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생과 60년대생의 수준 높은 대담
29일 저녁 7시 '최진석의 새말새몸짓' 유튜브 생방송. 최근 1990년대생의 자기발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K를 생각한다'의 저자 임명묵과 철학자 최진석(서강대 명예교수)의 2시간여에 걸친 대담이 펼쳐졌다. 20대인 임명묵 작가는 386세대의 전횡과 독선을 비판하고 불평등을 상속받은 세대로서 예측가능한 공정을 원한다는 내용의 책을 펴냈다. 이날 대화는 1960년대생과 1990년대생이 3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근본 문제들에 관해 기탄 없이 논의하는 자리였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보다는 박정희가 훨씬 좋습니다. 김정일보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더 좋습니다. 나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보다는 훨씬 훌륭한 지도자가 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상식적인 얘기임에 틀림없지만, 지금 이 사회에서 쉽게 공언하기엔 망설여질 만한 저 말이 최 교수의 입에서 왜 나왔을까. 저 말이 등장하는 맥락을 좀 더 들여다보자. 최 교수는 이 사회에서 사회주의를 일편단심으로 동경하는 일각의 분위기가 있음을 전제하며 이런 말을 했다. 1990년대생에게 이 문제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녔고 1990년대에 중국에 가서 사회주의를 실제로 접했습니다. 그때 내가 그 사회에서 현지인들을 접하면서 느꼈던 건,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감시, 눈치, 가난, 통제. 이것이 내가 사회주의를 직접 관찰하고 발견한 단어들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 이념의 원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어떤 이들이 사회주의와 관련한 많은 변화들을 보면서도 처음에 지녔던 원래의 태도를 못 버리는 것은, 문제인식을 위한 지적 능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 말 뒤에 김정일과 박근혜의 호오(好惡)를 비교하는 말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 나라 대통령의 지도력에 문제가 있다 해도, 북한의 권력자보다 더 못한 존재로 취급할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회주의의 초심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 지도자에 대한 불신이나 실망감을 증폭하다 보니 얄궂게도 좋고 싫음의 잣대가 상식적인 선을 넘어버리는 일이 곧잘 일어난다는 지적이다. 이 말에 이은 최 교수의 말을 더 들어보자.
하나가 싫으면 반대편으로 직행하는 호오(好惡)
"우리는 지적 관찰력이 떨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가 싫으면 바로 그 반대편으로 이동해버립니다. 박정희가 싫으면 박정희를 붙들고 싫은 점을 수정해야 하는데 김일성에게 바로 가버립니다. 박근혜가 싫으면 박근혜를 관찰하고 문제 삼아야 하는데 김정일에게 가버립니다. 자본주의에 비판적이면 자본주의를 수정하려고 해야 하는데 사회주의로 곧장 넘어가버립니다. 미국이 싫으면 미국을 붙들고 늘어져서 관찰하고 그것을 수정해야 하는데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버립니다. 이렇게 지적 인식이 약한 우리의 현실이 외교나 산업 같은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최 교수는 지적 사고 능력을 배양하는 기본적인 토양은 자기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각성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도 없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재계의 '메디치 코미디'에 대해서도 지적한다. "우리나라 부자들에겐 이탈리아 가서 메디치 가문을 보고 오는 것이 유행입니다. 메디치는 유럽에 페스트가 창궐하던 무렵에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역할을 한 뛰어난 가문이죠. 워낙 자주 가서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메디치가에 대해 더 멋지게 설명하는 이도 있을 겁니다. 얼마나 그 가문이 훌륭한가에 대해 조목조목 늘어놓지만, 여기서 끝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건지가 없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내가 저 가문처럼 무엇인가를 한다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지적 반성능력이 없죠. 대상을 보고 얻은 자극이 자기에게 어떤 변화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 자극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런 대화가 펼쳐진 것은, 임 작가가 문득 최 교수에게 이렇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최 교수가 전공하신) 동양철학이나 사상은 주로 옛날 얘기들이고 지금의 현상이나 문제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장자(莊子)'에 등장하는 윤편(輪扁) 이야기를 접하고 한국 사회에도 적용해서 생각해볼 점이 많다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교수님을 만나면 윤편의 고사를 좀 더 시원하게 듣고 싶었습니다."
