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배경은 우선 세액이 큰 금액이고 부동산 등 처분에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경우, 손해를 감수하고 재산을 빠르게 매각해야 하는 경우, 혹은 기한을 넘겨 세금을 체납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럼 실제로 이런 법안을 허용한 국가가 있을까? 대표적인 곳이 바로 영국과 프랑스다.
영국은 1909년부터 물납제(Accdeptance in Lieu·약자로 AiL)를 통해 토지와 예술품 등을 물납 받아 훌륭한 예술 작품의 해외 반출을 막고 국가의 컬렉션으로 귀속해왔다. 프랑스는 1968년 대물변제(Dation) 제도를 도입하여 ‘상속인과 수행인 또는 합법적인 당사자가 예술 작품·서적·컬렉션 항목 또는 예술적·역사적 가치가 높은 문서로 지불할 수 있다’는 법안을 유지하고 있다. 단, 이들 국가는 물납제의 대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작품의 가치평가에 대해 철저히 검증하고 ‘특별한 예술적 또는 역사적 중요성이 있는’ 작품으로 제한해 문체부와 기획재정부 등 부처 간 승인위원회의 검토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물납제로 받은 예술품과 미술관
상속세 대신 받은 작품으로 아예 미술관을 새롭게 설립한 경우도 있다. 파리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이 대표적이다. 일찍부터 성공한 피카소는 다수의 작품을 팔지 않고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가 1973년 93세로 사망하면서 유족은 엄청난 상속세를 감당하는 대신 작품의 기증을 선택했다.
50여점의 작품으로 출발한 컬렉션은 1978년 상속인의 두 번째 대납으로 확장되었으며 기증 작품만도 워낙 많아 별도의 미술관을 건립하기로 한 후, 17세기 건축물을 개조하여 1985년 개관하였다. 피카소 미술관의 탄생을 축하하는 지인들의 기부가 이어졌고, 1990년 피카소의 부인 재클린이 사망하면서 대납한 작품이 더해져 풍부한 컬렉션을 보유하게 되었다.
물납제라는 제도가 있었던 덕분에 예술가의 유족이 막대한 상속세를 피하고 국가는 훌륭한 예술품을 보유할 수 있게 된 것일까, 아니면 예술가의 사후를 예상하여 물납제를 마련한 것일까?
사실은 후자에 가깝다. 당시 문화부 장관이자 그 자신도 문인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1966년 피카소의 85세 생일을 기념하는 그랑팔래 전시회를 관람하며 프랑스에 있는 미술 작품들이 작가의 사후 해외로 흩어지지 않도록 미래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발의한 법안은 1968년 12월 31일 제정되었다.
법안이 발표되자 81세로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샤갈도 이에 관심을 갖는 등 많은 예술가에게 사후에 그의 ‘뮤지엄’이 건립된다는 희망을 남겨주었다.
작품과 집을 국가에 기증하여 작가의 미술관을 건립한 파리의 로댕 미술관(1919년), 브랑쿠시의 작업실(1957년 기증·1997년 퐁피두센터 앞으로 이전) 등에 이어, 남프랑스에 건립된 피카소 미술관·샤갈 미술관·마티스 미술관 등이 대부분 물납제 덕분에 체계적으로 예술품 수집이 이루어진 사례다. 2019년 12월에는 대물변제 제도의 탄생 50주년을 돌아보는 학술 토론회(심포지엄)가 피카소 미술관에서 열리기도 했다.
◆미술관 유치 경쟁
한편 우연한 기회로 국가에 최고의 미술품을 유치한 사례도 있다. 바로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티센 보르헤미자(Thyssen Bornemisza) 미술관이다.
스위스의 수집가(컬렉터) 티센 보르헤미자 백작이 더 이상 집에 작품을 둘 곳이 없어 증축하려 하였으나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했고, 이에 미스 스페인 출신의 아내가 고국과 다리를 놓아 마드리드에 미술관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리스본에 있는 굴벤키안 미술관(Gulbenkian)도 유전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굴벤키안의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다.
아르메니아 출신으로 프랑스와 영국에서 생활하며 평생 6400여점을 모았다고 알려진 그의 컬렉션은 일부 런던 내셔널갤러리와 대영박물관에 대여하고도 남아 파리 그의 집을 가득 채웠을 정도다.
굴벤키안은 마지막 작품의 거처로, 포르투갈 친구의 초청으로 우연히 방문했다 마음의 위안을 얻은 리스본을 선정한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프랑스와 영국 양측으로부터 입은 마음의 상처 때문이다. 두 국가는 뒤늦게 사과하며 미술관을 세울 수만 있다면 토지와 건축을 제공하겠다고 나섰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기는 쉽지 않았다.
미국의 경우 대부분의 미술관이 개인 기부에 의해 지어지거나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고 있으며, 기부 활성화를 위한 세액 공제 혜택을 폭넓게 제공하고 있다. 구겐하임 미술관·휘트니 미술관·게티 미술관·브로드 뮤지엄 등 대부분의 미술관에 설립자의 이름이 붙은 까닭도 그러하다.
◆물납제 혜택의 최종 수혜자는?
예술품 물납제를 논의할 때 그 혜택을 보는 이들이 극히 한정적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건희 회장 정도 되는 갑부급 수집가나 유명 예술가의 유가족이 법안 적용 대상일 테니 소수를 위해 이런 법안을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의견이다.
하지만 세금을 징수한 후 문체부 예산을 편성하여 작품을 구매한다면, 미술관의 소장품을 강화하여 문화 국가가 될 길이 너무 멀어 보인다.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연간 작품 수집 예산은 약 88억원으로 김환기의 작품값 단 한 점에 맞먹는 수준이다.
반면 조세 제도를 통해 미술품을 확보하게 되었을 때 거둘 수 있는 효과는 무수하다.
첫째, 예술 작품의 가격상승률을 생각해보면 국가의 자산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승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일 프랑스 정부가 미술품을 받지 않고 현금으로만 세금을 받았다면 지금과 같은 유수의 예술품을 보유할 수 있었을까? 예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높아지면서 작품의 가격은 물가상승률을 뛰어넘어 국가의 자산이 불어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둘째, 이러한 소장품을 보유한 미술관은 세계의 관광객을 그 나라로 모으는 화수분 역할을 한다.
물납제를 통해 소장품을 강화해 온 루브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찾는 곳으로, 지난 10년간 연간 방문객 900만명에서 1000만명대를 유지하고 있으며 일일 방문객은 1만5000명에 달한다. 오르세 미술관은 연간 방문객 300만명대를 지난 10년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관광을 통한 경제적 이득은 말할 것도 없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상설 교육기관을 통해 국민들의 문화생활을 담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주말에 미술관을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교양있는 척하는 속물들의 이야기로 들리는가? 쇼핑몰 외에는 별로 갈 곳도 없는 자본주의의 도시에서 등산과 카페, 그 외의 대안은 무엇일까?
해외 미술관의 사례는 물납제를 통한 ‘혜택’의 범위를 좀 더 넓게 생각해 볼 때가 되었음을 시사한다. 생계형 복지를 넘어 우리의 경제 수준에 맞는 문화 복지를 위해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가 된 것은 아닐까? 미술관의 설립과 유지는 개인의 힘으로 하기는 힘들지만 수혜자는 우리 모두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나는 미술관에 간다>, <갤러리스트> 저자
프랑스 에콜 뒤 루브르 박물관학 석사·파리 8대학 미학 박사 수료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