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리아, 강대국 모드로 전환하라' (황태규·박수진 저, 굿플러스북)
지금이 세계사의 심각한 전환기라는 인식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게 된 것 같다. 코로나19가 가속화한 디지털 문명의 새로운 삶의 양식들이 모르는 사이에 깊이 파고들었다. 언택트 사회라는 개념이 생겨났고, 산업사회의 근간을 이뤄온 시장과 대중의 관념이 근본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을 겪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간을 격리해온 공간적 거리를 극복하는 기술들이, 글로벌을 단일 유기체로 뚜렷하게 전환시켜 나가고 있다. 이 변화들은 페스트 이후의 유럽 르네상스처럼, 질병이 가속화했으나 질병 이후에도 불가역적인 양상으로 자리 잡을 인류 전체의 중대한 변모를 예고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이젠 우리 삶을 통째로 바꾸고 우리의 생각의 수준을 대담하게 높여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선 인식의 혁명이 필요하고 기존 삶의 표준들을 일제히 재점검해야 한다고. 모두들 고개는 끄덕이지만,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지?'라는 다음 질문에서 눈빛이 모호해진다. 지금 여기에서 담대히 저기로 건너가자고 말하지만, 그 '저기'가 어디인지, 건너가는 일이 어떤 행위와 조치들인지는 자세히 말하지 못한다. 옛날 책을 들춰봐도 나오지 않고, 낡은 학문을 뒤져도 이 새로운 케이스에 적용할 것이 별로 없고, 똑똑한 사람의 말을 들어도 힌트가 되는 대목이 그리 없다. 뭘 바꿔서 어디로 가자는 건가? 이 질문에 대해, 자신의 아이디어와 비전으로 조목조목 내놓는 '신문명의 선지자'를 별로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1960년대생 한 지식인이 낸 의견들이, 조목조목 영감(靈感)을 불러일으킨다. 2017년 대통령비서실 균형발전비서관을 지낸 황태규 교수(우석대)의 책 얘기다. (박수진 교수와 공저)
그는 한국이 지금 '강대국'이라고 단언한다. 강국(强國) 혹은 강소국(强小國)이 아니라 강대국(强大國)이라고 한 점을 주목하라. 2019년 세계가 객관적인 지표로 국가경제를 판단하는 30·50클럽(1인당 소득 3만달러-인구 5000만명)에 가입한 점을 근거로 든다. 미국, 독일, 일본,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7번째다.
물론 30·50클럽에 속한 것이 강대국이란 의미는 아니다. 강대국은 군사력, 인구 및 경제력, 문화력을 모두 갖춘 경우로 봐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한국은 국민R&D지수(국민1인당 특허출원율), 디지털시장경제지수(1인당 이커머스 이용액), 문화산업지표(1인당 영화관람횟수)에서 단연 1위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지표만으로 한국을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지의 논란은 있겠지만, 인구 5000만의 독자 내수시장을 갖춘 점을 부각시켜 '대국(大國)'론을 전개하고 있는 점은 인상적이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강대국'의 싹수를 보였던 때가 있었던가. 황교수는 뜻밖에 고려시대(918~1393, 475년)를 꼽는다. 외세의 침략과 굴종을 겪었지만, 국가의 개방성과 포용성으로 문명발전의 축을 이뤄냈다는 분석이다. 금속활자와 고려인삼, 고려청자를 문명적 성취의 상징으로 본다. 물론 이런 견해가, 우리 역사에 내재되어 있는 강대국 역량이나 경험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론된 것이겠지만, 당면한 미래에 무엇인가를 제시할 만한 롤모델로 삼기에는 돌파해야 할 논란과 이견이 너무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미심장한 얘기다. 역사의 새로운 해석을 돋워 우리 내면역량을 짚어내는 작업은, 논의의 장(場)을 바꿔서 좀 더 깊고 넓게 전개해보면 어떨까 싶다.
강대국 시민1호, 청년세대
눈이 트이는 대목은, 한국 청년들을 '강대국 시민' 1호 세대로 보는 관점이다. MZ세대로 불리는 1990년대생에 대한 분석틀이 설득력 있고 참신하다. 왜 이 세대가 중요하냐 하면, 단순히 우리의 미래세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대국 한국을 확고하게 할 전환기의 주역이기 때문이며 그런 역량을 갖춰가고 있는 첫 세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가지고 있지 않은 성장환경 경험을 지니고 있으며 기성세대가 몸부림치듯 내달려온 산업사회의 그림자가 없는 세대이기도 하다.
