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계도하고, 소통에 앞장서야 할 정부나 기관, 언론도 언어문화 파괴의 온상이 됐다. 공중파를 비롯한 언론의 언어 파괴는 말할 것도 없다.
신조어와 줄임말, 외국어 사용으로 '새로운 표현'과 '간결한 표현'은 가능해졌을지 몰라도 이를 모든 국민이 이해하기엔 역부족이다. '쉬운 우리말 쓰기'가 필요한 이유다. 쉬운 우리말을 쓰면 단어와 문장은 길어질 수 있지만, 아이부터 노인까지 더 쉽게 이해하고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사)국어문화원연합회는 모든 백성이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의 정신을 계승해 국민 언어생활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공공기관의 보도자료와 신문·방송·인터넷에 게재되는 기사 등을 대상으로 어려운 외국어를 쉬운 우리말로 대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 "OO호텔 트라이얼 스테이(trial stay)를 하게 됐다. OO호텔 가보고 싶었는데, 이참에 호캉스 제대로 즐겨야겠다. 룸 컨디션(room condition)은 어떤가. 아큐판시(occupancy)는 낮다고 하던데.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서비스는 되나? 가만, 이 호텔에서 사용하는 어메니티(amenity)가 어느 브랜드였더라. 내가 머물 객실이 이그제큐티브 플로어(Executive Floor Lounge)에 있다는데, 너무 좋다."
#2. "OO호텔 체험 숙박(시숙)을 하게 됐다. OO호텔에 꼭 가보고 싶었는데, 이참에 호텔에서 제대로 된 휴식을 즐겨야 겠다. 객실 상태는 어떤가. 객실 이용률은 낮다고 하던데. 서비스는 모든 것이 포함되나? 가만, 이 호텔에서 사용하는 편의용품이 어느 상표였더라. 내가 머물 객실이 귀빈층에 있다는데, 너무 좋다."
첫 번째 예시문은 호텔 종사자 김정미씨(가명)가 자신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놓은 게시물 일부다. 호텔업계 종사자와 호텔 이용을 많이 한 이들을 제외하고는 그의 게시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 그의 게시글을 우리말로 바꾼 것이 두 번째 예시문이다. 직역한 부분도 있어 어색해보일 수 있지만,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코로나19 장기화로 해외여행길이 막히고, 국내 여행도 조심스러워지자, 고급호텔을 찾는 사람이 더 늘었다. 타인과 접촉을 피하면서 오롯이 즐길 수 있는 덕이다. 선뜻 여행을 떠나기 힘든 코로나 시대에 고급호텔로 휴가를 떠나는 것은 유행처럼 번졌다.
많은 이가 이를 '호캉스(호텔과 바캉스가 결합한 신조어)'라고 부른다. 호텔업계는 증가하는 수요에 발맞춰 너도나도 관련 기획상품을 쏟아내고 있다. 호텔 용어 자체에 외국어가 넘쳐나는 탓에 호텔 이용 초보자라면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상황에서, 업계가 만든 상품 이름까지 무분별한 신조어와 외국어가 남용돼 불편한 상황을 연출한다.
호텔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퇴실할 때까지 우리는 '호텔용어'로 부르는 외국어 표기를 심심찮게 마주한다.
'체크인'을 비롯해 '컨시어지', '디포짓' 등의 용어를 마지막으로 외국어와 작별할 줄만 알았지만, 배정받은 객실에 들어가는 순간 외국어의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어메니티'와 '웰컴드링크', '턴 다운 서비스', '컴플리멘터리', '올인클루시브', '메이크업룸' 등 호텔에서 사용하는 물품이나 서비스 명칭 대부분이 외국어다. 호텔이 생경한 '호텔 초보자'라면 이런 용어에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체크인은 '입실', 컨시어지는 '맞춤형 여행비서', 디포짓은 '보증금' 정도로 풀이하면 된다. 어메니티는 '일회용품', 웰컴드링크는 '환영음료', 턴 다운 서비스는 '침구정리 서비스', 컴플리멘터리는 '무료제공 물품', 올인클루시브는 '전체 포함', 메이크업룸은 '객실 청소' 등으로 쓸 수 있다.
