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최대 규모 日강제징용 손해배상 기각…"일본 관계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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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미 기자
입력 2021-06-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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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양호 부장판사, 일정보다 3일 이른 기습선고

  • 민변 등 시민사회단체 "법관양심 저버린 판단"

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 열린 강제징용 노동자와 유족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유족 임철호(왼쪽) 씨와 대일민간청구권 소송단 장덕환 대표가 법원 청사를 빠져나오고 있다. 이날 열린 선고 공판에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소송을 낼 권한이 없다며 각하 판결을 내렸다. [사진=연합뉴스]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들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졌다. 강제징용자들이 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본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3년 전 대법원 판결과 배치되는 결과라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한·일청구권협정 따라 피해자 소송자격 제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김양호 부장판사)는 7일 오후 강제징용 피해자 85명이 일본제철·닛산화학·미쓰비시중공업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란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판부가 심리하지 않는 것이다. 청구가 재판을 통해 다뤄지지 않는 만큼 사실상 패소와 의미가 같다.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에 대해 보유한 개인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1965년)으로 소멸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 없다"면서도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고 각하 이유를 설명했다. 아울러 "한·일청구권협정과 관련 양해문서 등 문언, 협정 체결 경위, 협정 체결에 따른 후속 조치 등을 고려할 때강제징용 피해자들 손해배상 청구권은 협정 적용 대상"이라고도 봤다.

재판부는 "원고들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 판결이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이뤄지면 국가 안전보장과 질서유지라는 헌법상 대원칙을 침해한다"고도 밝혔다.

강제징용 피해자들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였다가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패소로 결과가 뒤집히면 우리나라 사법부가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것도 이유로 내세웠다.

재판부는 "원고들(피해자들) 청구를 인용하는 본안 판결이 확정되고 강제집행까지 마쳐 피고들(일본 기업들) 손해가 현실화하면 일본 측 중재절차나 국제사법재판소 회부 공세와 압박이 이어질 게 명백하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대한민국 사법부 판결이 국제중재 또는 국제재판 대상이 되는 자체만으로도 사법신뢰에 손상을 입는다"며 "만약 패소하면 대한민국 사법부 신뢰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막 세계 10강에 들어선 대한민국의 문명국으로서 위신은 바닥으로 추락한다"고 했다.

일본 관계도 각하 이유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우리나라가 분단국이자 세계 4강 강대국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징이 있다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헌법적 가치를 공유하는 서방세력 대표 국가 중 하나인 일본국과의 관계가 훼손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어 "이는 우리 안보와 직결된 미합중국과 관계 훼손으로 이어져 헌법상 안전보장을 훼손하고 사법신뢰 추락으로 헌법상 질서유지를 침해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유대길 기자, dbeorlf123@ajunews.com]


◆재판부 일정 급하게 변경···피해자들 항소 예정

2015년 시작한 이 사건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낸 여러 소송 중 가장 규모가 커 결과에 관심이 쏠렸다. 원고만도 85명에 달한다. 중복자를 제외해도 84명이다.

재판부는 애초 사흘 뒤인 10일에 판결을 내릴 예정이었으나 갑자기 이날 오전으로 일정을 바꾸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과 일본 기업 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광장·태평양 등에도 이날 통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선고기일 변경을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더라도 위법하지 않고, 법정 평온과 안정 등을 고려해 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 전자송달과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했다"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 기업에 강제징용 피해자 1인당 1억원씩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을 두고도 비판이 나온다. 

재판부는 "이번 판결은 2018년 10월 30일 선고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 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며 입장을 내놨다.

당시 대법원은 여운택·신천수·이춘식·김규식 할아버지가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소송의 재상고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다만 권순일·조재연 대법관은 "(한·일)청구권협정에 따라 피해자들 배상 청구권이 제한되는 것으로 봐야 한다"며 반대 의견을 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각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즉각 항소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과거사청산위원회와 근로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을 비롯한 16개 시민사회단체는 재판부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들은 "국가 이익을 앞세워서 강제동원 피해자들 권리를 불능으로 판단한 건 비법률적"이라고 지적하고 "일본 보복과 이로 인한 나라 걱정에 법관으로서 독립과 양심을 저버린 판단을 했다"고 꼬집었다.

이어 "민사소송 원고 권리를 인정하면 '대한민국의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가 위태로워진다는 금시초문 법리를 설시하면서 개인보다 국가가 우선이라는 논리를 별다른 부끄러움 없이 판결문에 명시했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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