임 작가는 "윤편이, 수레바퀴를 직접 만들어보니 진리나 지혜, 혹은 깨달음은 수레마다 다른 것이며 그것은 (바퀴를) 직접 조정해보고 만져본 뒤에야 얻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지식으로 받아들인 것을 그냥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반영해서 추상화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부연했다.
임 작가가 최 교수에게 '윤편'을 묻다
"우리나라는 지식생산국이 아니라 지식수입국입니다."
최 교수는 문득 이 사실을 환기시켰다.
"삶을 구체화하는 도구 가운데 가장 효율성이 높은 것이 지식입니다. 지식 수입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론을 적용하는 데 민첩합니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어떤 이론을 들으면서 항상 그다음을 궁금해하죠. 나는 최근 함평에 '기본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왜 기본이냐 하면, 인간은 기본만 할 수 있으면 탁월해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본은 몇 가지 질문으로 구성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나는 죽기 전까지 완수할 소명이 있는가. 이런 것이 있는 사람들은 세계를 궁금해합니다. 궁금하면 관찰하게 되고 자기만의 생각을 생산하게 됩니다. 지금 한국은 지식수입국으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습니다. 이젠 지식생산자가 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지금 지식생산자로서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새로운 시대엔 거기에 맞는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윤편을 통해 장자가, 혹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아닐까요. 당신은 무엇이 궁금한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어떻게 살다 가고 싶은가. 이런 질문을 하게 하는 거죠. 수레바퀴를 훌륭하게 깎은 그 사람 책을 백날 봐도, 거기에서 너의 수레바퀴는 결코 나오지 않는다. 윤편은 이 말을 하고 싶었을 겁니다."
임 작가도 스스로의 해석을 제시했다.
"제가 느끼기엔 또, 도로 환경이 바뀌고 있는데, 남이 예전에 만들었던 바퀴대로 만들어 가져와 끼면 새로운 도로에서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먼저 도로 환경을 조사해봐야 하고 폭은 얼마나 되고 축의 길이는 어떤 게 적합하고 재료는 뭘 써야 할 것인지 검토하고 시행착오를 거쳐가면서 바퀴를 만들어 끼워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식수입국의 최상위 한국, 이젠 지식생산국으로
최 교수는 재빠른 지식수입국으로 급속히 성장해온 우리 국가의 문제를 설명했다.
"지식수입국으로 사는 사람들은 주도권을 항상 이론에다 둡니다. 문제에다 두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이론의 텍스트를 펼쳐보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문제를 보고 이론을 생산하는 것이 지식생산국입니다. 세계를 보고 관찰하여 그 관찰한 내용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태도를 결정하는 것을 우리는 '지적이다'라고 말하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나라 사람들이 생각한 것을 받아들여 여기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 지식 수입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산업혁명 이후로 이 같은 업적을 이룬 경우는 역사적으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의 결과를 열심히 수행해서 일어난 이 업적이, 생각하는 능력으로 일으키는 업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이 번영이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야 한다, 각성해야 한다. 윤편의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레바퀴 제작 솜씨는 책에 못 담는다
이쯤에서 장자에 나오는 '윤편'의 원문을 짚어보자.
<제나라 환공이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 수레바퀴 제작 기술자란 뜻)은 그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망치와 끌을 놓고 환공에게 질문을 올렸다.
“감히 묻겠습니다. 공께서 읽고 계신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공이 말했다. “성인의 말씀이오.”
그가 말했다. “성인은 있습니까?”
공이 말했다. “이미 죽었소.”
그가 말했다. “왕이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 같은 것일 뿐입니다.”
