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2022년 20대 대선을 계기로 ‘선진국’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갈수록 난망해지고 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가 한국을 선진국으로 공인했다는 소식에도 불구하고 마냥 흔쾌하지 못한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사상 초유의 ‘공정’ 가치논쟁을 중심으로 치러질 것 같았던 대선이 여야는 물론 여권 내에서 예비후보 간 상호비방의 퇴행적 관행이 되살아나면서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있다. ‘공정’ 가치의 훼손으로 탄핵 당한 박근혜 정권의 유산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채 LH 사태로 오히려 불공정이 뿌리 깊은 현실로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전은 과거의 ‘망령’까지 소환하면서 대국민 배신을 재연하고 있다.
공정 가치의 훼손은 기본소득을 둘러싼 논란마저 ‘돈’ 논쟁으로 축소시키고 있다.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사유가 1차 지급 당시에는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모든 국민에게 위로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전 국민이 대상이었기 때문에 재난기본소득이라고도 불렸다. 코로나19가 장기화하면서 지원금 지급이 반복되자 명분이 달라졌다. 재정건전성을 명분으로 보편지급에 결사항전하는 기재부와 ‘필요한 계층에게 두껍게’ 지급한다는 명분으로 무장한 여당 일각의 합작품으로 선별적 재난지원금이 반복되었다. 그 사이 재정 건전성 떼쓰기는 당연시되었고, 재난지원금의 명분은 코로나19의 장기화로 감소한 소득의 보전으로 슬그머니 바뀌었다. 재정 건전성은 보편지급을 거부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부자들을 위한 소비쿠폰 발행이라는 기재부의 ‘꼼수’에서 드러났다.
작금의 기본소득 논란이 지급 규모와 재원조달 방식에 집중되고 있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기본소득이 한국 사회에서 지속 가능한 의제가 되려면 몇 가지 과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노동사회에서도 충실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노동소득과의 상호관계가 규명되어야 한다. 특히 한국처럼 노사협상의 테이블이 기울어진 사회에서 기본소득은 자칫 노동소득의 상승을 저해하고, 결과적으로 처분가능한 소득의 상승을 지연시킬 수 있다. 이 문제는 결과적으로 기본소득을 노동소득과 통합하는 밀튼 프리드먼의 마이너스 소득세의 선별주의로 손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리드먼은 저소득층의 소득 개선에 대해 복지국가의 해체라는 커다란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기본소득이 마이너스 소득세와 차별화되기 위해서는 노동시간의 단축과 결합되어야 한다. 프리드먼류에서는 주 120시간 노동해서 가령 200만원 월급 받아 불량식품을 소비하면서 생활해도 기본소득의 정책목표는 달성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정부의 역할은 불량식품이라도 소비하고 연명할 수 있도록 식품위생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신선식품을 소비할 수 있도록 소득증대를 뒷받침해 주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같은 200만원이라도 120시간이 아니라 주 40시간의 법정노동시간이 지켜지면서 달성되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도 당장은 벗어날 수 없는 노동사회에서 기본소득이 존재 이유를 입증하려면 기본소득으로 노동소득을 점차 대체하는 전망이 제시되어야 한다. 기본소득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핵심의제로 떠오르는 이유는 일자리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불안정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망 하에서 기본소득은 노동에 연계되지 않은 소득을 보장함으로써 자발적 실업을 포함한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실질적으로 확대하여 수동적인 불안정성을 능동적인 유연성으로 전환하는 한편, 줄어드는 일자리는 실업이 아니라 노동시간의 단축에 기초한 ‘시간주권’의 확대로 반전시킬 유일한 수단이다. 기본소득은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확대할 때 비로소 미래지향적인 사람 중심의 제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라면 개인에게 ‘선택의 자유’라는 허울만 씌워놓고 자기만족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선택능력을 강화하고 다양한 선택 대안도 열어주어야 할 것이다.
▷서울대 경제학과 ▷독일 브레멘대 경제학박사 ▷명지대 경영정보학과 교수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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