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이 사회적으로 이토록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첫 번째 이유는 국보급 작품을 포함한 컬렉션의 높은 수준과 방대함에 있을 것이며, 두 번째 이유는 아마도 이토록 많은 수준급 작품을 기증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국립박물관 내 작품을 보관할 수장 공간이 충분한지에 대한 논의, 아예 별도로 이건희 미술관을 신설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검토, 나아가 별도의 미술관을 짓는다면 수도 서울이 아닌 지방에 건립해야 한다는 각 지자체의 주장 등은 한국 예술계에서 처음 맞이한 상황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혼란스럽지만 지극히 자연스럽다. 짧은 시간 동안 압축 성장을 이루며 차근히 논의되지 못했던 현안들이 하나씩 터져 나오면서 비로소 뒤늦게나마 사회적 성장을 이룩하게 된 한국 근현대사의 다른 문제들처럼, 문화계도 이제라도 다뤄야 할 문제들이 많다. 연속물(시리즈)의 다섯 번째 기사로 소개한 ‘미술품 물납제’ 조세 정책에 이어 본 연속물의 마지막 편인 이번 기사에서는 작품의 소장 이력을 관리하는 ‘아카이빙(Archiving)’을 소개한다.
◆프로브낭스(provenance), 작품의 소장 출처
‘아카이빙’이란 사료적 가치가 커 훗날 다양한 연구의 기초 자료가 될 토대를 마련하는 기록과 보관을 말한다. 주민센터에 기록되는 우리 국민 모두의 출생·사망·전입신고 등의 기록, 한 가문의 족보 등이 가장 보편적인 아카이브라고 할 수 있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인해 중요성이 더욱 부각될 부분은 아카이브 중에서도 특히 ‘프로브낭스’다. 프랑스어로 작품이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한 기록을 말한다. 보통 작가한테서 나와, 어느 갤러리 전시에서 누군가에게 팔렸다가, 다른 소장가에게 재판매되었다가 미술관에서 구매 혹은 기증받았다는 기록이다.
해외 미술관의 경우 작품마다 작품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와 함께 작품의 출처를 밝히고 있다.
뉴욕현대미술관에 피카소의 대표작품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 기증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1923년 초현실주의의 대부이자 문인이었던 앙드레 브르통은 당대 프랑스의 가장 큰손이었던 패션 디자이너 출신의 수집가 자크 두세에게 훌륭한 작품이니 꼭 구매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편 피카소에게는 두세 같은 유명 수집가가 당신의 대표작을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에는 루브르 미술관에 기증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가 이 작품을 훗날 고국으로 가져갈까 봐 안타까워한 것일까? 실제로 피카소의 대표작 ‘게르니카’는 고국에 있어야 한다는 작가의 유언에 따라 스페인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 있다.
브르통의 설득은 성공하여 1924년 두세는 이 작품을 2만5000프랑에 구매했다. 하지만 주제가 빈약하여 품격있는 작품들로 갤러리처럼 꾸민 부인의 거실에는 걸 수가 없을 것 같다고 평가하면서 계단참에 걸어놓았다.
작품을 한번 보러오라는 초청에 피카소는 절대 응하지 않았다. 1929년 두세의 사망 후, 이 작품은 아내에게 상속되었고 루브르 미술관에 기증하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부인은 1937년 이 작품을 셀리먼이라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프랑스 화상에게 내놓았다.
한편 뉴욕현대미술관 설립에 큰 공을 세운 릴리 피 블리스는 1931년 세상을 떠나며 수많은 작품들을 미술관에 기증했고 더 좋은 작품을 사기 위해 작품을 판매해도 좋다는 유언을 남겼다.
뉴욕현대미술관은 1937년 시장에 나온 피카소의 작품을 사기 위해 블리스의 기증작 중 드가 한 점을 팔아 2만5000달러에 피카소의 대표작을 살 수 있었다. 미술관 온라인 누리집(홈페이지)에 ‘블리스의 유증으로 구매(교환)’이라고 적혀있는 이유다.
