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가 남긴 말이었다. 장소, 조명, 온도 등 하나하나의 요소로 어떤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의미였다.
그의 말대로 대개 추억은 여러 요소가 뒤섞여 만들어진다. 그날의 날씨, 그날의 기분, 그날 먹은 음식이나 만난 사람들 등등. 모든 요소가 그날의 기억이 되는 셈이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는 작품이 가진 본질보다 다른 요소들로 재미를 가르기도 한다. 혹평받은 영화가 '인생작'으로 등극할 때도 있고, '인생영화'가 다시 보니 형편없게 느껴질 때도 있다.
관객들도 필자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필자는 그날 영화를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녹여낸 '최씨네 리뷰(논평)'를 통해 좀 더 편안하게 접근해 보기로 했다. <편집자 주>
인기 장르로 자리를 잡은 분야 중 하나가 바로 케이퍼 혹은 하이스트로 불리는 범죄오락영화다. 무언가를 강탈하거나 훔치는 내용을 주로 다루며 여러 분야의 전문가가 목적을 위해 뭉치는 모습이 재미 요소 중 하나. 한국에서는 최동훈 감독의 '도둑들'이 큰 인기를 거뒀고 비슷한 구조의 범죄오락영화가 쏟아졌다. 다양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공식을 잘 따른 영화들이 인기를 거뒀고 '흥행 보증 수표'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도움을 줬다.
하지만 아무리 '보증 수표'라고 해도 남발하면 역효과를 부르는 법이다. 범죄오락물이 쏟아지는 탓에 소재며 인물, 전개 방식 등에서 전형성이 생겨났고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관객들 사이에서 '한국형 범죄오락영화'는 놀림거리로 전락했을까. '우스갯소리를 일삼지만 비상한 주인공'을 필두로 '천재 해커' 등 구색 갖추기에 급급한 구성원이나 "선수 입장" 같은 해묵은 대사가 반복되니 지겹고 촌스럽게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해마다 범죄오락영화를 몇 작품씩 만나게 되는데 기대만큼이나 실망도 컸다. 열에 여덟은 '선수 입장' 같은 대사를 입에 올리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고루한 전개 방식이나 인물 구성은 잘생긴 배우들로 포장하고 허점은 '장르성'이라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이 가운데 지난해와 올해는 코로나19로 범죄오락물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지난해 개봉한 '도굴' 정도가 범죄오락물의 형색을 갖췄다. 유명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는 데다가 제작비 등으로 욕심을 낼 만한 장르니, 코로나 시국 속 개봉을 망설이는 것도 이해하는 바다. 범죄오락물 가뭄이 이어지는 가운데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 등으로 한국 누아르 활극(액션)에 한 획을 그었던 유하 감독이 신작을 냈다. 국내 최초 도유 범죄를 다룬 범죄오락물, '파이프라인'으로 말이다.
핀돌이(서인국 분)는 송유관에 구멍을 뚫어 기름을 빼돌리는 도유 범죄에 꼭 필요한 인물이다. 업계 최고 기술자로 절대적 감각을 자랑하는 그는 예술적으로 송유관을 구멍 내 '대체 불가'한 존재로 불린다.
정유 회사 후계자 건우(이수혁 분)는 핀돌이를 주축으로 용접공 접새(음문석 분), 전직 공무원 출신으로 땅 밑 설계도를 전부 꿰고 있는 나 과장(유승목 분), 남다른 괴력을 자랑하는 큰삽(태항호 분)을 모아 역대 가장 큰 도유 범죄를 준비한다.
낡고 허름한 호텔 지하서 뭉친 핀돌이와 일행들은 기름을 훔치기 위해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친다. 하지만 저 잘난 맛에 사는 핀돌이와 구성원들은 좀체 뭉치기 힘들고 사사건건 부딪친다. 호텔 직원은 모든 과정을 지켜보며 건우에게 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한다.
생각보다 기름을 훔치는 과정에는 이변이 많았고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는 가운데 수년간 '도유 범죄'를 조사하던 형사 만식(배유람 분)은 낌새를 눈치채고 주변을 맴돈다.
'파이프라인'은 지난 2019년 촬영을 마치고 코로나 시국을 거쳐 개봉했다. 한국형 누아르 활극(액션)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둔 유하 감독의 새로운 장르이자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으로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 나름 기대를 모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국내 최초 도유 범죄를 소재로 한 점 외에는 그리 새로운 점이나 깊은 인상은 남기지 못했다.
이유는 역시나 기시감이다. "선수 입장" 같은 소리는 하지 않더라도 인물들의 성격이나 구성원 그리고 갈등 등이 너무나 전형적이다. 인물 개인의 고민이나 문제점도 단조롭고 해결 방식도 간단하다. 인물 사이나 이야기 사이가 느슨해 장르 영화의 긴박감도 떨어진다.
호텔 지하에서 주요 사건을 벌이는 모습이나 시끄러운 드릴 소리를 감추기 위해 호텔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접새의 모습 등 한국적인 범죄오락물의 재미들이 있지만, 이마저도 '도굴'이 한 차례 해 먹었다.
인물 혹은 사건도 조각조각 흩어져 있다. 등장인물이 많고 개개인의 사건들도 늘어놓다 보니 많은 부분을 대사로 설명해버린다. 주인공 핀돌이와 악당 건우를 제외하고 나머지 인물들의 쓰임이 아쉽다. 오합지졸 인물들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마저도 드라마틱하거나 매끄럽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하 감독은 '파이프라인'을 블랙 코미디 장르라고 정의했다. '막장'으로 몰린 도유 범죄자와 돈에 눈이 먼 인물이 벌이는 치열한 싸움은 때로 우습게 묘사되기도 하고 때로는 잔혹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들을 멀찍이서 바라보는 심정으로는 그리 새로워 보이진 않지만 땅속에서 벌어지는 도유 행위나 영화 말미 격전을 벌이는 모습은 유하 감독이 말하는 블랙 코미디적 면면을 십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상대적으로 극장에서 만나기 힘들었던 배우들이 전면으로 나선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극장에서 만나 반가운 얼굴들이 제 역할에 관한 고민과 시도를 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점으로도 '선수 입장'으로 놀림당할 요소 하나쯤은 줄였다고 볼 수 있겠다.
26일 개봉이고 상영 시간은 108분 관람 등급은 15세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