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대통령 선거가 8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차기 정부의 외교 환경은 도전을 더하고 있지만, 대선 후보 중 누구도 '대전환 시대'를 대비한 선명한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원칙 없이 끌려다니다가는 힘의 관계로 점철된 동북아정세 속에서 때마다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다. 외교 전문가들은 이념이 아닌 실용 노선을 기반으로 한 가치판단과 대통령의 리더십이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한 열쇠라고 단언했다. 이에 본지는 총 5회 기획을 통해 차기 정부가 짊어질 K외교의 열쇳말 찾기에 나선다. <편집자 주>
미·중 대결이 더욱 엄중해지면서 한국은 지정학적·군사적·경제적으로 복잡해진 외교 대전환시대를 맞았다. 조 바이든 정부는 중국의 패권 도전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 네트워크와 민주주의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한·미 관계는 연착륙했지만, 미국과 가까워질수록 중국의 압박도 커지는 외교적 딜레마에 빠졌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일본 공사의 잇따른 결례와 북한의 대남 압박은 한국 외교의 민낯을 드러냈다. 본지가 25일 만난 외교 전문가는 냉전 시대 해체를 이룬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등의 과감한 외교가 필요할 때라고 제언했다.
◆"레이건 같은 외교 거인 없나요?"···<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
신범철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외교안보센터장은 현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외교적 덕목으로 미·소 냉전 종식을 이룬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결단의 리더십'을 꼽았다. 신 센터장은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만남은 냉전해체를 실질적으로 이뤄낸 과정"이라며 "한반도에서도 냉전 구조 해체를 끌어낼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불렀지만,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한 '외교 거인'이었다. 특히 1987년 6월 12일 독일 베를린 장벽을 방문한 레이건 대통령이 "고르바초프 서기장, 당신이 평화를 원하거든 이 문을 열어라, 장벽을 헐어버리라" 외치던 결단이야말로 차기 대통령이 갖춰야 할 덕목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냉전 시대 종말을 이끈 사건은 벽난로 앞에서 사흘간 진행된 두 정상의 만남이다. 냉전이 한창이던 1985년 11월 19일 레이건 전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전 서기장은 제네바 호수 연안에 위치한 저택에서 처음 만났다. 레이건 대통령은 양국 대표단이 처음 마주하자 "미국과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이자, 세계 평화를 불러올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고 말했다. 미·소 정상 간의 첫 대화는 예정했던 15분을 훌쩍 넘어 1시간 이상 이어졌다. 제네바에서 열린 첫 미·소 정상회담은 그로부터 6년 뒤인 1991년 소련 붕괴로 냉전 종식을 불러일으킨 역사적 만남으로 평가된다.
첫 만남 이후 양측의 협상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군비경쟁 중단과 축소를 처음 논의한 이후 두 정상은 1986년 10월 11~12일 아이슬란드 수도 레이캬비크 해안에 있는 외딴 건물 호프디하우스에서 이틀간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당시 양측은 전략방위구상(SDI)을 두고 합의를 이루지 못해 얼굴을 붉히고 회담장에서 고성이 오갔다고 한다.
다만, 거친 다툼 이후에도 양측은 저녁 식사를 통해 분위기를 전환했다. 먼저 식사 초대를 한 것은 고르바초프 서기장이다. 또 다음 날 저녁에는 레이건 대통령의 초대로 두 정상 내외가 비공식 만찬을 했다. 일각에선 레이캬비크 회담을 두고 ‘실패한 회담’이라는 비판 여론이 거셌지만, 두 정상의 외교적 노력은 1987년 '중거리핵무기 폐기협정'(IRNFT)까지 이끌었다.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두 정상의 외교적 묘수는 시간이 흘러 역사적으로 재평가를 받게 됐다.
◆적대 시대의 전환점 DJ 전략적 리더십···<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
냉전시대를 바꾼 역사적 만남은 한반도에도 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2000년 6월 13일 평양에서의 만남을 가장 역사적인 사건으로 제시했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은 한반도 정세의 큰 전환점으로서 남북 화해협력 시작의 계기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 센터장은 남북회담의 정신을 통해 차기 정부 역시 새로운 실용적 노선을 고민할 때라는 답을 내놨다.
정 센터장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가장 큰 성과"라며 "남북 간 적대 시대의 전환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서 공존에 대한 실질적인 합의가 이뤄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며 "이후에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으로 이후 문재인 정부의 남북, 북·미 정상회담도 가능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당시 양측은 역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6·15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김 전 대통령은 평양 순안공항을 떠나면서 "남과 북은 지금까지의 대결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선언의 가시적 성과는 전례 없는 남북 교류로 이어졌다. 1971∼1999년 연평균 12회가량이었던 남북회담은 2000년 한 해에만 27회 열렸다. 1989∼1999년 연평균 1029명에 불과했던 남북 간 왕래 인원도 2000년엔 7280명으로 급증했고 2008년엔 18만6775명으로 최다인원을 기록했다. 또 첫 물꼬를 튼 남북정상회담은 노무현 정부와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실 정치 외교' 헨리 키신저···<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의 전 국무장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헨리 키신저의 '현실 정치 외교'가 필요할 때라는 주장도 나왔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 외교의 '대부'로 꼽히는 키신저 전 국무장관처럼 동서 화합을 이끌 외교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 철학은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한다"는 그의 발언이 설명해준다.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국익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그의 '정치 현실주의자의 신념'은 이념 정치에 매몰된 한국 외교에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게 이 교수의 설명이다.
1971년 7월 9~11일 미국 닉슨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키신저 전 장관은 베이징을 극비 방문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와 만나 ‘역사적 화해’에 합의했다. 같은 해 7월 15일 미·중 두 나라는 동시에 ‘닉슨 대통령이 마오쩌둥 주석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할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냉전 종식의 서막을 알렸다. 이를 통해 적성 국가였던 중국과의 수교를 비롯해 독재정권에 대한 당시 미국의 지원 등 각종 외교 정책은 초강대국이라는 지위를 지킬 수 있었다.
◆"국제사회 위상 높아진 G20 가입"···<신각수 전 주일 한국대사>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국의 주요 20개국 협의체(G20) 가입을 가장 역사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G20은 'Group of 20'의 약자로 경제 규모가 큰 20개 국가를 회원으로 하는 국제기구다. UN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5대 군사 강대국(미국·영국·프랑스·중국·러시아)이라면 G20 회원국은 20대 경제 강대국인 셈이다.
신 전 대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우리가 G20 가입 멤버가 되고, 세 번째 회담을 미국·영국에 이어서 개최한 것"이라며 "2008년 세계금융위기는 세계적 사건이었고, 새로운 국제 질서 모색이 있었는데 그때 G20 클럽에 들어갔다는 것은 상당한 의미"라고 설명했다.
당시 글로벌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흥국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한국의 위상도 높아졌다. 한국은 2010년 G20 재무장관 회의 의장국으로 선출되면서 영국·브라질과 함께 국제 금융질서 논의를 주도할 '주도 3국(management troika)'에 포함됐다. 의장국 지위를 적극 활용해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발언권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