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남한산성을 완성한 사람은 벽암각성(碧巖覺性1575~1660)대사가 지휘한 의승군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에 3년 만에 완공했다. 그 공로로 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에게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시호를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현종10년(1669) 6월 20일(신사)에는 당시 상황을 유추해볼 수 있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주부윤(廣州府尹) 심지명(沈之溟)이 임금께 아뢰었다. 병자년(1636년 인조14년)에 (남한산성 쌓을 때) 승군의 힘이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臣)이 지난해(1668) 북문과 서문을 건립할 때 일반백성(民丁)이 3일 동안 한 일이 승군이 하루 한 일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대체로 승군들은 부역할 때 죽을 힘을 다해 일하기 때문입니다.”
부역 때문에 마지못해 끌려나온 일반백성들보다 승군들의 울력(일) 속도가 3배나 빨랐다는 이야기다. 결국 ‘이회사건’ 이후에 모든 일을 승군이 떠맡게 되었을 것이다. 성을 완성한 후 남은 공사대금을 국고에 반납까지 했다. 1846년 홍경모(洪敬謨1774~1851)가 편집한 『하남지(河南志)』권9 성사(城史)에는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회 이름은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영의정 이원익(李元翼)과 연평부원군 이귀(李貴)가 남한산성 수축을 청하였다. 총융사 이서(李曙)에게 명하였다. 이서는 고승인 각성(覺性)과 응성(應性) 등을 불러 지역을 나누어 일을 맡겼다.”
본래 산성 안에는 사찰이 두 개 밖에 없었다. 추가로 7개를 새로 건립했다. 동문 근처의 개원사(開元寺)는 본영사찰이었고 나머지 8개사찰은 팔도에서 차출된 승병들이 출신지별 숙식처로 이용했다. 나라의 어려움 앞에서 조선팔도에서 달려와서 하나가 된 모범사례이기도 하다. 이후 270년 동안 수도 한양을 지키는 호국사찰 역할을 겸했다.
남한산성 안에는 많은 사당이 있다. 청량당에는 이회(李晦), 숭열전에는 이서(李曙)를 모셨다. 이서는 남한산성뿐만 아니라 각처의 산성을 수리했고 뒷날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병자호란 와중에 과로로 인하여 남한산성에서 순직하였다. 청계당(聽溪堂)에는 벽암대사를 봉안하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세 사람 모두 남한산성 관련 공로자들이다. 현재 청계당은 없어지고 영정은 청량당으로 옮겨졌다. 일부에서는 청계당과 청량당이 처음부터 같은 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 정면에 이회를 봉안하고 좌우로 벽암대사와 이회의 두 부인을 모신 걸로 미루어보건대 같은 집이라고 보기에는 억측이 지나친 것 같다. 구전기록이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이니 그러려니 하고 알아들으면 될 일이다.
무신도(巫神圖)에 가까운 청량당 현재 영정이 아니라 제대로 된 벽암대사의 진영에 호은유기(好隱有璣1707~1785)는 이렇게 찬(讚)을 붙였다.
호랑이를 그리되 포효하는 모습까지 미칠 수 있는가? 터럭뿐이로다.
사람을 그리되 그 속마음까지 드러낼 수 있겠는가? 얼굴뿐이로다.
벽암존자의 영정에서 그 명성과 덕행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의대(衣帶 왕이 내린 가사)뿐이로다.
나의 찬사(讚辭)가 하늘과 땅을 감화시킨 그 모습을 다 드러낼 수 있는가? 붓의 행로가 막힐 뿐이로다.
원철 필자 주요 이력
▷조계종 불학연구소 소장 ▷조계종 포교연구실 실장 ▷해인사 승가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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