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는 1만5000명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두번이나 건너 북벌, 고구려 수도와 옛땅 환인과 요동성을 수복 남만주를 석권했다.
요즘 항간에는 기득권 세력의 선택적 정의, 선택적 수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도 그런 것 같다. 이 땅의 주류 종일매국사관은 정사(正史)에 무수히 명기된 고려와 조선의 고구려 옛땅 수복을 위한 정벌을 철저히 숨기거나 의미를 축소해왔다.
그 대신, 묘청의 난, 위화도 회군 등 한반도내의 내란이나 반란만 부각시켜 주입해 왔다. 전지적 일본인 시각으로 왜곡 은폐 오도된 역사라 아니 할 수 없다.
필자는 『환단고기』류와 같은 위서와 야사, 개인 학설과 주장을 철저히 배제하는 대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또는 『사고전서』 등 한·중 양국 정사(正史) 기록에서 한민족 선조들의 진취적 기상과 위대한 업적을 발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흔히들 조선 태조 이성계 하면 위화도 회군을 떠올린다. 조정의 명령에 반역,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회군하여 고려를 멸망시킨 '쿠데타 수괴' 비슷하게 이미지가 그려졌다. 필자 역시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요동을 정벌했으면 좋았을 걸 그를 원망했다.
그러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동국통감』 등 조선4대 대표 관찬 사서에 명기된 무수한 기록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선택적 지면관계상 주요 사실만 간략히 소개한다.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고려사』 1370년 1월 31일 (공민왕 19년) 1월 4일(음) 기사와 동일(환조 부분 제외)
태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동북면의 영토를 확장하다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기병 5000명과 보병 1만명을 거느리고 동북면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 지금의 함남 장진군 고개)을 넘어 600여 리를 행군하여 설한령(雪寒嶺 자강도 용림군 고개)에 이르렀으며, 또 700여 리를 행군하여 갑진일에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 서북방 쪽에 자줏빛 기운이 하늘에 가득 찼는데, 그 빛이 모두 남쪽으로 향하였다. 서운관(書雲觀)에서 이르기를, “맹장의 기운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를 보냈으니, 필시 거기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지금의 랴오양시 중심) 동지 이오로첩목아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亐羅山城; 중국 환인현 오녀산성:고구려 옛 수도 졸본산성)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에 이르니, 오로첩목아 와서 도전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이 되겠습니다."
하고, 3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그 추장 고안위는 오히려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했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을 사용해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지금의 하얼빈)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 지금의 평양)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 황제(皇帝)의 성(城; 상경, 1138~1153년)이다. 태조는 원나라 추밀 부사 배주(拜住)와 동녕부의 300여 호가 와서 왕에게 바쳤다. 태조가 우라산성에 들어갈 적에 무너진 담안에서 곡성이 있음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원나라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배주인데, 귀국의 이인복도 나와 동년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장원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를 입히고, 말을 주어서 그를 타게 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오니, 왕이 배주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을 내려 주었다. 한복이 태조를 섬기되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아래는 태조실록 기록>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환조(桓祖이만춘)께서 우리 태조를 탄생하시어 이 백성을 구제하고 큰 왕업을 터전잡게 했으니, 쌍성(雙城; 쌍성자, 지금의 우수리스크로 추정)의 전역은 실제로 내응이 되었습니다. 쌍성)이 수복됨으로써 함길도의 9성이 지역이 수복되었으며, 9성이 수복됨으로써 정병 건졸이 모두 우리의 소용이 되었으니, 그 공덕의 성대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컨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환조를 국사(國社) 에 배향하도록 하소서. "위의 조목은 의정부에 내리겠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석학대가들께서 『고려사』(맨앞:고려동북영토는 고구려보다 넓었다)는커녕 『조선왕조실록』 맨앞 「태조실록」 1권 :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동북면 영토를 확장하다)도 단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데 내 양 손모가지 걸고 싶다.
『고려사절요』 ,1370년 11월 20일(양)
『동국통감』 49권 고려기 1370년(공민왕 19년) 11월 기사와 동일
이성계가 요동성을 함락시키다 11월 정해. 우리 태조(太祖) 및 지용수 등이 의주(義州)에 이르러서 뜬 다리]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넜는데, 병사들이 3일 만에 모두 건넜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니, 병마사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길한 조짐임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러 원수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구는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립니다. 지금 상원수는 용(龍)이라는 글자가 그의 이름인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니, 전쟁에서 승리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무자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렀는데, 요성(遼城; 요양성 )과의 거리가 2일 일정이므로 군수품을 남겨두고 7일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떠났다. 비장 홍인계·최공철 등으로 하여금 가볍고 날쌘 기병 3,000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기축. 나아가 요동성을 습격하였다. 저들이 우리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더불어 싸웠는데, 대군이 연이어서 이르렀으므로 성 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들의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감한 것을 믿고 오히려 막아 싸우자 태조가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여 말하기를, “너를 죽이는 것은 매우 쉽지만, 단지 너를 살려서 거두어 쓰고자 하는 것이니 속히 항복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원경은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모르는구나.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1발의 화살로 관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일부러 활을 쏘아서 투구를 떨어뜨리고 또다시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다. 태조가 또 그 다리를 활로 쏘았다. 처명이 화살에 맞고 달아났다가, 얼마 후 다시 와서 싸우고자 하므로, 또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너의 얼굴을 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명이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였다.