청년세대는 선진국형 교육을 받고 자란 1세대로, 후진국형 교육을 받은 기성세대와는 뚜렷이 달라진 의식을 지니고 있다고 황 교수는 말한다.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보수나 진보와 같은 이념지형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선진국형의 가치구조인 사회적 책임의 중시, 공정함의 추구, 균형적인 사고와 행동, 가장 유능한 실용주의, 변화와 혁신의 일상적 수용과 같은 매우 새로운 가치지형을 스스로 형성해가고 있는 세대로 볼 수 있다. 이들에게 강대국 시민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기회를 파격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기성세대가 서둘러야 할 책무라는 것이 황 교수의 역설(力說)이다.
"우리는 젊은 세대에게 가르칠 것보다는 배울 게 더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기술적인 부분에서 이미 그들에게 기대어 살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역(逆)멘토링제도'를 도입하여 각 부서의 팀장급 이상이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젊은 사원들을 찾아가 의견을 구한다."
강대국인 한국, 국가경영은 '약소국리더십'
강대국은 글로벌 가치를 리딩하는 국가이기도 하다. 황 교수는 국가 외교의 수준이 아니라, 글로벌의 '대한민국'을 경영하는 차원의 강대국 정책을 대담하게 제안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한반도의 평화는 세계 평화를 주도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고 보고, 강한 한국으로서의 국익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선 한국 해외주둔군 사령부가 필요하다는 방안을 내놓는다. 이것은 그 기구 자체의 의미라기보다는 방향을 제시하는 차원의 큰 그림이라고 보는 게 옳을 듯하다. 식민지와 한국전쟁 이후 전쟁에 대해선 방어적 입장만을 취해온 수동적 평화정책에서 능동적인 평화정책을 구현하자는 측면에서 보자면 역발상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글로벌화를 겨냥한 교통관광산업부, 식량안보를 염두에 둔 해외농업지원청, 해외투자와 국내투자유치를 전담하는 해외투자청, 750만 재외동포의 공공허브가 될 수 있는 재외동포청을 설립해 글로벌 국가로서의 시스템적인 면모를 갖추자고 주장한다. 글로벌 강대국의 상징이기도 한 의회 상하원제를 도입해, 정치적인 시스템 또한 면모를 일신하자는 의견도 내놓는다. 관청의 설립이나 정치 분권화가 강대국의 필수조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의견에는 한국이 글로벌 무대를 주도하는 큰 그림이 느껴져 이 나라의 의식과 비전이 자기 틀을 깨고 나아가야 할 파격의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유익한 의견이라고 믿는다.
황 교수는 '코리아, 강대국 모드로 전환하라'는 제목의 우렁찬 책을 펴낸 배경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럽 국가들이 300년에 걸쳐 이룬 변화를 우리는 70년 만에 이루어냈다. 바로 강대국이라는 문 앞까지 온 것이다. 이제 강자의 시각으로 국가체계를 전환하고, 강국의 입장에서 산업전략과 외교전략을 짜야 할 때다."
그런데 고도성장을 한 한국은 지금 어떤가. 삶의 질에 관한 지표는 악화했다. 국가관과 역사관도 서로 다르고 세대 간의 가치관도 서로 다르다. 왜 그럴까. 그는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시대의 속도를 못 따라가고 지난 시대에 경험과 연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현실은 강대국인데 의식은 개발도상국인 나라.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하고 약소국가 경영 마인드를 벗어나도록, 그 사람들이 국가중심을 청년세대에게 내줘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매서운 주장이다. 그게 강대국 모드다. 전환기엔 국가 주역 세대도 전환해야 한다는 논리다.
대선 주자들에게 전환기 책무를 묻는다
마침 내년 대선을 앞둔 시점, 여야의 많은 주자들이 비전과 정책을 제시하며 경쟁을 벌이고 있는 때다. 나라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들의 고민들이 보이기는 하는가. 이 전환기의 국가상황을 엄중하고도 두렵게 보고, 오로지 권력쟁탈이 아닌 시대책무의 수행을 위해 고뇌하는 지도자가 보이는가. 구시대적인 자기(自己)를 내려놓는 결단과 강대국으로 달려가야 할 나라를 더 이상 주춤거리게 하지 않는 대승적 선택을 염두에 두는 참된 리더가 보이는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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