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55]우가키 조선총독이 지정한 문화재체계 전면개편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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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입력 2021-08-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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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왜 숭례문은 국보1호, 흥인지문은 보물1호가 됐을까?

  • 박정희는 왜 우가키 조선총독의 문화재 체제를 유지했나

  • ‘국민에 의한’ 진짜 대한민국 문화재체계 수립하라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국보1호, 보물1호, 사적1호, 천연기념물1호는 누가 언제 지정했을까?
일본 제국주의는 본국의 중요 문화재는 국보, 식민지의 그것은 보물로 차별하여 지정했다.

1897년 '고사사보존법(古社寺保存法)을 제정하고 같은 해 12월 28일 일본 첫 국보가 탄생했다.(1)*

일제는 1929년 '고사사보존법'을 '국보보존법(国宝保存法)'으로 개정했다. 식민지 조선의 보물 체계는 1934년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재임기간 1931~1936년)에 의해 수립됐다.

1933년 12월 5일 우가키 총독령으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을 제정했고, 그해 12월 14일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회가 조직됐다. 총독부 내무국장을 회장으로 이능화(조선사편수회 위원), 최남선(조선사편찬위원장),류정수(조선박람회 평의원), 김용수(총독부 사무관)등 모두 친일인명사전 등재 인물 종일매국노 포함 25명으로 구성됐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8월 27일자 관보를 통해 지정문화재를 발표했는데,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3건 등 모두 169건이었다.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흥인지문), 고적 1호는 포석정(2)*,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광역시 도동의 측백나무 숲(3)*이다. 169건 모두 전지적 일본인의 시각으로 일본에 의해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문화재 선정이자 일련번호 지정이다. 우가키 총독과 종일매국노들이 1934년 지정한 보물 고적 명승 천연기념물 등이 보물을 국보와 보물로 구분한 것을 제외하고 2021년 대한민국의 문화재 기본 체계로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왜 숭례문은 국보1호, 흥인지문은 보물1호가 됐을까?
1592년 5월 23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대규모 왜군선단이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고니시 유키나가 제1군은 단 20일만인 1592년 6월 11일 흥인지문(동대문)으로 입성해 한양을 점령했다. 익일 가토 기요마사가 숭례문(남대문)으로 한발 늦어 입성했다. 가토 기요마사는 문서를 교묘하게 꾸며서 자신이 먼저 한양에 입성한 것으로 공적을 조작했으나 후일 들통났다.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1894~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제는 조선의 지배권을 장악, 이른바 갑오경장으로 한반도의 모든 것을 일본화하고 문화재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시 병력을 동원하여 체결을 강요했던 하세가와 요세미치(長谷川好道) 조선주둔군 사령관 겸 조선통감 대리는 숭례문을 비롯한 서울의 4대문이 교통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없애려 했다.

그때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 거류민 단장이던 나카이 기타로(中井喜太郞)가 ‘임진왜란 때 가토가 숭례문을 통해 한양에 입성하였고 고니시가 흥인지문으로 들어왔으니 이를 기념하여 각각 개선문으로 삼아야 한다’고 하여 철거를 겨우 면했다.(한국의 지식계 일각에서는 나카이에게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개탄한다)

그런데 왜 우가키 조선총독은 보물 1호를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먼저 한양으로 입성한 흥인지문(동대문)로 정하지 않고 제2군 가토 기요마사가 나중에 입성한 숭례문(남대문)을 보물1호로 지정했을까?

여기에는 다음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조선총독부에서 숭례문이 흥인지문보다 가깝다.

둘째, 일본의 모든 성과 신사의 정문은 남문이 정문이다. 경성(서울)의 정문 역시 남대문 숭례문이다.

셋째, 우가키 조선총독은 일본식 불교 신자로서 독실한 일본식 불교신자인 제2군 대장 가토를 천주교 신자인 제1군 대장 고니시보다 좋아했다. 가토군이 경주를 점령시 불교관련 문화재를 파괴하지 않은 걸 높이 평가하고 가토군의 진군노선인 경상도 지방의 불교문화재를 우선 지정했다. 오늘날 국보 앞자리 번호가 대다수 폐허가 된 옛 절터가 많고 불교관련 유물이 많은 이유다.

넷째, 최남선등 종일매국노들과 총독부 간부들은 이러한 우가키 총독에 영합하기 위하여 숭례문을 보물 1호로 정하길 제안했다.
 
박정희는 왜 우가키 조선총독이 정한 문화재 체제를 유지했는가?

1961년 5월 16일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은 그해 12월 27일 '문화재보호법'을 국가재건 최고회의 제93차 상임위원회에서 통과시켰다. 총 7장 3호 부칙 3항으로 구성된 동 법은 우가키 조선 총독 명의로 제정한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의 복사판이다. 1962년 12월 20일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국보, 보물 2원 체계로 나눠 일련번호를 붙였다.

그런데 문화재청 자료를 비롯한 기존 텍스트 대다수는 그 시대를 대표할만한 것들을 가려 국보로 하고 나머지는 보물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문화재청 소속 관방학자들은 “문화재의 일련번호는 가치의 우선 순위와 아무 관련이 없고, 일제시기 정해진 순서를 그대로 따르는 것에 불필요한 피해의식과 반감을 갖지 말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마다 갖고 있는 의미와 그 안에 담긴 깊은 뜻을 찾아내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라고 훈계하고 있는데, 이는 마치 일제강점기 일본 고위관리같은 훈시조 궤변이다.