어떤 한 사람이 성에 올라 소리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대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투항하고자 하였으나 〈성을〉 지키는 장군이 억지로 막아 싸우게 하였으니, 만약 힘껏 공격한다면 성을 취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였으며 화살도 비처럼 쏟아졌고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 있었는데, 우리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 가까이에 가서 급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그것을 함락시켰다.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가 도망갔다.
김백안(金伯顔, 김바얀)을 포로로 하고 군사를 성 동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다음날, 군사가 성 서쪽 10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날 밤에 붉은 기운이 군영을 쏘았는데, 불처럼 타올랐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이르렀으니, 옮겨서 둔을 치면 크게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묘. 마침내 군사를 되돌렸다. 처음 성이 함락되었을 때 우리 군사들이 창고에 불을 질러 거의 없앴으므로 양식을 취할 곳이 없었다. 군중(軍中)이 크게 굶주리게 되었으므로 이에 소와 말을 죽여 먹음으로써 진을 칠 겨를이 없었으며, 추격하는 병사가 있을까 두려워 사잇길로 돌아오면서 들에서 잠을 자고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게 하였다.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2일 동안 뒤를 밟아 와서 말하기를,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면서 행군이 정연하니, 습격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돌아갔다.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자, 김백안을 주살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국의 승려로서 통제원(通濟院)의 여종과 간통하여 김백안을 낳았다. 〈김백안은〉 원(元)에 들어가서 벼슬을 역임하여 평장(平章)에 이르렀다.
요즘 항간에는 기득권 세력의 선택적 정의, 선택적 수사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도 그런 것 같다. 이 땅의 주류 종일매국사관은 정사(正史)에 무수히 명기된 고려와 조선의 고구려 옛땅 수복을 위한 정벌을 철저히 숨기거나 의미를 축소해왔다.
그 대신, 묘청의 난, 위화도 회군 등 한반도내의 내란이나 반란만 부각시켜 주입해 왔다. 전지적 일본인 시각으로 왜곡 은폐 오도된 역사라 아니 할 수 없다.
필자는 『환단고기』류와 같은 위서와 야사, 개인 학설과 주장을 철저히 배제하는 대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또는 『사고전서』 등 한·중 양국 정사(正史) 기록에서 한민족 선조들의 진취적 기상과 위대한 업적을 발굴, 이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동국통감』 등 조선4대 대표 관찬 사서에 명기된 무수한 기록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다. 선택적 지면관계상 주요 사실만 간략히 소개한다.
1차 북벌 (1370년 1월) 고구려 옛 수도 환인 수복
[태조실록] 1권, 총서 47번째기사
『고려사』 1370년 1월 31일 (공민왕 19년) 1월 4일(음) 기사와 동일(환조 부분 제외)
태조가 군대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동북면의 영토를 확장하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지금의 랴오양시 중심) 동지 이오로첩목아는 태조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산성(亐羅山城; 중국 환인현 오녀산성:고구려 옛 수도 졸본산성)으로 옮겨 가서 지켜 대로에 웅거하여 막고자 하였다. 태조가 야둔촌에 이르니, 오로첩목아 와서 도전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이 되겠습니다."
하고, 300여 호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그 추장 고안위는 오히려 성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했다. 이때 태조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을 사용해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지금의 하얼빈)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 지금의 평양)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 황제(皇帝)의 성(城; 상경, 1138~1153년)이다. 태조는 원나라 추밀 부사 배주(拜住)와 동녕부의 300여 호가 와서 왕에게 바쳤다. 태조가 우라산성에 들어갈 적에 무너진 담안에서 곡성이 있음을 듣고 사람을 시켜 가 보게 했더니, 한 사람이 벌거벗고 서서 울며 말하기를,
"나는 원나라 조정에서 장원 급제한 배주인데, 귀국의 이인복도 나와 동년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장원의 이름을 한번 듣고는 곧 옷을 벗어서 그를 입히고, 말을 주어서 그를 타게 하여 마침내 그와 함께 오니, 왕이 배주에게 한복(韓復)이란 성명을 내려 주었다. 한복이 태조를 섬기되 매우 조심성 있게 하였다.
<아래는 태조실록 기록>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환조(桓祖이만춘)께서 우리 태조를 탄생하시어 이 백성을 구제하고 큰 왕업을 터전잡게 했으니, 쌍성(雙城; 쌍성자, 지금의 우수리스크로 추정)의 전역은 실제로 내응이 되었습니다. 쌍성)이 수복됨으로써 함길도의 9성이 지역이 수복되었으며, 9성이 수복됨으로써 정병 건졸이 모두 우리의 소용이 되었으니, 그 공덕의 성대함이 어떻다 하겠습니까? 원컨대 옛 제도에 의거하여 환조를 국사(國社) 에 배향하도록 하소서. "위의 조목은 의정부에 내리겠다.
