 뒤쪽에 있는 그의 집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겸재의 독창성이 집약된 진경산수화의 정점이라 하였다. 임종을 앞둔 절친에 대한 절절함이 배어 있는 그림이라는 것이다.
한편 홍선표 교수는 “겸재가 자신의 집인 인곡정사와 그 주봉인 인왕산의 경관을 기념비적으로 남기기 위해 제작한 것”이라며 겸재 자신을 위해 그린 그림으로 보았다.
한미해진 사대부 집안 출신의 겸재는 관직과 그림으로 재물도 모았다. 외가로부터 '주자서절요'를 물려받자 1746년에 이황·송시열의 유거처와 외조부 댁을 그린 ‘풍계유택도’,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정사도’를 하나의 화첩으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그림도 장맛비가 내린 뒤에 “안개 걷히는 인왕산의 기세”와 자신의 집의 운치를 함께 담은 욕망의 표현인데, 증거로 집안에 보관되어 있었음을 제시하였다.
또 1739년에 도승지에서 물러난 이춘제(李春躋·1692~1762)가 인왕산 아래 자신의 집에 다섯 아들을 위해 지은 서재 오이당을 겸재에게 의뢰하여 그린 것이라는 김가희 연구자의 견해도 있다.
한양에 살면서도 은거하는 삶을 추구한 이춘제가 겸재에게 의뢰하여 그린 그의 집이 나타난 다른 그림들과 유사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수응, 즉 주문에 응하여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누구를 위한 그림이든 ‘인왕제색도’는 큰비가 온 후 콸콸 흘러내리는 계곡의 빗물이 싸리비로 내리그은 듯 시원하고, 비를 맞아 더욱더 검게 드러난 바위 면은 먹물을 콸콸 부어 쓸어내린 듯하며, 눈앞의 절벽 면들은 도끼로 장작을 팬 면처럼 단호하면서도 리듬감이 있다.
습기를 머금은 대기는 뽀얀 안개에 젖어 있지만 점을 찍어 나타낸 작은 수목과 풀들은 하나하나 명징하게 드러난다. 정선은 소나무를 그릴 때 위에서 아래로 선을 긋고 가로로 길게 몇 개의 선을 그어 완성하는데, 유준영 교수에 따르면 이때 나무들은 마치 3·3·7박수처럼 율동적이거나 운율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인왕제색도’에서의 소나무 또한 짙고 옅은 먹으로 마음의 흥취를 드러내니 누구를 위한 그림이든 작가로서 겸재 자신을 모조리 드러내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승정원일기>에서는 장마가 이어지다가 윤5월 25일 오후에 갰다고 하니 1751년 5월 25일 인왕산 가득한 습기를 지금의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용인의 호암미술관 전시실에서 보던 상태 그대로 ‘인왕제색도’는 국립중앙박물관과 간송미술관 등에서 기획한 주요한 전시에 여러 번 나들이를 했다.
작품이 제작된 후 첫 나들이는 아마도 정선의 손자 정황(鄭榥·1735~1800)의 손을 떠난 때였을 것이다. 정선을 ‘우리나라 화가의 스승’이라고 극찬한 심환지(沈煥之·1730~1802)는 정선의 그림 7점을 수장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인왕제색도’이다.
그 생애 마지막 컬렉션이 된 이 그림에 그는 시를 적어 붙여 두었다. 심씨 집안에 전해져 오던 그림은 일제강점기 말에 개성 최씨 집안으로 옮겨졌다.
1945년에 창간한 '대동신문' 편집국장이었던 언어학자 최원식(崔瑗植)이 이를 소장하게 된 연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유섭은 이 즈음 그림을 보고 '배관기'를 남겼다. 그림은 다시 개성의 부호이자 수집가이자 언론인이자 사업가인 진호섭(秦豪燮·1905~1951)이 수장하였는데, 그는 그림과 제시를 함께 사진을 찍어 두었다. 진호섭은 1948년 삼성무역주식회사 사장을 하였는데 그때 ‘인왕제색도’가 삼성가로 오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선은 집안과 관련되거나 사적인 그림은 ‘천금을 주더라도 팔지 말라’는 의미의 ‘천금물전(千金勿傳)’ 도장을 찍어 두었다. 정선의 아들 정만수(鄭萬遂·1710~1795)가 정선의 손자 정황의 조언에 의해 심환지에게 건넨 <경교명승첩>에는 이 도장이 찍혀 있다. 현재 ‘인왕제색도’에서는 이 도장을 발견할 수 없지만, 이 그림이 심환지에게 건네질 때 정선의 뜻이 실현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후 이 그림은 비록 수장가 모두가 분명 귀히 여기지만 ‘거래’로 옮겨졌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984년에 국보 제216호로 지정된 ‘인왕제색도’는 이제 국가 문화기관인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졌다. 정선의 ‘천금물전’ 도장이 있든 없든 이 그림은 돈으로 거래되지 않음으로써 정선의 그 말이 실현된 작품이 되었다. 이 사실 또한 귀히 여길 일이다.
◆조은정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국제평론가협회 정회원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2018~2019)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술자문위원(2018~2019)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자문위원(2019~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작품소장기획위원(2020~현재)
석남미술이론상 수상, 구상조각평론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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