하지만 호텔을 자주 찾는 이들과 호텔업 종사자들은 외국어투성이인 호텔 용어에 익숙해지다 못해 이들 용어를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받아들인다. 외국어로 된 호텔 용어를 우리말로 표현하는 것에 오히려 어색함을 느낀다. 아무리 세계화 시대라지만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보다 외국어에 더 익숙해하는 모습은 씁쓸함을 자아내기도 한다.
구글 등 인터넷에 '호텔 용어'를 검색하면 우리말로 풀어서 알려주는 게시물이 줄줄이 등장한다. 호텔 용어를 정리해 알기 쉽게 설명했다는 것은 여전히 많은 이가 호텔 용어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호텔은 외국에서 건너왔다. 서양식 고급 숙박업소인 호텔은 1880년대 서양인들의 내왕이 빈번해지며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당시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가장 불편한 것이 숙박시설이었고, 그에 따라 서양인 상대의 호텔이 생겨난 것이다.
호텔이 외국 문화인 만큼 외국어 문자 표기는 필수라고 반박하는 이가 있겠지만, 호텔 투숙객은 외국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내국인의 호텔 투숙도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내국인 중에서도 외국어를 잘 알지 못하는 노년층이나 어린아이 등 다양한 연령층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우리말 표기는 필요한 부분이다. 부득이 외국어 표기를 해야 한다면 우리말로 변환한 문자를 함께 표기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호텔 기획상품도 신조어·외국어 투성이
호텔용어를 넘어 호텔에서 만든 기획상품에도 신조어와 외국어가 넘쳐난다.
'올인클루시브 서머에디션', '치떡맥 패키지' '스윗 서머한 호캉스'. 여름철을 맞아 호텔업계가 선보이는 다양한 묶음상품의 이름은 스치듯 봐도 우리말이 아니다. '드라이브스루', '투고(TO GO)' 상품처럼 코로나 시대에 발맞춰 내놓은 상품 이름도 마찬가지다.
숙박과 부대시설, 증정품 따위를 함께 묶어 판매하는 서비스인 '패키지'는 기획상품 또는 묶음 상품 정도로 쓸 수 있다.
올인클루시브 서머에디션은 '여름에만 모두 드립니다', 치떡맥 패키지는 '치킨·떡볶이·맥주 묶음상품' 정도로 풀어 써도 무방하다. 드라이브스루는 '승차 구매'. 흔히 '테이크아웃'과 같은 의미로 쓰이는 투고(TO GO) 메뉴는 '음식 포장'으로 해석된다. 스윗 서머한 호캉스는 외국어조차 어색하게 느껴진다. '여름, 호텔에서 머물며 달콤한 시간을 보내자' 정도의 뜻으로 어렴풋이 풀어볼밖에.
예시에는 없지만 짧다의 '숏'과 바캉스가 합쳐진 신조어 '숏캉스'도 호캉스만큼 많이 쓰는 업계 신조어다. 1박 하지 않고 몇 시간 동안 호텔 객실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말로 직역하는 것이 어색하다면 '짧은 시간, 달콤한 휴식'처럼 상품명을 우리말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외국어가 고급스럽다고? '문화 사대주의'에 불과
쉽게 쓰고 부를 수 있는 우리말이 있는데도 호텔용어에 외국어가 넘쳐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외국어가 우리말보다 세련되고, 또 품격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 사대주의' 때문일 것이다. 호텔 기획상품에 신조어가 속속 등장하는 이유는 신조어가 시대 흐름을 선도하는 최신의 언어라는 착각 때문일 것이다.
호텔업계 관계자는 "호텔에서 지나치게 많은 외국어가 사용되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눈에 띄는 상품명을 위해 신조어를 생산해내기도 한다. 보편적으로 쓰이지 않는 용어들을 꼭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남용하게 된다. 외국어와 신조어 사용이 업계 관행처럼 굳어진 부분이 있다"고 토로했다.
그는 "중·장년층과 어린아이에게는 외국어로 점철된 호텔용어에 대한 이해가 어려울 것"이라며 호텔용어 정비 필요성을 공감했다.
호텔은 특정 연령층과 특정 계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두가 편리하게 호텔을 이용하고, 그 안에서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호텔을 찾은 내국인이 외국어를 몰라 호텔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외국어로 무장한 호텔 용어를 대체할 우리말 표기를 위한 업계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업계 또 다른 관계자는 "호텔업계 종사자부터 어려운 외국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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