한국의 거의 모든 석학대가들께서 『고려사』(맨앞:고려동북영토는 고구려보다 넓었다)는커녕 『조선왕조실록』 맨앞 「태조실록」 1권 : 이성계가 압록강을 건너 동북면 영토를 확장하다)도 단 한번도 읽지 않았다는데 내 양 손모가지 걸고 싶다.
2차 북벌 이성계가 요동성을 함락 고구려의 서북영토를 석권했다.
요동성 함락, 고구려 서북영토 석권『고려사절요』 ,1370년 11월 20일(양)
『동국통감』 49권 고려기 1370년(공민왕 19년) 11월 기사와 동일
이성계가 요동성을 함락시키다 11월 정해. 우리 태조(太祖) 및 지용수 등이 의주(義州)에 이르러서 뜬 다리]를 만들어 압록강을 건넜는데, 병사들이 3일 만에 모두 건넜다.
이날 저녁에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내려서 사람들이 모두 근심하고 두려워하니, 병마사 이구(李玖)가 말하기를, “길한 조짐임을 어찌 의심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여러 원수들이 그 까닭을 묻자 이구는 말하기를, “용이 움직이면 반드시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립니다. 지금 상원수는 용(龍)이라는 글자가 그의 이름인데 강을 건너는 날에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리니, 전쟁에서 승리할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무자 나장탑(螺匠塔)에 이르렀는데, 요성(遼城; 요양성 )과의 거리가 2일 일정이므로 군수품을 남겨두고 7일 분량의 양식을 가지고 떠났다. 비장 홍인계·최공철 등으로 하여금 가볍고 날쌘 기병 3,000명을 거느리게 하였다.
기축. 나아가 요동성을 습격하였다. 저들이 우리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쉽게 생각하여 더불어 싸웠는데, 대군이 연이어서 이르렀으므로 성 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낙담하였다. 그들의 장수 처명(處明)이 날래고 용감한 것을 믿고 오히려 막아 싸우자 태조가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여 말하기를, “너를 죽이는 것은 매우 쉽지만, 단지 너를 살려서 거두어 쓰고자 하는 것이니 속히 항복하도록 하라.”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원경은 말하기를, “네가 우리 장군의 재주를 모르는구나.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1발의 화살로 관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전히 항복하지 않았다. 태조가 일부러 활을 쏘아서 투구를 떨어뜨리고 또다시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였으나, 또 따르지 않았다. 태조가 또 그 다리를 활로 쏘았다. 처명이 화살에 맞고 달아났다가, 얼마 후 다시 와서 싸우고자 하므로, 또 이원경으로 하여금 그를 타이르게 하여 말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곧 너의 얼굴을 쏠 것이다.”라고 하였다. 처명이 마침내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하였다.
어떤 한 사람이 성에 올라 소리치며 말하기를, “우리들은 대군이 왔다는 말을 듣고 모두 투항하고자 하였으나 〈성을〉 지키는 장군이 억지로 막아 싸우게 하였으니, 만약 힘껏 공격한다면 성을 취할 수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성이 매우 높고 험준하였으며 화살도 비처럼 쏟아졌고 또 나무와 돌까지 섞여 있었는데, 우리 보병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성 가까이에 가서 급하게 공격하여 마침내 그것을 함락시켰다.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 기사인테무르)가 도망갔다.
김백안(金伯顔, 김바얀)을 포로로 하고 군사를 성 동쪽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다음날, 군사가 성 서쪽 10리 되는 곳에 머물렀다. 이날 밤에 붉은 기운이 군영을 쏘았는데, 불처럼 타올랐다.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상한 기운이 군영에 이르렀으니, 옮겨서 둔을 치면 크게 길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신묘. 마침내 군사를 되돌렸다. 처음 성이 함락되었을 때 우리 군사들이 창고에 불을 질러 거의 없앴으므로 양식을 취할 곳이 없었다. 군중(軍中)이 크게 굶주리게 되었으므로 이에 소와 말을 죽여 먹음으로써 진을 칠 겨를이 없었으며, 추격하는 병사가 있을까 두려워 사잇길로 돌아오면서 들에서 잠을 자고 사졸들로 하여금 각기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게 하였다. 납합출(納哈出, 나하추)이 2일 동안 뒤를 밟아 와서 말하기를, “뒷간과 마구간을 만들면서 행군이 정연하니, 습격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돌아갔다. 군사가 안주(安州)에 이르자, 김백안을 주살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본국의 승려로서 통제원(通濟院)의 여종과 간통하여 김백안을 낳았다. 〈김백안은〉 원(元)에 들어가서 벼슬을 역임하여 평장(平章)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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