환공이 말했다. “과인이 읽는 책을 바퀴 깎는 사람이 어째서 시비 거는가? 타당하면 참겠지만, 타당하지 않으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윤편이 말했다. “저는 제가 하는 일로써 그것을 봅니다. 바퀴를 바싹 깎으면 헐거워져 딱 맞지 않고 덜 깎으면 뻑뻑해 들어가지 않습니다. 바싹 깎는 것과 덜 깎는 것은 손으로 얻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입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정확한 숫자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으나 저는 자식에게 이것을 깨우쳐줄 수 없고 자식 또한 저에게 물려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70살이 되어 늙도록 바퀴를 깎고 있습니다. 그처럼 옛사람도 진리를 전하지 못한 채로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왕이 읽는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 같은 것일 뿐입니다.”>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제환공독서어당상, 윤편착윤어당하.)
釋椎鑿而上, 問桓公曰:(석추착이상, 문환공왈:)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감문공지소독자, 하언야?”)
公曰: “聖人之言也.”(공왈: “성인지언야.”)
曰: “聖人在乎?”(왈: “성인재호?”)
公曰: “已死矣.”(공왈: “이사의.”)
曰: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왈: “군지소독자, 고인지조백이부.”)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환공왈: “과인독서, 윤인안득의호? 유설즉가, 무설즉사.)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윤편왈: “신야, 이신지사관지, 착윤서즉감이불고, 질즉고이불입.)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불서불질, 득지어수, 이응어심, 구불능언.)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유수존언어기간, 신불능이유신지자, 신지자역불능수지어신.)
是以行七十而老斲輪.(시이행칠십이노착윤.)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고지인, 여기불가전야, 사의. 연즉, 군지소독자, 고인지조백이부.”)
<장자 제13장 천도(天道) 13절> 중에서
이날의 대화로 '윤편'의 고사는 최 교수와 임 작가의 혜안이 작동해 대한민국 오늘에 걸맞은 실용적인 지혜와 깨달음을 담은 이야기로 거듭난 것 같다. 장자가 이 윤편의 옛일을 거론한 이유는 13장 13절 앞부분에 스스로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 들어있다. 그 대목을 인용해보면 이렇다.
"세상에서 도를 (얻기) 위해 소중히 여기는 것은 책이다. 책은 말(을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말은 소중한 데가 있다. 말이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은 뜻 때문이다. 뜻에는 가리키는 바가 있다. 뜻이 가리키는 것을 말로는 전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말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책을 (소중히 하여) 전해준다. 세상이 아무리 소중하게 여긴다 해도 소중하게 생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란 정말로 소중하지는 않다. 눈으로 보아서 보이는 것은 형체와 색깔일 뿐이고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은 이름과 소리일 뿐이다. 슬프다, 세상 사람들은 형체, 빛깔, 이름, 음성으로 도의 참모습을 터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형태와 색깔과 이름과 음성으로는 결코 도의 참모습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참으로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세상에 이 사실을 누가 알고 있단 말인가."
지식생산국이 되는 길
장자는 도(道)를 책이나 말로써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윤편의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윤편이 자식에게도 자신의 바퀴 만드는 기술을 물려주지 못하는 까닭은, 그 기술은 손 자체에 있으며 그 기술을 처리하는 자신만의 솜씨를 말이나 글로 완벽하게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로지 스스로 그 일과 대면하여 실력을 쌓아가는 수밖에 없다. 윤편은 물론 책이 지식을 축적하고 데이터를 활용하여 인류 문명을 바꿀 것이라고는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인간이 그 삶을 통해 이룬 고유한 성취들을 결코 누구에게 오롯하게 전달하거나 전승할 수 없듯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 진리도 경전이나 스토리텔링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스스로 찾아나서서 도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걸, 장자는 윤편의 수레 깎는 솜씨에 빗대 설명했다.
어쩌면 진정한 지식 생산이란 평생 지식 수입과 벤치마킹으로만 살아온 인생에게는 장자의 도(道)처럼 지난(至難)한 길인지 모른다. 최 교수의 말처럼 이 나라가 스스로 '참'의 푯대를 세우는 존재가 되기 위해선, 국민들이 저마다 삶의 기준을 일신하고 창의의 가치를 돋우는 생각의 대혁신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낡은 이념과 낡은 방식과 낡은 성공 역사를 더 걷어내는 길. 90년대생과 60년대생은 '윤편'의 자부심 앞에서 그런 시대공감을 얻어내지 않았을까.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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