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난 2018년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 LG그룹 3대 회장인 구본무 전 회장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당시 40세였던 장남 구광모 상무가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르면서 LG의 4세 경영이 시작되면서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의 취임 이후 조용한 변화를 넘어 혁신의 가속페달을 힘차게 밟고 있다고 재계는 분석한다. 40대 젊은 총수가 불러온 LG의 변화는 생각보다 강력하고 그 풍속도 예상보다 빠르다는 게 중론이다.
임직원들에게 자신을 회장이 아닌 대표라 불러 달라고 말하는 구 회장은 선대 회장들처럼 ‘인화’가 몸에 밴 소탈한 모습이다. 특히 그는 LG의 미래인 젊은 인재들의 과감한 도발(?)에 매우 관대하다.
사실 구 회장은 취임 초부터 벤처 정신을 강조해왔다. 개방형 협력과 혁신을 중심으로 한 ‘오픈 이노베이션’에 묵묵히 꾸준한 지원을 해왔다.
국내에서는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사이언스파크’를 중심축으로 국내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협력하고 있다. 또 해외에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탈(CVC)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통해 글로벌 유망 스타트업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있다.
특히 구 회장은 지난해 LG사이언스파크를 방문한 자리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과감하게 도전하지 않는 것이 실패”라며 “과감한 도전 문화를 만들어 달라”며 혁신을 거듭 강조했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기존의 틀과 방식을 넘는 새로운 시도가 작지만 중요한 차이를 만들고, 비로소 고객 감동을 완성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구 회장의 벤처 정신을 가장 적극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곳은 LG전자다. LG전자는 지난해 말 최고전략책임자(CSO) 부문 산하에 ‘비즈인큐베이션센터’를 출범시켜 벤처 육성에 집중하고 있다. 센터장은 서영재 전무가 맡고 있는데, 그는 ‘LG 프라엘’ 등 LG전자의 신가전을 이끈 주역 중 한 명이다.
올해도 사내벤처 육성을 위한 LGE 어드벤처 2기를 가동했다. LG전자는 내달 1일까지 임직원을 대상으로 신사업을 비롯해 제품과 서비스 관련 다양한 아이디어를 공모, 약 2개월간 서류 심사와 심층 인터뷰를 거쳐 5개 팀을 선정한다.
이후 11월에는 임직원 투표와 온라인 공개오디션을 진행해 사내벤처팀을 최종 선발할 계획이다. 선발된 사내벤처팀은 연말부터 향후 1년간 과제 개발에만 열중한다. 최종 결과물이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회사 내에서 사업을 진행하거나 스타트업 형태로 독립할 수 있다.
특히 올해는 더욱 많은 임직원에게 기회를 제공하고 도전하는 조직문화를 더욱 확산하기 위해 공모 지역을 북미·유럽의 해외 법인까지 확대해, 선발 규모를 대폭 늘렸다.
또한 비즈인큐베이터센터는 외부 액셀러레이터와도 협업해 수시로 사내에서 아이디어를 공모, 사업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사외벤처로 독립시킨다. 독립 후 실패해도 5년 안에 재입사 기회를 부여해 ‘도전하는 즐거움’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지난 1월 LG전자의 첫 사외벤처로 독립한 ‘EDWO’는 구 회장의 벤처 정신이 빛을 발한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EDWO는 비대면 방식으로 온라인에서 고객 체형에 맞는 최적 사이즈와 핏을 찾아주는 패션 플랫폼 서비스 ‘히든피터(Hidden Fitter)’ 서비스를 시작, 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임직원의 소프트웨어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지원에도 힘쓰고 있다. LG전자는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KAIST·카이스트) 등 국내 대학을 비롯해 미국 카네기멜런대(CMU), 서던캘리포니아대, 뉴욕대, 캐나다 토론토대 등 해외 대학과 연계해 다양한 소프트웨어 전문가 교육 과정을 설치했다.
김성욱 LG전자 비즈인큐베이션센터 상무는 “임직원의 집단 지성을 통해 새로운 고객의 가치를 발굴하고 도전하는 조직 문화를 더욱 확산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LG, 국내 넘어 해외서도 유망 스타트업 키운다
구 회장이 이처럼 벤처 육성에 적극적인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국내 5대 그룹 총수 중 유일하게 공대 출신인 그는 미국 로체스터 공대 재학 시절 수많은 미국의 벤처 성공 사례를 직접 봤을 것이다. 실제로 글로벌 대기업의 사내·외 벤처 육성은 이미 대세가 됐다. 국내외 주요 정보기술(IT)·전자업계에서는 임직원이 '될성부른' 아이디어만 내놓으면, 자사 업무에서 제외한 뒤 창업에만 매진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LG는 2018년 5월 미국 실리콘밸리에 기업벤처캐피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해 미국 유망 벤처 투자의 물꼬를 텄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5개 계열사가 총 4억2500만 달러를 출자한 펀드를 운용한다.
모빌리티 공유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라이드셀(Ridecell)’에 첫 투자를 시작한 이래 자율주행, 인공지능, 로봇, AR와 VR, 바이오 등 그룹의 미래 준비 차원에서 신기술 및 역량 확보를 위한 투자와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집중적으로 인공지능(AI) 분야에 투자했다. AI 분야 투자도 제조, 전장, 검색, 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이스라엘, 러시아에 둔 '테크센터'도 현지 글로벌 기업 연구소, 벤처기업, 대학 연구소 등과 협력해 오픈 이노베이션 활동을 펼치고 있다.
LG는 지난 2019년 10월 소프트뱅크벤처스가 AI 분야 유망 스타트업 발굴을 위해 조성한 3200억원 규모의 ‘그로스 엑셀러레이션 펀드(Growth Acceleration Fund)’에도 출자해 이목을 끌었다. 이를 위해 LG전자,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4개 계열사가 200여억원을 공동 출자했다.
재계 관계자는 “구광모 회장이 취임한 이후 지난 3년간 LG그룹 임직원들의 혁신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라며 “LG 스마트폰 사업 철수 등 성장이 지체되는 사업은 과감히 접고 AI, 전장사업 등 미래 유망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구 회장의 ‘선택과 집중’ 전략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벤처 정신에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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