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혼의 재발견 - (1) 광주정신] 유신독재 막아선 YH여공, 난 빛고을의 김경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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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호 논설고문 박승호 전남취재본부장
입력 2021-07-29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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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끝> 노동운동 큰 이름 된 '21세기의 죽음'


[YH무역 여공들과 함께 신민당사에서 밤샘하고 있던 김염삼 총재가 경찰에 의해 당사 밖으로 나오고 있다/연합뉴스 ]

‘광주의 지역 혼’ 시리즈 마지막 회 주인공은 김경숙 열사(1958∽1979년)다. 전남 광산군 비아면 월봉리 빈농에서 태어나 박정희 개발독재체제 아래서 그 서러운 이름, ‘여공’(女工)으로 살다가 만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산화한 우리들의 누이 말이다. 지난 4월 22일 한 방송사에서 김경숙 관련 특집(‘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 YH무역 사건’)을 내보냈을 때 이런 댓글들이 달렸다. “김경숙, 전태일님 같은 분들이 있어서 근로기준법이 준수되고 일요일에 쉴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대한민국은 권력자들이 아니라 누님 같은 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1979년 8월 11일, 서울 YH무역(가발‧봉제업)의 여성 노동자 187명은 회사 측의 일방적인 폐업조치와 해고에 맞서 야당인 신민당 당사(4층)로 장소를 옮겨 농성 중이었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동료들이 짓밟히고, 짐짝처럼 끌려 나갈 때 YH노조의 조직차장이었던 김경숙은 목숨을 잃는다. 왼쪽 동맥이 끊기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

개발독재의 한계가 드러나다

이 사건은 두 달여 뒤인 10월 4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10월 16일∽20일의 부마항쟁, 10월 26일 박 대통령 시해사건(10‧26사태)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 18년 박정희 독재체제 종식의 도화선이 된다. 김경숙을 위시한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희생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쓴 군사독재 권위주의체제와, 노동자를 억압함으로써 저임금으로 경제성장을 꾀한 박정희 모델의 한계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김경숙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다. 경찰은 8월 13일 오후 4시, 그의 주검을 서울 삼성동 강남시립병원에서 서둘러 화장했다. 한줌의 재로 변한 유골은 고향의 어머니가 집 근처에 뿌렸다. 1989년 김경숙의 동료들은 유골을 뿌렸던 곳의 흙을 가져다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가묘를 만들었다. 시인 고은이 묘비명을 썼다.“…/조국의 아픔 가운데 그대의 아픔 함께 있었으니/…/그대의 삶과 죽음 있어 오늘 우리 여기 있나니…”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그의 사망이 공권력에 의한 타살이라고 공식 결론지었다. 손등이 직경 4㎝의 파이프 같은 둥근 관에 의해 상처를 입었고, 후두부를 모서리진 물체로 가격 당했다는 것이다.

“누나가 대학까지 공부 가르쳐줄게”

경숙은 신민당 당사로 옮기기 직전인 8월 7일, YH 본사 기숙사에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한글도 모르는 어머니 앞으로 보내는 편지는 처음이었다.

“보고 싶은 엄마, 몇 년 전부터 장용호(YH) 회장이 미국으로 돈을 빼돌려서 저희 근로자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답니다. 회장은 미국으로 도망가고 없고…보고 싶은 엄마, 다른 데 취직하려고 해도 서울의 물가가 매일매일 올라가서 어렵답니다.… 물론 이 딸은 다른 데 취직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이곳의 나이 어린 근로자들을 위해서라도 끝까지 단결해 꼭 승리할 것입니다. 준곤(동생)이는 이 누나가 대학까지 공부를 가르쳐주겠다고 엄마가 대신 잘 말해주세요. 이 누나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한국여성노동자회와 김경숙열사기념사업회는 2019년 10월 30일 여성가족부 후원으로 그의 40주기를 기념하는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주제는 ‘여공, 기억에서 역사로’. 발제자 중 한 사람인 신경아 교수(한림대학교·사회학)는 사건 당시 YH 노조지부장이던 최순영(현 경기여성연대 대표, 전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의 증언을 토대로 YH 사건을 재정의 했다. 신 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열사’로서의 김경숙을 다시 보게 된다. 신 교수는 김경숙을 ‘가여운 여공’ ‘한 떨기 꽃’ 등으로 표현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이나 활동가들의 인식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남성, 또는 가부장적인 시선으로 여성노동자들을 연민의 틀 안에 가둔다는 것이다.

신 교수에 따르면 YH사건은 첫째, 여성노동자들에 의한 조직적 실천의 산물이다. 둘째, 여성조합원들을 중심으로 키워나간 노동자 의식과 기숙사 생활을 통해 형성된 강력한 자매애(姉妹愛‧sisterhood)가 투쟁의 동력이 됐다. 이 과정에서 교육이 큰 역할을 했다. 김경숙도 YH노조가 설치한 중학교 과정 ‘녹지야학’을 다녔다. 셋째, 남성노동자들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 넷째, 1970년대의 ‘여공’은 숙련된 기술, 경제적 자부심, 일터를 지키려는 욕구, 가족 부양의 책임감 등을 가진 집단이었기에 강력한 조직적 저항이 가능했다(신경아, ‘2019년 YH 여성노동자 김경숙을 다시 생각하다’ 김경숙 열사 40주기 심포지엄 발제문).