그렇다면 숭례문(남대문)이 대표성이 있으므로 국보 1호로, 흥인지문(동대문)은 대표성이 모자라 보물 1호로 정한 것인가? 만일 우가키 총독이 흥인지문(동대문)을 보물1호, 숭례문(남대문)을 보물2호로 정했더라면 2021년 현재 흥인지문이 국보1호, 숭례문이 국보2호가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는 비단 국보1호, 보물1호 문제만 아니다. 문화재체계 전반의 문제다.
 
우가키 가즈시게 vs 다카키 마사오

(왼쪽부터)우가키 가즈시게 총독 일본 육군사관학교졸 육군대장, 박정희(다카키 마사오)대통령, 일본 육군사관학교졸, 육군대장, 우가키 총독의 식량증산 독려 행사, 다카키 통령의 식량증산 독려 행사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다른 분야는 논외로 한다. 적어도 문화재지정에 관한 한 박정희(제1차 창씨개명: 다카키 마사오, 제2차 창씨개명: 오카모도 미노루)는 자신을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보다 10대 조선총독 다카키 마사오로 인식했다고 통찰·분석된다.

박정희 (다카키 마사오)의 필생의 양대 롤모델은 기시 노부스케(아베 제96대 일본총리의 외조부 )제 56대 57대 일본 총리와 우가키 가즈시게 제6대 조선총독이다. 전자 기시 노부스케는 많이 거론돼 후자 우가키 가즈시케만 집중 선택해 그와 창씨개명 이름이 흡사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와 비교해 보겠다.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재임기간, 1931~1936년)는 오카야마현 산골 마을의 가난한 농부의 5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대장으로 예편했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출신 학력 경력도 우가키와 비슷하다.

"내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면 제일 먼저 농민들에게 밥을 먹게 해주겠다."

우가키의 정책은 '조선인에게 약간의 빵을 주겠다'로 요약된다. ‘봉공, 자조, 협동’을 농촌진흥운동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제5,6,7,8,9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이자 제10대 조선총독(?)다카키 마사오의 새마을운동 슬로건 '근면, 자조, 협동' 역시 우가키의 '봉공, 자조, 협동'의 표절에 가까운 모방이다.

우가키는 수력발전소 건설 등 중화학 공업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으며 스스로도 조선을 근대화시켰다고 자부했다. 박정희(다카기 마사오) 역시 그대로 따랐다.

우가키는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기념물 보존령'을 지정하고 1934년 1차 발표한 지정문화재에 보물, 고적(사적), 천연기념물을 지정했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역시 그대로 따랐다.

제6대 조선총독 우가키는 '일선융합(日鮮融合)', '내선일체' 또는 '지방진흥' 등을 추진하는 동시에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전후 조선의 인력을 식량증산과 대륙침략전쟁에 총동원했다. 또한 최남선, 윤치호, 이광수 등 조선의 종일매국 수뇌급들에 대한 우대책을 강화했다. 이는 박정희(다카키 마사오)의 그것과 거의 같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국민에 의한’ 진짜 대한민국 문화재체계 수립하라

오늘날 G7 선도국 대한민국의 문화재 관리 체계가 1930년대 우가키 가즈시게 제6대 조선총독 시대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상황은 일대 치욕적이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지나간 숭례문과 흥인지문을 국보1호, 보물1호 경애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포석정이 사적1호라는 일제의 조선 정복의 상징중의 상징을 게다가 일련번호까지 고스란히 이어받고 있다는 것은 경술국치의 연속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비판없는 발전은 없다. 그러나 대안 없는 비판은 백해무익하다. 대한민국 주권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아래와 같이 진짜 대한민국의 국보를 30호까지(샘플) 대안으로 제시해보았는데 강호제현의 고견은 어떤지 궁금하다. 

링컨 전 대통령의 게티즈버그 연설 중 ‘국민을 위한(for the people)’은 사족일 뿐 핵심은 ‘국민에 의한(by the people)’에 있다. ‘국민에 의하여’ 선출되지 못한 독재자일수록 ‘국민을 위하여’를 부르짖는다.

5000만 국민 모두 주인인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새 시대 새 문화재 선정은 처음부터 끝가지 민주주의 핵심 원칙인 ‘국민에 의하여’로 진행돼야 한다. 즉 새로운 문화재 체계 수립과 선정에 투명하고 공정한 각계 전문가와 일반 국민의 여론조사, 국민창안제 등을 가장 큰 비중으로 활용해야 한다.  정부 당국도 전례를 답습하거나 이를 묵살하지 말고 국민의 뜻을 100% 그대로 집행하기 바란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각주 

(1)*일본 국보 제1호: 주손지中尊寺 곤지기도 金色堂 히라이즈미(平泉)에 후지와라 기요노리(藤原淸衡)가 조영한 불사로 1124년 1897년 12월 28일 국보 1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로 일본 국보는 각 부문별로 회화 서적 등 일련번호가 붙어있다.

(2)*포석정은 927년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군대에게 붙잡혀 경애왕은 자살한 곳이다.

(3)*측백나무는 일본의 특산종 편백나무(히노키)와 같은 과(family)에 속하며 일본 각지에서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4)*특히 원래의 조선총독부지정 보물 13호 고달사원종대사탑비를 박정희( 군정통치 1962년 12월) 군사정권은 이를 둘로 나눠, 탑비의 귀부와 이수 부분은 보물 제6호로, 탑신 부분은 보물 7호로 지정하는 예사 한국인으로서도 이해불가한 변태적 기행을 노정하고 문화재에 심각한 모욕을 자행하였다. 더욱더 이해불가 불가사의한 점은 2021년 현재까지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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