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남수 칼럼] 한국 ‘회색 코뿔소 증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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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서정대학교 교수(전 YTN대표이사) 사장)
입력 2021-09-1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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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수 서정대 교수] 

통상 경제 위기가 발생하면, 이를 나심 탈레브가 얘기한 ‘검은 백조’로 보는 시각이 주류를 이룬다. 전혀 예상치 못한 ‘극단의 왕국’이 현실화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느닷없이 출몰하는 검은 백조가 아니라, 미셸 부커가 얘기한 ‘회색 코뿔소’에 가까운 경우가 더 많다. 지평선 위에서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코뿔소는 멀리 있지만 눈에 보이는 위험이다. 단기적인 일에 몰두해 있다 보면 우리는 실재하는 위험 신호를 외면하기 십상이다. 정작 코뿔소가 빠르게 돌진해 오면 이미 때는 늦은 상황. 대표적인 게 2008년의 금융위기이다. 서브프라임에 문제가 있다는 빨간불이 이전부터 깜빡였지만 ‘버블 잔치’에 취한 시장은 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마침내 거품은 터졌고, 코뿔소에 치인 경제는 오랜 기간 신음했다.

최근 들어 한국 경제의 제로 성장, 더 나아가 마이너스 성장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잇따르고 있다. 잠재성장률(물가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노동과 자본 등 생산요소를 활용해서 최대한 달성할 수 있는 경제성장률) 또는 장기성장률에 대한 경고 신호가 점멸하고 있다. 경제의 기초 체력에 심각한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지적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정부도, 정치도, 기업도 단기 성과를 중시하는 지배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해 이 ‘회색 코뿔소’ 문제 해결을 뒷전으로 미뤄왔다는 데 있다. 그동안 잠재성장률의 내림세는 계속됐고 이젠 제로 또는 마이너스 성장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까지 몰렸다. 경보음을 귀담아듣지 않으면 회색 코뿔소가 달려들 것이고 화들짝 놀라서 쳐다볼 때는 실기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현재 잠재 또는 장기성장률에 대한 진단은 비관 일색이다. 한국은행은 당초 2000년대 초반에만 해도 5%대를 유지했던 잠재성장률이 2019~2020년에는 2.5~2.6%로 반 토막 났다고 분석했다. 최근 이주열 한은 총재는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코로나 사태에 따른 고용 악화 등이 겹쳐 잠재성장률이 2% 수준으로 낮아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앞으로의 전망은 어떨까? 구조적 개혁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더 악화될 것으로 우려된다. 김세직 서울대 교수는 저서 <모방과 창조>에서 ‘5년 1% 하락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김 교수는 장기성장률에 주목한다. 어떤 해의 장기성장률은 앞뒤 5년에다 당해연도를 포함한 11년간의 성장률 평균치이다. 김 교수는 이 성장률이 5년마다 1% 포인트씩 떨어져 왔으며, 이 추세가 유지된다면 다음 정부에서는 제로 성장시대에 접어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렇게 되면 2년마다 한 번씩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의 늪에 빠지고, 연간 성장률이 –1% 밑으로 내려가는 실물 위기가 일어날 확률이 20%나 된다는 것이다.

금융연구원도 비슷한 맥락의 진단을 하고 있다. 1990년대에 6%대에 머물렀던 잠재성장률이 10년마다 2% 포인트씩 떨어져 2010년대에는 2%까지 내려왔다고 분석한다. 금융연구원은 자본, 노동, 생산성을 기준으로 낙관적·중립적·비관적 세 시나리오로 미래를 점치고 있다. 중립적 시나리오에서는 잠재성장률이 2021년부터 1%대에 진입한 후 2030년에 0%대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비관적 시나리오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2025년에 1%에 턱걸이한 후 2035년부터는 아예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한다. 생산요소가 적정 수준으로 증가하는 낙관적 길을 걸어야 그나마 현재의 2%대를 지켜낼 수 있다.

우리 경제는 지난해에 팬데믹의 여파로 성장률이 –1% 역주행했다. 올해는 여전히 변이 바이러스 충격에 노출돼 있지만, 어느 정도 반등에 성공해 4.0%의 성장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같은 경제의 호전은 경제가 바닥이었던 지난해를 기준으로 삼는 데 따른 통계의 기저효과에다 통화와 재정정책 같은 단기 경기부양 정책이 주효한 데 힘입은 것이다. 응급 대응의 효과라는 말이다. 경제의 취약한 기초 체력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이 허약해진 것은 고령화 등으로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데다 투자 부진, 생산성 정체 등의 요인이 한데 겹쳐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해법은 증상 자체에 포함돼 있다. 제로 또는 마이너스 성장으로 가는 길을 피하려면 먼저 고령자와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를 확대해 노동 공급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 특히 인적 자본 축적이 성장의 주 엔진으로 작동하는 만큼 교육개혁 등을 통해 창조형 인재를 배출하는 시스템을 갖추는 게 긴요하다고 김세직 교수는 강조한다. 투자 촉진과 생산성 제고를 위해 규제 개혁도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분석을 보면 우리나라는 회원국 중에서 상품 규제가 가장 강한 순으로 5위에 올라 있다, 규제를 푸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생산성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이 큰 만큼 복잡한 절차와 불명확한 승인 기준 등을 해소해 기업이 역주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넓게 열어줘야 한다. 김낙회 등 전직 경제 각료들은 ‘경제정책 어젠다 2020’에서 자유, 복지, 환경, 안전 등에서 앞서가는 ‘기준국가’를 정하고 그 나라 수준으로 규제를 개혁하자는 제안까지 하고 있다. 아울러 양극화와 지역 격차 해소도 필요하다. 노동생산성을 올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누적돼온 문제로 한 번 꺾인 잠재성장률을 다시 끌어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회색 코뿔소’ 적색등에 위기의식을 가지고 중장기적 안목으로 총체적 대응을 해야 낙관적 시나리오로 주행로를 바꿀 수 있다. 결국은 ‘성장 의지’를 재점화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중대한 이 과제를 놓고 대선주자들이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빠뜨려서는 안 될 대선 관전 포인트이다.

최남수 필자 주요 이력
▷서울대 경제학과 ▷캘리포니아대 버클리캠퍼스 경영학 석사 ▷MTN 대표이사 사장 ▷YTN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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