◆아카이빙의 중요성
그런데 이런 기록을 보다 보면 더 궁금해지는 것이 있다. 이 이야기는 모두 사실인가? 어떻게 이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까? 이 기록을 증명할 기록은 있는가? ‘기록을 증명할 기록’이야말로 아카이빙의 진짜 꽃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경우 ‘미국 미술 아카이빙(Archives of American Art·약자로 AAA)’이 대표적이다.
1937년 두세의 부인이 남아있는 작품 목록을 손수 적어서 화상 셀리먼에게 전달한 종이도 기록되어 있으며, 온라인 누리집을 통해 손쉽게 열람이 가능하다. 1978년 셀리먼의 사후 유족들이 사료를 기증한 덕분이다.
파리와 뉴욕에서 활동한 미술품 유통사 셀리먼앤코의 1904년부터 1974년까지 어떤 유럽 수집가의 작품이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이미지가 담긴 자료로, 작품의 역사적 퍼즐을 맞출 열쇠들이다.
미국 미술사 아카이빙의 흥미로운 점은 다수의 구술 자료(Oral Histories)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화상·수집가 등 미술의 역사를 둘러싼 산 증인들을 만나 대화한 녹음 원본 및 녹취기록들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갤러리의 이야기를 소개한 책 <갤러리스트>를 집필할 때에도 가장 많이 방문하고 큰 도움을 받았던 곳이 바로 ‘AAA’의 구술사 아카이빙이었다.
작품을 둘러싼 기록에 대해 잘 정리하여 책으로 남길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학자들이 남긴 기록만으로 작품을 바라보았을 때 남게 되는 한계를 생생한 현장의 목소리를 통해 보충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건희 컬렉션의 정리
앞으로 남은 가장 큰 업무는 2만3000여 점에 대한 작품의 기록을 정리하는 일일 것이다.
온라인 누리집을 통해 각 작품의 프로브낭스도 상세히 정리되어 ‘이건희 기증’에 더해 각 작품의 출처가 상세히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건희 소장품이었던 ‘인왕제색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세한도’ 등을 기증한 손세기, 손창근 부자의 작품 모두가 서예가 소전 손재형 선생의 소장품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며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것도 그중 하나다.
그러려면 생전 이건희 회장을 직접 만나 작품을 판매했다는 화상들의 기록이 필요하고, 이 과정은 한국 미술사뿐 아니라 근현대 경제사, 사회사 정립에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하지만 ‘겸양’을 미덕으로 삼는 한국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입을 열 화상이 많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생전 이건희 컬렉션의 도자 부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 우당 홍기대 선생의 저서도 이와 같은 서문으로 시작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는 작업에 선뜻 손대지 못하고 아흔넷에야 하게 된 것은 고미술 상인으로서 내 손님들에게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책 속에 이건희 회장과의 일화 역시 실명 대신 한 사업가 부부의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그 또한 이제는 고인이 되셨는데, 기억을 가진 이들이 사라지기 전에 기록하는 과정이 필요해 보인다.
문서화 인식이 부족했을 당시, 화상들의 기억과 구술을 증빙할 자료가 얼마나 남아있을지도 의문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록은 대놓고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지도, 기록을 남기기는 더 어려웠을지 모를 소장가의 입장을 대신하는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이런 과정이 체계화되었을 때 이건희 컬렉션 기증은 단지 국가의 소장 문화재를 풍부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미술법이나 미술관의 수장품 관리, 미술시장의 질서에 대한 논의가 체계화될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다.
◆필자 주요 이력
이안아트컨설팅 대표
이화여자대학교 겸임교수 역임
<나는 미술관에 간다>, <갤러리스트> 저자
프랑스 에콜 뒤 루브르 박물관학 석사·파리 8대학 미학 박사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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