“이 한 몸, 노동운동의 밀알이 된다면…”

신 교수는 김경숙이 1978년 1월 1일부터 세상을 떠나기 2개월 전인 1979년 6월 4일까지 1년 반 동안 쓴 일기를 분석했다. 경숙은 어떻게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되고, YH 농성의 주도적 인물이 됐을까. 신 교수의 설명이다. “5월 초, 노조 간부로 임명되고, 대의원회의에서 토론하고 교육에 참여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노동자가 처한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이해하고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김경숙은 신민당사 농성과정에서 그 어떤 노동운동가에게서도 보기 어려운 열정과 책임감, 진정성을 보여준다. 7월 30일 조합원 총회에선 집게손가락을 이빨로 물어뜯은 후 머리띠를 풀어 ‘단결’ ‘투쟁’이란 혈서를 쓴다. 8월 8일 각계에 보내는 탄원서를 쓸 때도 회사 정상화를 요구한 마지막 부분은 혈서로 썼다. 8월 10일 노조 종결대회 준비임원회의에선 “이 한 몸 노동운동에 한 알의 밀알이 된다면 바랄 게 없다”고 했다.

박정희의 군사독재 시절엔 시골 어느 집을 가도 ‘경숙’이는 있었다. 먹는 ‘입’ 하나라도 줄이려고 대처로 내보낸 그 어린 아이들이 부모님 약값과 동생들 학비까지 감당했다. 광주의 경숙이도 8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떴고, 어머니가 떡 행상으로 생계를 꾸렸다. 6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누에고치 공장에서 일했고, 졸업 하고는 양복점 '시다'가 됐다.

만 15세가 되던 1973년, 당고모의 권유에 따라 서울로 간다. 운동복을 만드는 하청업체 혜원실업에 취직한다. 석유파동으로 회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6개월 만에 그만두고 한품섬유, 태진산업, 이천물산을 전전하게 된다. 우리는 이때의 경숙이, 뒷날 ‘YH 노조원 경숙’이보다 더 애처롭게 다가온다. 그 어린애가 별 연고도 없는 서울 바닥에서 얼마나 막막하고, 불안하고, 두려웠을까. 그러다가 1976년 교회 지인의 소개로 가게 된 곳이 YH무역이다.

YH무역은 경숙에게 천국이었다. 5층 건물에다 넓은 기숙사까지. 공장딱지를 떼고 회사라는 이름의 사원증(소속 일반봉제, 번호 600, 성명 김경숙)을 받아드는 순간, 경숙은 엄마와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일하는 이 회사와 기숙사를 꼭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김경숙』, 박영희,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년). 하지만 YH무역은 이미 빈껍데기였다.

창업주인 장영호는 1966년 자본금 100만원, 노동자 10여명으로 시작해 1970년 서울 면목동에 공장대지 2720평에 5층 건물을 짓고, 한때 12억7000만원의 순이익을 올릴 만큼 급성장한 인물이다. 그는 그러나 이리저리 돈을 빼돌렸고 결국 일방적으로 회사 문을 닫는다(최순영, ‘유신체제 몰락을 이끈 여성노동자 金景淑’, 『동구의 인물 2』, 광주시 동구, 2021년).

끝까지 가혹했던 국가와 그 폭력

경숙에게 국가는 끝까지 가혹했다. 그가 힘들었을 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고, 삶의 벼랑에서 마지막 사투를 벌일 때도 안겨준 것은 날것 그대로의 폭력뿐이었다. 농성 마지막 날(8월 11일) 새벽 2시, 사다리차, 소방차, 물탱크를 앞세워 신민당사에 들이닥친 1000여명의 경찰병력은 여성노동자들의 사지를 붙잡고 강제로 끌어냈다. 함께 농성장을 지켰던 국회의원, 당원, 기자들도 곤봉으로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됐으니 여성노동자들이야 오죽했으랴.

우리는 지난 28일, 당시 경숙과 함께 농성을 주도했던 최순영 전 의원을 만났다. 김경숙이 우리 노동운동사에서 갖는 의미는 뭘까. 그의 설명이다. “YH사건은 우발적이거나 즉흥적인 게 아니다. 어떤 외부간섭이나 지원 없이 오직 우리 손으로 일궈낸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여성노동운동이었다. 이 과정에서 김경숙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한국 노동운동의 맥을 이었다. 1970년대 전태일의 근로기준법 투쟁에서 1980년대 학생들이 위장취업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시대로 넘어가는 다리를 놓았다.”

“정규직 대기업노조의 양보와 나눔 절실”

그가 기억하는 김경숙은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다. 당시만 해도 생산직 여성노동자들은 결혼이나 퇴사로 25세가 되면 대개 그만뒀다. 그게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걱정거리였다. 당시는 민주노총이 생기기 전인 한국노총 시절이었고, 이른바 ‘민주노조’로 이름 붙일 만한 노조는 거의 없었기에 경숙이 같은 노조원이 더 소중했다고 한다. 최 전 의원은 당시 임신 6개월이었다. 그가 홀몸이 아닌 줄 안 동료들이 농성장 바닥에 늘 요를 깔아줬다고 했다.

최 전 의원에게 지금 우리 노동운동에 대해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노동운동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 가장 비참한 것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정규직 대기업노동자들이 양보하고, 나누고, 더 약한 사람들을 위해 싸워야 한다.” 경숙이가 꿈꾸었던 노동운동도 그러했을 것이다. 요즘 경숙이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있고, 생전에 그렇게 아꼈던 동생 준곤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광주의 한 대기업에 다니다가 간부사원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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